이문열 강연회에 다녀와서

2010.08.29 13:00

정찬열 조회 수:609 추천:78


소설가 이문열 강연회에 다녀왔다. 최근 3일에 걸쳐 LA에서 진행된 행사였다.
  이 행사를 주관한 동서문화교류회는 “한인 이민자들의 자아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이문열을 초청했다고 홍보했다. 이문열씨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민사회라는 특별한 환경 속에서 한인들이 자아와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첫째 날. ‘문학과 삶의 성찰’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작가는 부친의 좌익활동 및 월북으로 인해 강요된 불이익과 고통을 감내하며 방황했던 젊은 날,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가 아들의 앞길을 막던 막막했던 시절을 극복해 나간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반역의 자손이었던 김삿갓의 이야기에 자신의 체험을 보태 ‘시인’이라는 소설을 썼다고 했다. 그 책을 주문해서 읽었다. 김병연의 허구적 전기요, 이문열의 위장된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아버지를 극복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의 고뇌, 그리고 그가 택한 현실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었다.  
  둘째 날. ‘나의 삶, 나의 문학’ 강의가 끝나고 질의 응답시간이 되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지도자의 자질을 언급하면서 그는 “지도자의 덕목가운데 도덕성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덕 같은 것에 얽매이지 말아라. 아무렇게 살아도 지도자가 되는 데 문제가 없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지도자일수록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명제다. 더구나 이번 강의가 ‘이민자들의 자아와 정체성 확립’을 위해 마련된 행사가 아니던가. 그동안 한국학교에서 이 땅의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르고 당당하게, 한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살라”고 가르쳐왔는데, 혹시 내가 잘못 말해오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도덕’ 또는 ‘바른 생활’이라는 교과서로 사람답게 사는 길을 공부했다. 도덕은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가늠자라고 배웠다. 이제염오(離諸染汚), 진흙 속에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도덕을 내려놓으라니. 이문열은 어떤 세상을 원하는 것일까.
  두 번째 물음은 통일에 관한 문제였다. 이문열씨는 “반 통일주의자는,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아무도 없다. 단, 이익을 헤치지 않는다면.”하고 대답했다. 남북이 GDP대비 100배쯤 차이가 나는 현실에서 잘사는 쪽이 손해 보지 않고 통일을 이룰 수는 없다. 결국 통일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닌가. 이것이 이문열의 통일관이고 역사를 보는 눈인가.
  정반합의 논리에 의해서도 이제는 통일이 순서다.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걷히고 평화가 정착되어, 북한 땅을 경유해 철도를 타고 만주로 유럽까지 연결이 되어 중국땅 조선족을 포함한 한민족 전체의 21세기 번영을 이루는 꿈. 그러한 꿈을 이룰 수 있는 저력이 우리 민족에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민사회를 위해 유명인을 초청해 강연회를 주선해온 좋은 단체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 땅에 온 우리 한인들이 돈에만 얽매이지 않고 당당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다민족 사회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위상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도록, 여러 번 행사를 개최했다고 한다.  
  언론은 이문열을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 이며 ‘한국문단의 거두’라고 소개했다. 개인에게는 삶의 지표를, 미주 한인사회에는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있는 얘기를 기대하며 강연에 참석했었다. 그런데 답답하고 아쉬웠다.  

                     < 미주한국일보 2010년 8월 21일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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