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 수필 모음

2008.01.21 09:25

서용덕 조회 수:603 추천:39

이희승 (1896~1989 )
경기 광주 출생. 號. 一石(일석)

묘(妙)한 존재(存在)  

사람이란 대체 묘한 존재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우선 묘하고,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묘하고, 그러면서도 무엇을 생각하려고 하는것이 묘하고, 백인백색(百人百色)으로 얼굴이나  성미가 다 각각 다른 것이 또한 묘하다.
  모르면 약이요 아는 게 병인데도, 아는 체하는 것이 묘하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건마는, 다 뛰려고 하는 것이 묘하다.
  제 앞에 죽어가는 놈이 한없이 많은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저만은 영생불사
(永生不死)할 줄 아는 멍텅구리가 곧 사람이요, 남 골리는 게 저 골는 게요, 남 잡이가
저 잡인 줄을 말큼히 들여다보면서도, 남 잡고 남 골리려서 저만 살찌겠다는 욕심장이가 곧 사람이다.
   산 속에 있는 열 놈의 도둑은 곧잘 잡아도, 제 마음 속에 있는 한 놈의 도둑은 못 잡는 것이 사람이요, 열 길 물속은 잘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더니, 십 년을 같이 지내도 그런 줄은 몰랐다는 탄식을 발하게 하는 것이 사람이란 것이다.
  요것이 대체 말썽꾸러기다. 차면서도 뜨겁고, 인자하면서도 잔인한 날썽꾸러기다.
내가 만일 조물주였더라면, 천지 만물을 다 마련하여도, 요것만은 만들어 내지 않았을 것이 곧 사람이다.
  사람은 묘한 존재다. 나 자신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사람이란 참 묘한 존재다.
알고도 모를 묘한 존재다.                                                      ………[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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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벙어리 냉가슴   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전해 오는 옛 시조로서 누구의 작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말을 삼가야 한다는 교훈조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요, 말은 해야 맛이라’는 속담대로 생각한다면, 당치도 않는 작품이요, ‘문 바른 집은 써도 입 바른 사람은 못 쓴다’든지, ‘수구여병(守口如甁=입 다물기를 병마게 막아 두듯)’ 이란 격언 편으로 본다면 인생체세의 진체(眞諦)를 때려 맞힌 훌륭한 옥조(玉條)가 아닐수 없다.  
  벌써7년 전이나 된다. 수필집을 엮어서 책자로 발행할 적에 그 이름을 <벙어리 냉가슴>이라고 붙인 일이 있다. 그랬더니 몇몇 친구로부터 무슨 이유로 그런 제명을 붙였느냐, 또 그렇게 책 이름을 붙였으면, 그런 제호로 쓴 한 편의 글이 이 수필집 속에 끼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의 제명의 내력을 밝히어 두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런 이 물음에 대하여서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 거기에 어떤 내력이랄지 이유랄 것이 있지 않다고 대답해 두었다.
  그러나, 이런 이름에 전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이름을 붙인다는 자체가 넌센스 중에도 넌센스일 것이다.
  필자의 나이 많지는 못 하지만, 일생 동안 파란 곡절이 많은 세상을 살아왔다.
1896년 이 강산에 태어나서, 대한 제국 시대에 열 다섯 살을 먹었고, 한일 합방 후 일본국의 통치 밑에서 36년이란 세월을 견디어 왔으며, 1945년8.15 광복이 되매,
미군정 밑에서 만 3년을 지냈다. 대한 민국이 스립된 후에도, 이승만(自由黨) 집권
아래서, 또는 과도 정부와 민주당 치하에서, 그리고 지금은 군사 혁명 정부 밑에서,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차례차례 이와 같이 갈려 내려온 통치권 밑에서, 가지각색의 풍파를 다 겪는중 에서, 어떠한 시대에도 기탄없이 심간(心肝)을 다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자유란 한 번도 맛본 일이 없다. 대한 제국 시대에는 철을 몰랐으니까 논외로 친다 하드라도, 그후 반세기 남짓한 세월을 내려오며, 하고 싶은 말을 한 것보다 못 한 것이 더 많았다는 것은, 푼(分),치(寸)의 에누리 없는 사실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입술을 들썩이고 곧 튀어나오려는 말을, 혀를 깨물다시피 막아 버리고, 그것을  되씹어서 꿀꺽 삼켜 넘기는 일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 중에는, 필경 필자에게 겁장이라거나, 가시 없는 무골충 이라는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과거를 암만 회고,반성하여 보더라도 조고(趙高)의 부하들 모양으로, 지록 위마(指鹿爲馬)라는 호령에, 그대로 유유낙낙(唯唯諾諾) 순종
하여 입내를 낸 적이라든지 혹은 우남(雩南)의 좌우들이 민의(民意)보다도 한 걸
음 더 뛰어서, 우의.마의까지 동원시키던 과잉 충성을 본뜨려는 심보는 지니고 있지 않앗다.
  일정 시대(日政時代)에 마음으로 그랬던지, 제스처로 그랬던지는 모르겠으나,
황국 신민(皇國臣民)을 예찬하는 글을 쓰던 문인 협회에 가입하라고, 수차의 권유아닌 강요를 당하면서도, 끝끝내 거부한 것은, 오늘날 생각하여 보면 여반장
(如反掌) 같은 일인 듯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던 것을 기억하는 이는 기억하고 있으리라.
  일본인이 사갈(蛇蝎)같이 여기고, 탄압.말살책을 강행하덩 대상인 우리 국어를 후까지 지켜 보려다가 고문과 옥고를 만끽하게 된 것도, 비겁(卑怯)이나 무골(無
骨)의 소치는 아닐 것이요, 4.19 학생 데모 직후에, 교수 데모 대열에 참가하여, ‘이 승만 물러가라’고 부르짖을 때에도, 총탄 세례쯤은 각오아니 한 바가 아니었다.
  이것을 무슨 장한 자랑거리로 삼아서, 이와 같이 지면에 나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 딴은 상당히 의지를 강하게 가져 보자고 노력은 하면서도, 불현듯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경우가 하도 많기 때문에, 그것을 강조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꿀—아니 소태—먹은 벙어리가 되는 일이 하도 많다. 사적으로 나의 가정 안에서도 그렇고, 공적으로 대정부(對政府).대사회.대상사(對上司).대하예(對下隸)
등 대상에 대하여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또 국내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외국 혹은 외국인에 대하여도 그러하다.
  억울할 때, 비위가 상할 때, 아니꼬울 때, 분통이 터질 때, 이런 때에 마음대로 푸념을 하고 폭백을 해서, 시원하도록 창자 석에 뭉친 것을 죄다 쏟아 놓았으면, 오죽이나 좋을까마는, 꿀꺽꿀꺽 참아 버리자니, 벙어리 냉가슴을 앓지 않을  수가 없다.
        말하면 잡류(雜類)라 하고
        말 아니하면 어리다 하네
        빈한(貧寒)을 남이 웃고
        부귀를 새오는데
        아마도 이 하늘 아래
        살을 일이 어려왜라.
말을 해도 탈, 아니 해도 탈, 참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로구나.
그러나, 그 이유를 묻지 마시라. 냉가슴만 앓고 있을 따름이다.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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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 操  1  

  사람들이 제각기 살아가는 방식은 그들이 생활 정도와 마찬가지로 십인십색이요,
천차 만별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그 첫째 그룹은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둘째 그룹은 살기 의해서 살아가는 축들이다. 그리고 세째 유형에 속하는 그룹은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마치 실제로는 무수한 계층의 생활 정도라도 부유층.중상층.빈곤층의 세 계단으로 대별하여 나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군상은 오늘날 우리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생활고로 자살하는 이도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요, 용단력이 지나치면 온 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일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들은 아무 물질도 없고 야심도 없는 이들이다.
게다가 가장 주변성이 없는 이들이다. 만일 가진것이 있다면,가난 복(福)만 기에
넘치게 타고난 사람들이다.
  또 살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그 생활 의욕이 어디까지나 현실적이요 물질적이요 현세적이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 잘 먹고 잘 입고 권세 부리고 호강만 하면, 인생지상(人生至上)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도 생각하며,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여긴다.
그런데, 세째 유형에 속하는 그룹, 즉 죽기 위하여 산다는 그룹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얼핏 생각하기네 모순되고 무의미하기 짝이 넚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죽는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니, 마치 땅에 떨어진 밀알이 그 생의 번영을 도모하기 위하여는, 썩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리를 그대로 구현하는 사람들이다.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둘째 유형에 속하는 그룹이 수로 가장 많을 것이요, 첫째 유형에 속하는 그룹도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째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새벽별과 같이 드물어서, 별로 눈에 뜨이지가 않는다.
  동양에서도 ‘사차불후(死且不朽=죽어도 썩지 않는다)’라든지, 시사약귀
(視死若歸=죽는다는 것은 본고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철리(哲理)가
회자(膾炙)되어 왔고, 또 ‘함지사지연후생(陷之死地然後生=죽을 땅에 덜어지 다음에 산다)’이라는 말들은 모두 ‘죽어야 산다’ 혹은 ‘죽을 작정을 하여야 한다’
는 뜻이다. 이 산다는 것이 반드시 육체적인 ‘생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리라.
오히려 정신적인 생명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경지는 기독교의 교조(敎祖)인 예수가 가장 전형적인 수범(垂範)을
보였거니와, 돌이켜 우리 나라에서 찾아보기로 한다면, 삼국 시대에 빚어진 아름다운 여러 무용담(武勇譚)의 주인공들은 고사하고라도, 근세 조선에 들어와서 세조(世祖)때의 사육신(성삼문 成三問. 박팽년 朴彭年. 하위지 河緯地. 유응부 兪應采. 이개 李皆. 유성원 柳誠源) 의 죽음이 그러 하였고, 훨씬 내려와서 인조호란 때의 三學士=尹集. 吳達濟. 洪翼漢의 죽음이 또한 빛나는 전형이다. 이런 것을 오직 인신(人臣)으로서 군왕에 대한 단충(丹忠) 으로  저지른 일이라고만 하여, 구세기적 고루한 덕행으로 간단히 돌리고 말 것인가.
< 병자호란때의 삼학사, 윤집,오달제, 홍익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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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 操  2  

  이것은 온전히 그들의 건강한 지조에서 우러나온 행적이라고 아니 할 수 없으니, 지조란 순고(醇高)한 이념을 목표로 하고, 이를 향하여 용왕 매진하려는 철석 같은 의지력릐 실천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지조가 작용할 때에, 비단 군주에 대한 충의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 대하여는 효도로, 형제에게는 우애로, 부부간에는 절개로, 친우간에는 신의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지조야말로 온갖 미덕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공자가 이른바 ‘삼십이립(三十而立)’이란 말의 ‘立’도 입지(立志) 즉 지조의 ‘志’를
세운다는 것일 터이요, ‘유지자사의성(有志者事意成)’이란 말의 ‘志’도 일관하는 의지력, 즉 지조의 일 형태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조란 반드시 죽음으로
써 매사를 해결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슨 일에 임할 적에, 그것이 옳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적어도 죽음을 각오하는 결심이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조 없는 생활은 줏대 없는 생활이요, 좀더 극언한다면, 정신적 매춘부의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속성)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이념(理念)---입지(立志)---실천(實踐)
인생의 목표가 이상이 있다면(理念), 그것을 추구하려는 결심이 필요하다(立志)
또 이 결심은 그것만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다. 일단  결심한 이상 그대로 실현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實踐). 그리하여, 이 세 가지 요소가 구비되지 않으면, 지조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말을 바꾸어 설명하면, 지조에 선행하는 것은 신념이요, 신념에 선행하는 것은 가치 판단이다.
  우선 모든 사물의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최고의 가치관이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거기에 신념이 확고히 굳어진다면, 자연 그 신념대로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 판단의 능력을 기르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지식과 수양이 필요하다. 지식은 배워서 얻는 것이요, 수양은 인격의도야(陶冶)로 부터 이루어
지는 것이니, 사람은 모름지기 박학 다문으로 풍부한 지식을 축적하여야 할 것이요, 이와 같이 하여 얻은 지식으로 사리를 궁구하여, 항상 내성(內省)함으로써
수양은 그 도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즉, 지식은 외부로부터 섭취하는 것이요, 수양은 내부에서 행하는 정신적 연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양자를 겸하여 한 마디의 말로 표현할 때에, 그것은 교양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지조는 결국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고도의 교양을 쌓아올릴 때에 고결한 지조가 자연 현현(顯現)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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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 操  3  

지조를 품은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를 행하지 않는다. 즉
1) 부정.불의를 행하지 않고,
2) 부질없는 명리(名利)를 탐내지 않고,
3) 태도를 표변(豹變)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부정.불의를 행하는 일이 너무도 많다. 이것을 모르고 행하는지, 번번히 알면서도 행하는지, 일률적으로 때려서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남이 보아서 그 하는 짓이 뚜렷한 부정.불의라고 인정할 때에, 그 자신이 그것을 전연
모를 리가 만무하다. 사람이란 누구나 사람인 이상 다소의 양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요, 이 양심 또는 양식(良識)이 일말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 것 같으면 정(正)
부정(不正), 의.불의 쯤은  넉넉히 판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세상에는 부정.불의를 몰라서 행하는 사람보다도 알면서 행하는 사람이, 또 행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 분명하다. 알면서도 왜 이런 짓을 하느냐하면
그것은 과도한 욕심으로 인하여 일시 양심과 양식이 질식되고 말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양심의 질식이 자주 되풀이가 되면 곧 양심이 마비되고 말게 되는 것이요,
양심이 마비된 후에는, 어떠한 부정.불의라도 기탄없이 감행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런 짓을 하는것이 찔리는 바가 있다가도 나중에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러한 경지는 실로 위험천만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극에 이르면 수많은 사람을 희생의 제물로 만들 뿐 아니라, 결국에 가서는 자기 자신이 단말마(斷末魔)의 묘혈(墓穴)을 파서, 나락(奈落)에 떨어지는
비극을 연출하고 말게 된다.
  욕심에는 여러 종류가 잇다. 가장 비근한 것으로는 식욕.색욕이 있고, 그보다 크다고 할는지 심한 것이라 할는지, 물욕이 있다. 금전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 말이다. 이보다 고도한 것이 명예욕이요, 또 그보다 더욱 큰 것이 권욕이다.
욕심 중의 이 권력에 대한 욕심이야말로, 가장 왕성하고 가장 추잡하고, 가장 위험한 것이다.

  식욕.색욕만으로도 수많은 죄악을 빚어낸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일이다.그러나, 물욕으로 인한 폐단은 현대와 같은 연제 기구에 있어서, 그 미치는 바 범위가 너무나 크다. 한 사람의 부정 상인이 탈세.횡령.밀수.독점 등등의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갑자기 수억대의 거부가 될 때에 그 이면에서 아는 듯 모르는듯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실로 그 수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다. 때로는 국민 전체가 피해자로 되는 수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거부들은 권력과 야합하는 일이 많아서,
가속도적으로 축재의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른바 부정 축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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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 操  4  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자연인으로서의 능력은 실로 하찮은 것이다.
개개인의 체력이든지 지력이든지 서로 비슷비슷하여, 그다지 큰 차이는 없는
것이다. 설령 초인간적인 인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 단독의 능력만으로는
이렇다 할 큰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란 남의 힘을 빌어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짓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힘을 빌어서, 이것을 한데 뭉쳐 교묘히 행사하는 것이 권력이란 것이요, 이 권력이란 가장 욕심이 많은 사람이 가장 큰 매력을 느끼게 마련이다. 가장 큰 영웅심을 잉태한 사람이 가장 권력을 좋아한다.
그리고, 영웅심을 가졌다는 사람은, 대개 정치인이란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
  현대 우라 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은 물을 것 없이 우남(雩南)
이었다. 그는 1대, 2대, 3대를 거쳐 제4대 대통령까지 되려 하던, 그만큼 권력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만일 그가 제1대 대통령만으로 마치고 뒷전에 물러 앉아서, 우리 나라 정계의 원로(元老) 노릇을 하였더라면, 여러 십년 동안 해외에서 독립 투쟁의 경력과 아울러, 초대 대통령이라는 실적을 맞붙여서, 틀림없이 우리 정계의 커다란 인물이 되었을 것이요, 퇴임 후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실로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라는 깨끗하고 거룩한 위인.성자가 되었을 것이다. 백보를 양하여, 제2대 대통령으로만 은퇴하였더러도 이와 같이 되었을 것이 의심없다.
  그러나, 그의 제한 없는 욕심의 팽창으로 인하여, 그 말로가 과연 어떠하였던가.
실로 안타깝고 절통한 분한 노릇이었다. 우리는 속절없이 위인 하나를 잃었다. 후세에라도 비록 일개 정치인이란 기록을 남길는지 모르겠으나 국민 거개가 추앙하는 위대한 성자적 정치가라는 영예는 영원히 상실되고 말았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지나친 욕심은 패가.망신의 장본이라더니, 새삼 그 뜻을 실제적으로 되세기게 한다. 과도한 욕심이란 참으로 더럽고 무서운 것이 아닌가. 그는 그렇게도 현명하지 못하였던가.
  경위(經緯)와 색태(色態)는 다를지라도, 이와 같은 예는 이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만송 일족(晩松一族)이 비참한 대단원으로 끝막음을 내렸고, 최지.한지의
사형과 투옥 등은 우리에게 어떠한 암시와 교훈을 내려 주는 것인가.
   누군가가 말하였다. ‘자유는 물과 같은 것이라’고. 이 물에서 헤험을 잘 치면
신체도 건강하여지고 쾌감도 느낄 수가 있지만는, 잘못하다가는 물에 빠져 죽게
된다.이와 같이 자유에도 빠져 죽는 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권력은 불과 같다’고 말하고 싶다. 불을 잘 이용하면 보온과 공작의 방법도 되고, 암흑계의를 밝히는 광명도 될 수 있지마는, 이것을 잘못하여 악용하게 되면, 화재를 일으키어 가장 집물을 소실할 것은 물론 인축에도 피해를 입히고, 자기 자신까지도 타 죽고 말게 되는 것이다.
  즉, 권력의 악용은 자유의 악용보다도 그 피해의 범위와 정도가 극심하다.
물의 경우는 자신의 익사에만 그치는 것이 보통이지만, 화재로 인하여는 대량의 물화와 수많은 생명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 왔다. 수영을
하다가 익사하는 것은 자작지얼(自作之孼)이라고나 할까. 철없는 불장난을 하다가
화재를 유발(誘發)하게 되면, 그 피해가 자신.자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널리 타인들에게까지 미쳐서, 막대한 재해를 불러오게 되나니,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
  우리 속담에 ‘도둑의 찌끼는 있어도, 불의 찌끼는 없다’는 것과 같이, 화재란 한 번만 일어나게 되면,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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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 操  5  

  필자는 일찌기 인간 중에는 ‘낙지족(族)’이란 일족이 있다는 것을 말한 바가 있다.
낙지족은 분명히 여기서 분류한 바 제2의유형, 즉 살기위하여 사는 부류에 속하는 인간들이다.
  우리 말에 ‘염량 세태(炎凉世態)’란 말이 있지만, 이 족속이야말로 이 염량세태의 원리를 가장 민감적으로 가장 날쌔게 적용한다. 어떤 사람이 득세를 하게 되자,
어느 틈에 달려가서 갖은 교태(驕態)와 교언(巧言)으로 아유 부용(阿諛附庸) 한다.
  새로 임명된 장관이 취임하기도 전에, 그 예하(隸下)가 될 공무원이, 여러가지 수추로 아름답게 꾸민 어항에 값비싼 열대산(熱帶産) 완상어(玩賞漁)를 담은 선물을 가지고 와서, 주인공에게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허리가 접히도록 절을 한다.
  이것의 답례로 주인 집에서는 차를 내온다. 그리 신통치 않은 커피였지만, 권에 따라 조심성스럽게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어서, 한 모금 맛을 보고 나서는, “장
관님 댁 커피는 참으로 별미 입니다.” 하며 치겨올리기 시작한다.
  부인도 동석한 자리에서, 새 장관이란 자는, 저의 집에서 기르는 개 자랑으로 자기네 가문을 빛내 보려 한다. 그것은 무슨 순종인데, 값이 몇 십만 원이요, 족보가 뚜렸하고, 주인의 눈치를 잘 알아차려서, 영리하고 신통하고 건강도 좋고, 어떻다고 늘어놓는다.
  그 부하 될 하객이은  이 말을 즉시 받아서, “그 개의 종자도 좋겠지만, 그것이 다 사모님께서 잘 거두어 기르시고, 훈련을 잘 시키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두부터가 그럴듯한 아양이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 식으로 하여야만, 신장관의 애부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관해유영술(官海遊泳術)의 중요한 강령
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하는 것이다.
  모 도지사가 이 승만 대통령의 낚시질 행차에 배행하다가 대통령이 속이 불편하였던지, 가다랗고 두툼한 방포 일선(放砲一聲)을 내 뽑아 터뜨렸다.
“각하, 뱃속이 후련하시겠읍니다.” 이만하면 교언(巧言)치고는 최우수상 감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하여야만, 낙지족들의 본령은 충분히 발휘되고, 그들의 목적도 달성할 수 잇게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갑(甲)이란 사람에게 붙어서 진충갈력(盡
忠竭力)을 하다가도, 오늘은 을(乙)에게 매달려서 갑을 여지없이 비방한다.
며칠 전에는A당(黨)의 주요 간부로 활약하던 사람이, 어느새 B당에 입당하여 갖은
교태와 아양을 다 부린다.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그러나 그것은 무슨 상관이냐. 나 자신의 실리만을 구득(求得)하면 어량(於量)에 족의(足矣)다.
  이것이 개판인지 알 수 없으나, 오늘날 세상은 이러한 이매망량(魑魅魍魎)들이
백주 대로상에서 –아니 대광장에서—활개를 치고 난무한다.
  낙지족들이 여러 개의 손(발)을 가지고 어디 가서든지, 누구에게든지 칭칭 감아 매달려야만, 그들의 의도하는 바 지위.권력.재산 등을 보유할 수 잇고, 개척할 수 있는 모양이다. 마치 주사(酒肆).청루(靑樓)에서 홍등.녹주의 부란(腐爛)한 분위기
를 발산시키면서, 유두 분면(油頭粉面)----아니 전발(電髮).염면(炎面)의 미.추희
들이, 오늘도 김모, 내일은 이모란 식이 아니라 이 시간에는 장지, 다음 시간에는 정지를 멎아들여, 신구 교착되고 동서 겸전한 웃음으로 휘말아서, 송영의 겨를이 없는 정조 대매출가와 같은 추태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잇다. 이것이 과연 성세인지 탁세인지 치세인지 난세인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순진하고 우직(愚直)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은 이러한 낙지술을 도저히 체득(體得)
할 도리가 없고, 입내를 낼 수도 없으므로, 자연 밀리고 넘어지고 파묻혀서 현세의 낙오자로 전전 유랑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지조란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노래기 회(膾)를 먹을 비위와 토치카의 심장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리고 이렇게 하여야만 금시발복을 얻게 된다 할지라도, 얼굴이 홧홧거리고 마음이 간지러워, 어떻게 이런 가면이야 쓸 수 잇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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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 操  6  

  이상과 같은 변절자를 받아들이는 편을 두고 생각하여 보자.
아부를 유일한 능사와 수단으로 삼는 낙지족의 행장을, 변절인 줄 깜깜 모르고서, 용납한다고 인절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만무하다. 상당한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그리하여 갖은 교태와 아양을 부리는 낙지족들이 필사적으로 달라붙으려는 대상이 되는 인물이라면, 그들의 지능도 보통 이상의 수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므로, 배꼽에 유리를 붙이고 들여다보듯이, 그들의 속셈을 샅샅이 들추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 딱 감아 버리고, 이것을 용납하고, 그들을 등요하는 것은, 그들의 이용 가치를 저울질하여 자기들의 포부와 경륜의 실현을 도모하는데 알맞게 써 먹고 부려 먹자는 야심에서 하는 짓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낙지족들의 부정.불의가 악의 소인을 다분히 내포한 것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이를 용납하여 이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도 그만 못지않게 악을 배태(胚胎)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부인해야만 할 것인가. 그 근거를 찾아내기 심히 곤란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채반이 용수가 되도록 우겨 대고, 창자루를 활등이 꾸부려 본댔자, 사슴(鹿)은 사슴이요, 말(馬)은 의연(依然)한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너도 부정 나도 부정, 온 세상이 부정으로 판을 티고 말게 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필자는 여기에서 기하(幾何)의 정리와 같은 명확한 공식을 내려 보려 한다.
  ‘부정은 틀림없이 부패를 초래하고, 부패는 필연적으로 멸망을 불러오게 된다. 그러므로 부정은 멸망의 절대적인 원인이 된다.’
이 공리야 말로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고, 변경시킬 수도 없는 엄숙한 철칙이요, 천지 자연의 공도다.
  이러므로, 우리는 오늘과 같이 ‘지조’의 아쉬움을 느낄 때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갖은 방법을 다하고 총력을 기울여, 사람의 마음속에서 ‘지조’의 씨를 심자. 그리하여, 이것을 잘 가꾸어서 성장시키자. 활로는 오직 여기에 있다.
   만일 사람이 ‘지조’로써 마음의 지주를 삼게 되기만 하면, 다음의 세 가지를 능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1)  죄악 박멸(罪惡 撲滅)= 정의.정도를 견지하고, 이를 위하여 투쟁한다
  2)  공영 공존(共榮 共存)= 자기와 자기의 것을 아끼듯이, 남과 남의 것을 존중할                                   줄 안다.
  3)  희생 정신(犧牲 精神)= 의(義)를 위하여서러도 믿을 때에, 생명을홍모(鴻毛)
                                와 같이 가볍게 여긴다.
==================================================[1966년]
정리:서용덕 입력일자;12/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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