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최고 시인 이태백

2008.01.02 12:53

서용덕 조회 수:967 추천:39



당나라 최고 시인 이태백


이태백은 천재입니다.
미치광이와 천재는 종이한장의 차이 아닐까요?
이런 천재는 모든사물을 보는눈이 남다르다는데 있습니다.
호수에 비친달이 천재의 눈에는 손에잡을수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 입니다.

이태백
이백(李白/701-762)의
자(字)는 태백(太白),
호(號)는 청련거사,
그래서 보통 이태백이라 부른다.

당나라 시가의 대명사
중국시를 이야기할 때 이태백을 뺀다면 정말 허전할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보통 중국시라고 하면 당나라 때 시를 연상하고,
당나라 시를 연상하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시인이 이태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태백이가 뭐를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유명하단 말인가?

엽기적인 출신 성분
우선 이태백이란 인물은 출신성분이 아직도 불가사의하다.
중국 사람이란 설도 있고 중국이 아닌 북방 이민족 출신이란 설도 있다.
아버지는 중국인인데 어머니는 서역--지금으로 말하자면 중동 지방의 소국
출신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그 유명했다는 이태백이 국제결혼의 산물이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젊었을 적 검술 익히며 협객의 꿈을

비교적 공인되는 이야기로는 이태백이 25세 이후 근 20년 가까이
중국 각지를 유랑했다는 점이다. 20년이란 세월이 짧다면 짧겠지만
산천이 변해도 2번 변하는 긴 세월. 이렇게 긴 세월 동안 그의 행적을
낱낱이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그가 젊었을 적 검술을 익히며 협객을
꿈꾸었던 점으로 판단하건대 그저 낙백한 문인의 허송세월은 아니었을 것이다. 방랑과 유랑으로 점철되었던 이 시기에 이태백은 정치에 뜻을 두고 관직을 얻어 포부를 펼치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절에 당시의 시인들 중 이름난 작가들--두보를 비롯하여 맹호연, 왕창령 등과도 교류를 했다.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적선이란 칭호까지
정치적으로 포부를 펼치려 했던 시도가 결코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았던지 42살 되던 해 당시의 황제 현종의 부름을 받고 장안으로
들어가 한림학사를 3년 정도 하게 된다. 이 시절 하지장이
그의 시를 읽고는 경탄하여 소리치길 : 「이건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에서 귀양온 신선의 작품이야.......」 이로써 이태백은 문명을 날리게 되었다. 이적선이란 별명은 이렇게 얻게 되었다. 적선의 적(謫)은 귀양, 선(仙)은 신선(神仙)의 뜻. 합치면 하늘 나라에서 쫓겨난 신선(神仙).

한창 뜰 때는 이런 일도..
그렇다면, 이태백이 한창 ‘뜰’ 때는 어느 정도였을까? 황제 앞에
초대받아 <청평조 >를 지으며 당시의 세도가 고력사에게 신발을 벋기도록 하고 양귀비에게 벼루를 받쳐들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당시의 세도가를 무릎 꿇기고 신을 벗기라고 했다는 것도 가관이지만
황제의 애첩이자 황제를 움직이던 양귀비에게 벼루를 들라고 했다는 것은
마치 시종처럼 부렸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사건으로 인해 훗날 고력사에게 일격을 당하긴 했지만
여하튼 이태백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아니할 수 없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화려하고 낭만적인 장안도 그를 묶어둘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고력사의 해꼬지도 해꼬지였겠지만 억매이기 싫어하는 그에게는
다시 방랑벽이 도졌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유랑길에 올라 한때
도사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그의 나이
이미 쉰 다섯이었다. 이듬해 여산에 은거하며 주옥같은 작품을 창작했다.
그 이후 다시 하산하여 제후의 막료를 지내기도 했지만 오히려 반란에 연루되어 죽을 뻔하기도 했다.
결국 유배 도중 사면을 받았지만 이미 그의 시절은 다 갔는지 말년에
양자강 유역을 처량하게 떠돌다가 가난과 울분이 교차하는 가운데
6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태백의 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천재성에 비해본다면 너무도
초라한 죽음이었다. (태백사-이태백을 모신 사당)

복잡한 성격, 복잡한 작품 경향

이태백의 성격이나 작품 성향은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들다.
그의 일생 행적이 복잡한 만큼이나 다채롭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 협객 행세를 했었고, 산중에 은거하여 도사 생활도 한데다
막료로 들어가 권모술수도 꾸몄으며 천방지축 술주정을 하기도 했었다.
그 자신이 스스로를 일컬어 광인이라 했을 정도로 마음 내키는대로
세상을 살다 갔다. 원래 천재란 어떤 일정한 카테고리에 묶는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하지만 굳이 이태백의 성향을 분류해 본다면
유가 도가 묵가의 결합이라고나 할까?

작품을 통해 음미해 보는 이태백 1

그러면 지금부터 이태백의 대표작을 몇 수 감상하기로 하자.
현재 이 글을 쓸 때는 아직 추석은 아니지만 보름달을 생각하며
다음 <정야사>를 읽어보자.

머릿맡에 밝은 달빛 / 床前明月光,

땅에 내린 서리인가 / 疑是地上霜

고개 들어 명월(明月)을 보곤 / 擧頭望明月

다시 숙여 고향 생각 / 低頭思故鄕.


위 작품은 고향을 생각하는 시(詩)로서는 압권이라 할만 하다.
불과 20자에 불과하지만 객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객지의 잠자리란 불편한 법이므로 아마도 잠을 못이루고 있을 것이다.
특히 한가위 즈음하여 고향에 가지 못하고 객지를 떠도는 신세라면
더욱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침상의 머릿맡이 너무 밝다.
하얗게 내린 서리 처럼 차갑게 내리는 달빛. 객지의 외로움이
더욱 깊어만 간다. 그래서 몸을 일으킨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쳐다
보았겠지. 하늘에는 밝은 달이 떠 있다.
저 달은 물론 나도 보지만 나의 사랑하는 부모형제도 똑같이
보고 있을 것이다. 생각은 자연히 고향으로 달려간다.
고향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오래토록 뵙지 못한 부모를 생각하면 현재 객지를 떠도는
내 신세를 한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위 20자로 압축 요약하여 깔끔하고도
여운있는 작품을 빚어낸 것이다. 별로 어려운 글자도 없다.
일반 시인이 통속적이고 쉬운 글자를 사용하여 작품을 지으면
뭔가 천박한 경우가 많은데 이태백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듯 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근엄한 운율과 탄탄한 구성의 두보(杜甫) 시는
모방이 가능해도 평이하지만 천의무봉(天衣無縫)에 가까운
이태백 시는 모방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품을 통해 보는 이태백2

다음 작품은 <산중문답(山中問答)>

묻건대 어이하여 청산(靑山)에 사십니까/ 問余何事栖碧山

마음이 느긋하니 미소로 대답한다/ 笑而不答心自閑

시냇물에 복사꽃 아득히 흘러가니/ 桃花流水杳然去

이곳이 인간세의 별천지 아닐소냐/ 別有天地非人間.


이 작품은 아마 작가가 자연에 은거했을 때 지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물었다. 누가 물었을까? 여기서 묻는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길손이면 길손, 등산객이면 등산객 누구든 상관이 없으리라.
문제는 대답. 어떤 이유에서 청산에 산다.....
이렇게 대꾸할 수도 물론 있겠지만 그러나 이미 자연 속에
묻혀 살면서 자족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경우라면 굳이
그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웃음으로 미소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자족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 정도는 최소한 밝혀야 할 것 아닌가? 셋째 구절이 그점을 설명하고 있다.
시냇물 혹은 계곡의 맑은 물이라 해도 좋다.
복사꽃이 바람에 떨어지며 흐르는 물을 타고 둥실둥실 흘러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자연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으랴. 그래서 그중 일부,
일부 중에서도 한 순간을 포착하여 대신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람에 사뿐히 떨어지는 복사꽃,
유유히 흐르는 시냇물,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대로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지 않는가. 어느 누구도 방해하는 이 없는 이곳 푸른 산.
비록 인간 세상의 장소이지만 실은 별천지와 같은 곳.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일일이 설명할 수 있으랴.
그래서 미소로 답한 것이다.

위 작품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등산 매니아들의 이야기다.
내려올 것을 뭐 하러 올라가느냐 묻거든 미소로써 대답한다고 한다.
산의 좋은 점을 어떻게 일일이 설명하랴. 그래서 미소로 대답한 것일게다.

작품을 통해 보는 이태백3

이번에는 「주태백(酒」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애주가였던 이태백.
그래서 두보(杜甫)는 <음중팔선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는 바, 내용은..

이태백은 술 한 말에 시가 백편이라더니
장안(長安) 저자거리에 술 취해 잠들었다
천자(天子)가 불러도 꼼짝하지 않으며
이몸은 하늘의 주선(酒仙)이라 전해주오

李白斗酒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

☞ 饮中八仙之一(회화/任熊 작품)

작품을 통해 보는 이태백4

이런 이태백이니 그가 술을 찬미하는 작품 또한 기대가 된다.
제목은 <장진주>. 우리말로 하면 ‘권주가’ 정도가 되겠다.
상당히 긴 편인데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전문과 함께 번역하여 보겠다.


그대는 못보았는고 / 君不見..

황하 물줄기 하늘에서 떨어져 / 黃河之水天上來,

바다로 일단 흘러들면 다시 오지 못하는 것을 / 奔流到海不復回.

그대는 못보았는고 / 君不見..

고대광실의 거울 앞에서 백발 서러워하는 것을 / 高堂明鏡悲白髮,

아침에는 검은 실이 저녁에는 백설이 되었소 / 朝如靑絲暮成雪.

살아가며 기분 좋을 땐 마음껏 즐겨야지 / 人生得意須盡歡,

황금 술단지 멋적게 명월 대하게 하지 마소 / 莫使金樽空對月.

하늘이 나를 낳았을 땐 반드시 써먹을 곳 있으려니 / 天生我材必有用,

천금 만금 다 써버려도 돈이야 또 벌 수 있지 / 千金散盡還復來.

양을 잡고 소를 잡아 신나게 즐겨보세 / 烹羊宰牛且爲樂,

일단 만나 마셨다 하면 한번에 3백잔일세 / 會須一飮三百杯.

잠(岑)형! 단(丹)형! / 岑夫子, 丹丘生,

술 권하노니 거절하지 말게나 / 進酒君莫停.

그대 위해 노래 한곡 부를테니 / 與君歌一曲,

귀 기울여 잘 들어 주시게 / 請君爲我側耳聽.

풍악 울리며 산해진미 그것이 귀한 게 아니요 / 鐘鼓饌玉不足貴,

그저 취해 깨어나지 않길 바라고 바랄 따름이지 / 但願長醉不用醒.

옛부터 성현은 한결같이 고독 속에 살았지만 / 古來聖賢皆寂寞,

유독 술 마신 자만이 지금까지 이름 남겼네 / 惟有飮者留其名.

조조 아들 조식이 평락관(平樂觀)에서 잔치할 적 / 陳王昔時宴平樂,

한 말에 만냥 귀한 술을 맘껏 마시고 즐겼다지 / 斗酒十千恣歡謔.

주인장은 어이하여 돈이 없단 소리 하오? / 主人何爲言少錢,

내가 직접 술 받아와 그대와 한잔 더 하리다 / 徑須沽取對君酌.

오색 마필, 천금의 여우 갓옷 / 五花馬, 千金裘,

애 불러 가져다 좋은 술 바꿔오너라 / 呼兒將出換美酒,

이 풍진 세상을 함께 마시며 달래보세 / 與爾同銷萬古愁.


맺으며.. 잘 가게나 이태백

이렇듯 이태백의 작품은 그리 어려운 글자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시구를 만들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그저 단번에
휘갈려 완성한 모습이다. 그만큼 시상이 풍부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자유분방한 시풍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어러분들 중에 한문에 약간의 조예가 있다면 원문을 음미해 보시기를.
내가 리듬을 살리며 번역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원래 시의
그 호방함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이 유감이다. 중국문학사
전체를 통털어 4대 시인의 하나라는 찬사가 결코 헛된 말이 아니라 하겠다.
출처 : http://pendar.hanyang.ac.kr/html/literature/3000/3240.htm



山中問答[산중문답]          
왜 산에 사느냐 묻길래

  이백  李白 /701 ~ 762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왜 산에 사느냐 묻길래
笑而不答心自閒[소이부답심자한]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 아니했지.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잎 아득히 물에 떠 가는 곳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여기는 별천지라 인간 세상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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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獨酌(독작)  <<<<

이태백(李太白)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하늘이 만일 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않았으리라.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땅이 만일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 주천이 없어야 하리라.

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니, 술을 사랑함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아라.

已聞淸比聖 復道濁如賢
이미 들었노라,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한다고. 또한 이르되, 탁한 술은
현자와 같다 하였다.

聖賢旣已飮 何必求神仙
성현 또한 술을 이리 마셨거니, 어찌 반드시 신선을 구할 것인가.

三盃通大道 一斗合自然(삼배통대도 일두합자연)
석잔을 마시면 대도에 통하고, 말술은 자연의 도리에 합한다.

俱得醉中趣 勿謂醒者傳
다만 취중의 아취를 얻으면 그뿐, 깨어 있는 자에게 전할 생각을 말아라.

출처 : 을유문화사 <고문진보> 최인욱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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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山行)
두목(杜牧 : 803~854)

遠上寒山石徑斜[원상한산석경사]
멀리 차가운 산 비스듬한 돌길을 오르노라니
白雲生處有人家[백운생처유인가]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있구나.
停車坐愛楓林晩[정거좌애풍림만]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가을 단풍을 감상하니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서리 맞은 단풍잎이 이월 꽃 보다 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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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백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으로 당시의 뛰어난
시인이었던 두보와 함께 중국 최대의 시인으로 일컬어 집니다.
두보가 시성(詩聖)으로 불리웠다면 이태백은 시선(詩仙)으로 불리웠습니다.
두보의 시가 당시 혼란스러웠던 중국의 시대상과 고통 속에 살던
민중들의 아픔을 노래했다면 이태백은 혼란스러운 현실을 초월하여
호방하고 낭만적인 시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태백을 일컬어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이라까지 추켜 세우죠.
거짓과 모순으로 가득찬 현실을 초월하여 술로 고통을 잊으려
했는 지도 모르죠.

달타령에 나오는 내용은 아마도 전설때문으로 보입니다.
술을 좋아했던 이태백이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다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거죠.
그래서 '이태백이 놀던 달'이라고 표현을 한 듯 합니다.
달이란 밤하늘에 떠 있는 존재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신비로운 존재이며 낭만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이태백은 강물에 빠져 죽은 게 아니라 여기저기
방랑을 하다 친척집에서 병들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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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백 [李白]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
호 : 청련거사(靑蓮居士)
본명 : 이태백(李太白)
별칭 : 자 태백(太白)
국적 : 중국 당(唐)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중국 촉나라 장밍현(오늘날의 쓰촨성)
주요작품 : 《청평조사(淸平調詞)》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43세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났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蕭士)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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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백(701~762)은 본명은 이백,
자가 태백입니다. 두보와 함께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그는 현재 1,100여 편의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이들의 시에는 도가적 색채가 짙기 때문에 그는
'시선(詩仙)'으로도 불립니다. 어렸을 때 고향인 사천성에서
지내다가 25세 때부터 천하를 주유하며 다녔습니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도가적 성향도 이러한 자유분방한
방랑생활에서 길러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겠죠.
43세 때에 현종 황제의 부름을 받고 수도 장안에서 몇년동안 지냈으나,
그의 성격상 궁정의 번잡한 생활은 맞지 않았고, 다시 방랑을 하게 됩니다.
이시절 그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인물이 바로 두보입니다.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방랑생활을 계속합니다.
그가 강위에서 술을 마시다가 달 그림자를 보고 달을 잡으려다
빠져죽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진실이라기보다 그의 도가적,
낭만적 성향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하겠지요.
그의 작품으로 청평조사(淸平調詞)가 대표적입니다.

>>>>>>>>>>>                          두보(712~770)는 자는 자미,
호를 소릉이라 쓰는 사람이며, 이백이 시선이라 불린 것에 대해,
그는 유교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시성(詩聖)'으로 불립니다.
하남성 공현 태생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생몰연도에서도 알수 있듯이
이백과 거의 비슷한 시대의 사람입니다. 당시는 '개원의 치'라 불리는
당의 중흥시대로부터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당나라가 급격히 쇠퇴해가는
과도기였습니다. 때문에 그의 시적 배경 역시 이백과 마찬가지로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이었습니다.
두보는 젊은 시절 과거시험에 지원했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각지를 방랑하다가 이백 등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방랑생활을 했어도 그는 조상이 두예, 두심언 등 왕조 개창의 공신들이었고,
그런 까닭에 유교적 정서를 버리지 못했던 듯합니다.
때문에 그의 시는 이백의 시와 달리 유가적 입장에서의 치국,
평천하의 소망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불우하여 양자강 유역을 주유하다 끝내
배안에서 병사했습니다. 그의 작품으로는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약 1,400여 편의 시가 현존하고 있으며,
유가적 성향이 강했던 까닭에 이후 유교사상을 중시했던 우리나라의
시단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                       백거이(772~846)는 자는 낙천,
호는 취음선생 혹은 향산거사라 하며, 앞의 두사람보다 뒷시대 사람입니다.
당시는 이미 당의 국력이 완전히 하강세로 들어가 있었고,
세상은 더욱 혼란해져 있었죠. 그는 하남성 신정 태생으로
앞의 두사람과 달리 32세 때에 과거에 합격, 관리생활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관료답게 유교적 시를 썼으나, 40세 때에 어머니와 딸을 잃고
이후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권력다툼의 와중에 여러번 좌천당하면서 그는 완전히 유교적 의지를
상실하고 한직에서 시를 짓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는 40대 이후 불교적 입장에서 시를 지어, 앞의 두사람의 도가,
유가적 성향과 또한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시는 그가 생존하는 동안 이미 대중에게 널리 퍼졌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외국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현존 작품은 약 3,800여 수이며, 대표작으로는 《비파행》
《장한가》 《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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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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