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작가가 되었는가?

2008.01.22 09:09

서용덕 조회 수:320 추천:35

김삿갓 (2010-03-12 11:32:27) 서용덕 당신도 문인인가요? 그러다면 조만연이가 얼마나 나쁜사람인지 알텐데... 송상옥 회장님도 그놈때문에 병이 악화되었다는 사실과, 이정아,조만연은 미주문단에서 ㅉㅗㅈ겨난 사람들이다는걸 모르는지? 정신 채리시라요. 아수라장이 수필가 협회라는걸 다아는 사실을... ---------------------------------------------------- 왜 작가가 되었는가? / 김용만 소설가 말할 것도 없이 작가는 지성인이다. 이제야 말로 지성주의知性主義를 회복할 때다. 하지만 그 본령을 좇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의심할 정도로 요즘의 현실이 위태롭다. 소설가 역시 그 의구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아무리 문단정치와 상업논리가 판친다 해도, 아무리 문학의 대중화가 당위성을 지닌다 해도, 순연한 문학정신만은 존중받아야 하는데, 지금 그게 무너지는 것만 같아 슬프다. 그렇다고 선뜻 나서서 경고해주는 지성과 양심도 잘 보이지 않는다. 대다수 양식 있는 작가들은 간섭하기 싫어 구경만 하고 있으니 문단에서 판칠 사람은 누구일지 뻔하다. 문학의 도구화道具化에 재미 붙여 자신의 입지를 챙기는 기회주의자나 요령주의자만 득세할 것이다. 문학의 순결성만을 믿고 미련하게 살아온 '바보들', 문학의 본령만을 지키며 외롭게 살아온 그 바보들은 문단에서 점점 더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바보들의 순박한 문학정신이 도구화를 비판하는 목탁소리로 작용할까봐 견제를 받기 때문이다. 문단은 순결한 영혼들의 세계이다. 창조적인 바보들이 어울리는 장이다. 사심이 없는 곳이다. 솔직한 곳이다. 정직한 곳이다. 거짓말을 않는 곳이다. 모함하지 않는 곳이다. 싸워도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곳이다. 의로운 곳이다. 고통을 즐기는 곳이다. 슬픔을 즐기는 곳이다. 가난을 즐기는 곳이다. 약고, 눈치 빠르고, 간교하고, 빈틈없는 자들의 활동무대가 아니다. 정치판도 아니고 경제판도 아니다. 이권으로 유혹하는 장사판은 더더욱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진실이 승리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가 아니라 '속아 넘어갈 수 있다' 는 현실이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위선이 진실이 되는 문단을 상상해보라! 문단의 사물화私物化를 막아야 한다. 파당을 지어 득세하면 그 문단권력이 모든 걸 사물화 할 수 있다. 그걸 빌미로 세력을 확장하는 그 참상을 상상해보라. 어느 문예지에서 시상施賞의 비리에 대해 읽은 적이 있지만, 앞으로 문학상이 부지기수로 불어날 것이다. 문학상을 상품화하는 기업체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런 꼴을 보려고 문학인생을 택했단 말인가. 하지만 좌절할 수는 없다. 무너져서는 안 된다. 문학의 본령을 지키자. 오염되지 말자. 농락당하지 말자. 예속되지 말자. 당당해지자. 파당을 짓지 말자. 개인으로 우뚝 서자. 개인으로 우뚝 설 때 단독성이 확립된다. 진정한 문인의 정신은 반역에 있다. 비판정신 말이다. 비판정신이 없으면 문인이 아니다. 창작은 새로움의 제시다. 같은 사물을 달리 볼 수 있는 게 반역이다. 그 정신은 창작의 기반이다. 썩지 말아야 한다. 이해득실에 눈독을 들이는 지성이라면 그건 지성이 아니다. 거짓과 위선에 농락당하는 지성은 또 다른 가면일 뿐이다. 눈치 보는 지성도 가면일 뿐이다. 무슨 덕을 보려고 자신의 거룩한 모습에 흠을 내려 하는가. 다시 생각하자! 내가 왜 작가가 되었는지, 그 자문自問에 성실히 자답自答해 보자. 그 자기성찰이 문학인의 멋이다. 문학의 위대함과 독창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제 멋쟁이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위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문학은 외롭게 진실을 캐는 작업이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진실의 원형을 찾으려고 애쓰는 지성적인 작업이다. 그 원형에는 신神도 포함될 것이다. 문단의 지성이 다른 사회의 지성과 다른 점도 거기에 있다. 만약 문단의 지성이 무너지면 한국의 지성과 양심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그 염려마저 체념으로 굳어버렸다. 그 타락이 불러올 무서운 결과를 예견해야 한다. 한국문딘의 타락은 지금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고 있다. 죄罪와 야비野卑는 다같이 타락의 일종이면서 본질은 판이하다. 토를 단다면, 죄는 한마디로 철이 없는 무작위적 타락으로서 속빠졌다. 미련하다, 순진하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타락이 뭔지 모르고 타락했기 때문에 구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야비는 철든 작위적 타락으로서 눈치있다, 능숙하다, 약삭빠르다, 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타락이 뭔지 잘 알면서 타락했기 때문에 구제가 불가능하다. 색깔에 비유해도 마찬가지다. 죄의 색은 검고 흰 단색밖에 낼 수 없지만 야비의 색은 천연색과 같아서 자유자재로 변색할 수 있기 때문에 화려한 미덕의 색을 잘 흉내낼 수가 있다. 그래서 야비는 진실한 척, 겸손한 척, 의리 있는 척하고 잘 속일 수 있기 때문에 악 중의 악이요 독 중에서도 지독至毒이다. 야비가 죄보다 더 해롭다는 말은 바로 그 때문이다. 죄는 법으로 옭아맬 수 있지만 야비는 법명이란 그물로도 씌울 수 없이 더더욱 해롭다. 공지도 '그럴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을 싫어한다' 고 했지만 거짓이면서도 참인 척인 것, 범죄이면서도 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야비다. 오염되었으면서도 순수한 척인 것,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척인 것이 야비다. 죄를 지으면 형벌이란 매를 맞지만 야비한테 걸리면 사람이 미치고 만다. (필자의 소설집「늰 내 각시더」의 '작가의 말' 에서) 지금은 돈키호테 같은 문인이 필요한 시대다. 실천적 의지에 불타 자기 몸이 부서지는 것도 모르고 돌진하는 돈키호테는 어쩜 오늘날에 꼭 필요한 개혁형 인물인지도 모른다. 기회주의와 요령주의가 판치는 우리 문단 현실에 가차 없이 창을 들이댈 용사. 그런 돈키호테를 기다리는 마음은 나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 김용만 소설가. 경기대 초빙교수 [월간《한국소설》2009년 11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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