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피천득

2008.01.22 09:13

서용덕 조회 수:567 추천:37

수필가 피천득 선생 별세 [출처;미주중앙일보 LA]


수필 '인연'의 작가 금아(琴兒) 피천득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7년 5월 25일 오후 11시4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97세. 평소 폐렴을 앓아온 피 교수는 10일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해 보름 넘게 치료를 받아왔다.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피 교수는 37년 중국 후장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수필을 문학 장르로 정립한 작가로 평가받았다.


#거문고 소년

금아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열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특히 어머니를 향한 금아의 애정은 각별했다. 아흔이 넘어서도 '엄마'라고 불렀고, 당신을 기린 수필 '엄마'를 남겼다. 어머니 말고 소년 피천득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 두 명이 더 있다. 금아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월반해 제일고보(현 경기고)에 입학했는데, 그때 그의 재능을 주목한 이가 춘원 이광수였다. 춘원은 금아의 중국 유학을 권했고, 유학을 마친 금아는 춘원의 집에서 3년간 기숙하기도 했다. 거문고 소년이란 뜻의 아호 금아도 춘원이 지어준 것이다. 거문고 잘 탔던 금아 어머니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금아는 도산 안창호를 만난다. 도산도 금아를 몹시 아꼈다. 도산은 금아가 아프자 요양소에 입원시켰고 아침마다 문병했다. 도산과는 안타까운 일화도 있다. 도산이 순국했을 때 그는 조국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경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때 일을 금아는 평생의 한으로 짊어지고 살았다.

#서영이와 난영이

금아는 영원한 어린이였다. 늙어서도 늘 어린이의 표정을 짓고, 어린이를 '어린 벗'이라고 부르며 어린이처럼 살았다. '엄마! 나는 놀고 싶은데 무엇하러 어서 크라나'('아가의 슬픔'부분)라고 드러내놓고 어리광을 부렸다. 천생 어린이 같은 금아를 작가 최인호는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인연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라고 불렀다.

금아는 일생에 두 여성이 있었다. 엄마와 딸 서영이다. 금아는 외동딸을 끔찍이 위했다. 딸이 조금만 아파도 학교에 안 보냈고, "아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알리고 다녔다. 수필집 '인연'(1996년)의 세 장 중 한 장을 '서영이'라 이름 지어 딸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전했다. 거기서 금아는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라고 적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미 하버드대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55년, 금아는 딸 선물로 인형을 사왔다. 그 인형을 금아는 여태 간직하고 있었다. 씻기고 이불 덮어 재우고, 철 따라 옷을 갈아입히며 쉰 해를 함께 살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딸 서영이를 대신한 사랑이었다. 인형의 이름은 난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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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가 피천득 연보

    ▲1910년 5월29일 서울 출생          
    ▲1923년 서울 제일고보 입학
    ▲1926년 상하이로 유학. Thomas Hanbury Public School에서 수학
    ▲1929년 상하이 호강대학교 예과(豫科) 입학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 '소곡' '파이프' 등 발표
    ▲1931년 호강대학교 영문학과 진학
    ▲1937년 호강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서울 중앙상업학원 교원
    ▲1945-1946년 경성대학교 예과 교수
    ▲1947년 '서정시집(抒情詩集)'(상호출판사) 출간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1954-1955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
    ▲1960년 '금아시문선(琴兒詩文選)'(경문사) 출간
    ▲1963-1968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주임교수
    ▲1969년 '산호와 진주'(일조각) 출간
    ▲1974년 서울대학교 교수 퇴직
    ▲1976년 수필집 '수필'(범우사), 번역시집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정음문고) 출간
    ▲1980년 '금아문선(琴兒文選)' '금아시선(琴兒詩選)'(일조각) 출간
    ▲199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1993년 시집 '생명' '삶의 노래-내가 사랑한 시, 내가 사랑한 시인'(동학사) 출간
    ▲1995년 인촌상(문학부문) 수상
    ▲1996년 수필집 '인연,' 번역시집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샘터) 출간
    ▲1997년 미수(米壽) 기념 '금아(琴兒) 피천득 문학 전집(전 5권)'(샘터) 출간
    ▲1999년 제9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2001년 영문 시ㆍ수필집 'A Skylark'(샘터) 출간
    ▲2002년 '어린 벗에게'(여백) 출간
    ▲2003년 '산호와 진주와 금아'(샘터) 출간
    ▲2006년 '인연' 러시아어판(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출간
    ▲2007년 5월 25일 향년 97세로 서울아산병원서 별세.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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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작 <인연>은 20대 이상의 성인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학교 교과서에서
익히 배워서 익숙한 작품이지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로 어린 시절 유학을 갔다 묵은 하숙집 딸 아사코(朝子)와의
세 번의 만남을 소재로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짧은 이야기이므로, 한 번 읽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래에 원문을 올립니다. 읽어보시면 내용 파악이 쉽게 됩니다.

■ 주제 : 어린 시절 만난 일본의 한 여자 아이와 얽힌 인연

■ 이해와 감상

  인연에 얽힌 필자의 아름다운 회상을 깔끔하게 표현한 글로, 73년 수필문학을 통해 발표된 이 글은 이야기 전개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한 편의 꽁트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도입부분은 성심여대의 출강, 본문은 지난날의 회상, 끝부분은 만남과 인연을 생각하는 현재로 다시 돌아오는데 회상부분에는 아사꼬를 만나고 헤어진 20년의 세월이 정교하게 축약되어 있다.

  첫 번 헤어질 때 아사꼬는 지은이의 목을 안고 뺨에 입을 맞췄고, 두 번째는 가벼운 악수를 했고, 세 번째는 악수도 없이 절만 몇 번씩한다.
서로의 몸이 닿는 면적이 자꾸 줄어드는 만큼 친밀감도 조금씩 줄어든다. 처음 만났을 때 아사꼬는 스위트 피 꽃 같이 어리고 귀여웠고 두 번째는 목련꽃 같이 청순하고 세련되었으며 세 번째는 시드는 백합같이 초라해져 있었다.
세 번 모두 아사꼬는 꽃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어릴 적 아사꼬는 학교에서 햐얀 운동화를 보여주었고 여대생 아사꼬는 학교에서 연두색 우산을 가지고 나온다. <셀브르의 우산>이란 영화를 봐도 아사꼬를 연상하고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이란 소설에서도 아사꼬를 연상한다. 하양과 연두, 영화와 소설, 지은이는 구태여 의식하지 않았을지라도 <인연>은 이렇듯 치밀한 짜임새를 획득한 수필로 지은이가 만났던 '아사코'와의 만남과 헤어짐에 얽힌 추억을 소재로 인연이란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다.

  하여간 이 작품은 이러한 점강적인 의미 전개가 곧 이 작품의 제목인 '인연'과 맞닿아 있으며,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끝 부분은 아사코에 대한 그리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피천득의 수필 세계의 특징인 간결하면서 부드러운 문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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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사월, 춘천(春川)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聖心)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出講)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禮儀)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事緣)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 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표(동경, 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紹介)로 사회 교육가(社會敎育家) M 선생 댁에 유숙(留宿)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지구, 芝區)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書生)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조자, 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一年草)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이트 피이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이트 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일 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에까지 산보(散步)를 갔었다. 유치원(幼稚園)부터 학부(學部)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牧場)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빰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離別)의 선물(膳物)로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 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역 가까운 데 여관(旅館)을 정하고 즉시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淸純)하고 세련(洗練)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木蓮)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再會)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存在)를 기억(記憶)하고 있었나 보다.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計劃)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聯想)한다. '셸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握手)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出版)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歲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解放)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結婚)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았았나, 남편이 전사(戰死)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M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興奮)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韓國)이 독립(獨立)이 되어서 무엇보다고 잘 됐다고 치하(致賀)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司令部)에서 번역(飜譯)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未亡人)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案內)해 주었다.

뽀족 지붕에 뽀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百合)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將校)라는 것을 뽐내는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週末)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景致)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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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서정시집(抒情詩集)」(상호출판사)
1960년    「금아시문선(琴兒詩文選) (경문사)
1969년    「산호와 진주」(일조각)
1980년    「금아시선(琴兒詩選)」(일조각)
1993년    「생명」「삶의 노래-내가 사랑한 시, 내가 사랑한 시인」(동학사)
2001년     영문판 시 . 수필집 「A Skylark」(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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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수필」(범우사)
1980년   「금아문선(琴兒文選)」(일조각)
1996년   「인연」(샘터)
1997년   「금아(琴兒) 피천득 문학 전집(전 5권)」(샘터)
2002년   「어린 벗에게」(여백)
2003년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샘터)
2003년   「산호와 진주와 금아」(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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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정음문고)
1996년    「내가 사랑하는 시」(샘터)
1996년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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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필문학의 백미<인연>의 작가,
피천득 선생 永眠, 향년 97세

꽃같이 순수한 감성과 성직자와 같은 고결한 인품을 가진 가야금 소년,
바닷가를 거닐면서 젖은 모래 위에서 조가비와 조약돌을 줍듯 모아둔 가야금 소년,
항상 파도가 있어 깊은 바다 밑에서 감히 산호(珊瑚)와 진주(珍珠)를 캐내지 못하는
겁 많은 가야금 소년….  <산호와 진주와 금아> 중에서



세상에 와서 사랑을 하다 간 사람…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의 삶과 문학

한국 수필문학계의 큰 별 피천득 선생이 2007년 5월  일  시경 타계했다. 향년 97세.

우리는 기억한다. 학창시절, 수필 하면 으레 떠올리곤 하던 <인연>과 저 유명한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피천득 선생의 호는 금아(琴兒),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나 수필가, 시인, 영문학자로 살아왔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언어로 표현해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수필들은 대표작인 <인연>을 비롯하여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로 시작되는 <수필> 그리고 <플루트 플레이어> <내가 사랑하는 생활> 등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명실 공히 최고 반열의 문장가이면서도 선생은 다작(多作)을 경계했다.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발표하며 문필생활을 시작한 후 70년 동안 그가 쓴 책은 대표 수필을 모은 유일한 수필집 <인연>과 시집 <생명>, 번역서 <내가 사랑하는 시>와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 등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뛰어난 영문학자로, 교수로, 유명 작가로 살았으되 그의 삶은 지극히 검소하고 소탈했다. 아흔을 훌쩍 넘어 백수白壽를 앞두고 있던 최근까지 선생은 장식품 하나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책과 음악과 더불어 조용하게 살았다.

“난 세상에 와서 그저 사랑 좀 하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어.” 라는 말에서 그의 소박한 인생관과 결 고운 심성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가 <인연>을 그리고 작가 피천득을 영영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2002년에는 <인연>의 개정판 발간을 기념해 KBS 에서 ‘인연’ 속의 여주인공 ‘아사코’의 행방을 좇는 야심 찬 기획으로 전 국민적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시청자들은 소학교와 대학 시절의 청초한 아사코를 사진을 통해서나마 만날 수 있었고, 그녀가 미국의 한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까지 접했으나… 세 번째 이후, 피천득 선생과 아사코의 만남은 더 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피천득과 샘터 -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피천득 선생은 김재순(샘터 고문), 김성구(샘터 사장)과 2대에 걸쳐 각별한 정을 이어왔다. 피 선생은 서울대 총장을 지낸 장리욱 박사를 통해 샘터와 연을 맺게 되었는데, 장 박사는 당시 김재순 <샘터> 발행인의 정신적인 아버지로 샘터 설립에 큰 도움을 준 인물.

1973년 10월 ‘찰스 램의 끝없는 사랑’으로 월간 교양지 <샘터>에 모습을 드러낸 피천득 선생은 20여 년 전 “더 이상 산문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까지 <샘터>에 글을 썼다. 1988년 12월호에는 자필로 쓴 ‘새’라는 시가 수록됐고 2002년 8월에는 월드컵의 감동을 쓴 시 ‘붉은 악마’와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환호하는 선생의 사진이 함께 실리기도 했다.

김재순 고문이 1970년대 일본 출장길에서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뒤 피 선생에게 선물한 것이 두 사람의 인연을 더욱 두텁게 이어줬다. 피 선생이 사랑하는 딸 서영이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피 선생은 수필가보다는 시인이기를 소망했기 때문. 그 후 두 사람은 30년 넘게 해마다 첫눈 오는 날, 서로 먼저 전화해 안부를 물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피천득 선생에게 세배를 가기 시작한 김성구 샘터 사장 또한 매달 한 번씩 선생을 모시고 목욕탕에 가는 일을 얼마 전까지 계속해온 돈독한 관계이다.

피천득 선생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현재 서초구 반포본동 자택에 있는 그의 방을 그대로 샘터 사옥으로 옮겨 달라고 했다. ‘피천득의 방’은 향후 파주출판단지에 세워질 샘터 새 사옥 설계도에 이미 자리 잡고 있다.

영원한 오월의 소년
머잖아 5월 29일은 피천득 선생이 태어난 날이다. 라일락 향기, 사향장미의 붉은 빛깔, 푸르디푸른 하늘, 초록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나뭇잎들… 살아 계셨더라면 올해로 아흔여덟 번째의 생신을 맞았을 것이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         - 피천득, <오월> 중에서

소설가 최인호는 피천득 선생을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인연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라고 표현했다. 생전의 선생이 환하게 웃을 때는 개구쟁이 소년이 즐거워하며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선생은 보통의 나이든 남자들이라면 유치해서(?) 도저히 할 수 없을 행동도 즐겁게 했다. 딸 서영씨가 어릴 때 갖고 놀았다는 인형 난영이는 서영씨가 미국 유학을 떠난 후 내내 선생의 침실에서 함께 잠을 잤다. 선생은 난영이를 일주일에 한번 목욕을 시키고 예쁜 핀으로 머리를 묶어주고 밤마다 눈을 감겨 재우고 아침엔 깨워주었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인형놀이를 하며 즐거워할 성인 남성이 몇이나 될까.

선생에게 사랑받은 여성이 또 있다. ‘마지막 애인’이라고 부르는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이다. 선생은 잉그리드 버그먼이 갓 데뷔한 시절의 청초한 사진과 전성기의 원숙한 사진 2장을 그가 흠모하는 작가들 바이런, 셸리, 예이츠 등의 사진과 함께 가까이 두었다. 잉그리드 버그만에 대해 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날 사귄(?) 덕분에 저런 훌륭한 이들과 항상 함께 있으니 잉그리드 버그먼은 호강하는 거야. 아무리 유명하고 예쁜 배우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지는데 난 수십 년간 변함없이 저 사진을 간직하고 매일 보고 생각하거든. 잉그리드 버그먼도 행복할 거야.”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선생은 예전에 당신이 쓴 ‘나의 사랑하는 생활’이란 글처럼 점잖게, 그러면서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세월과 벗하며 살아왔다.

“사람이 저렇게도 늙을 수가 있구나 하고 그분의 늙음을 기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나이 들수록 자신의 말년에 대한 근심은 더해만 간다. 마땅한 본을 보여줄 늙음의 선배가 귀하기 때문이다…. 연세가 들수록 확실해지는 아집, 독선, 물질과 허명과 정력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집착 등은 차라리 치매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도 늙음을 추잡하게 만든다. 그런 것들로부터 훌쩍 벗어난 그분은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선생의 미수연(米壽宴)과 구순잔치에 참석했던 작가 박완서 씨의 회고담이다.

그는 이렇듯 후배들에게 ‘저렇게 잘 늙고 싶다’는 꿈과 희망을 주었다. 몸의 기력이 다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못 느낀다고 했다. 나이 때문에 못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체질상 술, 담배는 평생 하지 않았고 운동도 산책이 전부였는데 동네나 이따금 서울대 캠퍼스 등을 산책했다. 예전에 읽던 책을 다시 읽고 브람스 등 클래식 음악을 듣고 제자 등 친지들을 만나 데이트를 하는 생활은 ‘강의’만 빼고는 교수 시절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오월의 신록을 보는 황홀함도 청년시절과 별 차이가 없고 예쁜 여자를 보면, 젊은 날처럼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 것은 아니지만 보석을 발견한 듯 기쁘고 행복하다고 했다. 선생의 문장처럼 선생의 오감(五感) 역시 나이에 큰 구애를 받지 않았음이리라. 언제든 추하지 않은 모습으로, 편안하게 떠났으면 싶다던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의 한 때 남긴 이 말씀은 어쩌면 미리 전하는 유언장은 아니었을까.

“죽어서 천당에 가더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억울한 것도 없고 딱히 남의 가슴 아프게 한 일도 없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그것도 참 염치없는 짓이지만….”

피천득 홈페이지 : http://pichyundeuk.isamto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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