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옥(1938~2010)소설가님 소천 (2월5일)

2010.03.07 05:41

서용덕 조회 수:721 추천:54

송상옥 미주한국문인협회 고문 별세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과 본보 편집위원, 본보 문예공모전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한 소설가 송상옥(사진) 문인협회 고문이 지난 5일 오후 6시30분 세인트빈센트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 입관예배는 오는 10일(수) 오후 6시30분, 장례예배는 11일(목) 오전 10시 대한장의사(1605 S. Catalina St. LA)에서 각각 엄수된다. 1938년 일본에서 출생해 마산에서 성장한 고인은 미주 한인문단을 대표하는 원로 문인으로 1982년 미주한국문협을 창립, 5차례나 회장을 역임하며 미주지역에 한국 문학이 꽃피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195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사상계’지 등을 통해 등단했으며 1969년 제14회 현대문학사 신인문학상, 1976년 제2회 한국소설문학상, 1995년 제5회 서라벌 문학상, 제7회 미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흑색 그리스도(1975), 성 바오로의 신부(1977), 바다와 술집(1977), 작아지는 사람(1977), 우리 어머니를 아시나요(1978) 등이 있다. 연락처 (818)352-1510, (213) 321-3404, (818)360-3350 미주한국문인 장 고 송상옥 고문의 장례일정을 알립니다. * 입관예배 일시 ; 2010년 2월 10일(수) 오후 6시30분 장소; 대한장의사(323)731-4040 1605 S. Catalina St. LA. CA. 90006 (베니스 BL + 카타리나 St. 베니스 길, 벌몬과 놀만디 사이 둥근 흰 건물) * 장례예배 일시; 2010년 2월 11일(목) 오전 10시 장소; 대한장의사(323)731-4040 1605 S. Catalina St. LA. CA. 90006 (베니스 BL + 카타리나 St. 베니스 길, 벌몬과 놀만디 사이 둥근 흰 건물) * 하관예배 일시; 2010년 2월 11일(목) 낮 12시 장소; 할리우드 포레스트 론 (Forest Lawn) (6300 Forest Lawn Dr. LA. CA. 90068) * 유족의 사정에 따라 장례식장이 예고드린 '한국장의사'에서 '대한장의사'로 바뀌었습니다. '대한장의사는 한인타운 '베니스 BL'에 있습니다.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미주한국문인 장 /입력:2.5. 2010 미주한국문단의 큰 어른이시며 본 협회 초대회장을 비롯하여 4번의 회장을 역임하신 소설가 송상옥 고문께서 2010년 2월 5일(금) 오후 18시 30분 LA 소재 세인트 빈센트 병원에서 위암으로 소천하셨습니다. 장례일정은 휴일이 끼어 있어 유족과 현재 의논 중이며 결정이 되는 대로 속히 전하겠습니다. 고 송상옥 선생을 추모함 정용진(시인. 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한국 문단의 거목 송상옥 선생은 조국의 격동기인 1938년 일본 부산현(富山縣)에서 출생하여 경남 마산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 이후 한국 문단의 작가 산실인 서라벌예술대학에서 문학수업을 하였고 1959년 단편 ‘검은 이빨’로 동아일보에 입선한 후 단편 ‘4악장’으로 사상계지 추천을 받았고 1969년 현대문학지 신인 문학상을 필두로 76년 제2회 한국 소설문학상 95년 서라벌 문학상, 제7회 미주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2년에는 문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미주땅에 미주학국문인협회를 탄생시키는 산파의 주역을 담당하였고 초대회장을 비롯하여 14, 15, 16대 회장을 연임하면서 미주문단의 초석을 쌓았다. 그는 가정을 사랑한 사랑의 사람이요 문학을 사랑한 문학의 대부이며 미주문학을 사랑한 문학의 태두다. 송 선생은 일생을 살면서 청렴하고 겸허하며 정확하고 분명한 삶을 살다 가신 만인의 귀감이다.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알았고 정의를 보면 박수를 보낼 줄 알았으며 악을보면 나의 갈 길이 아니라고 돌아갈 줄도 아는 분별의 사람이었다. 나는 미주문협 창간 때부터 그와 더불이 시와 수필을 쓰면서 문인의 길을 동행하였고 문단의 책임을 맡았을 때에는 서로 의논하고 염려하면서 동도겸행의 길을 걸어왔다. 인간은 누구나 지상에 한번 왔다가 언젠가는 죽는다.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바로 사는 것이 문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천품이 인하였고 선비의 풍모를 지녔으며 붓을 인생의 보배로 간직하고 일생을 살다 가신 분이다. 잠시 언론에 몸을 담기도 하였으나 많은 시간들을 창작활동에 할애하였다. 장편으로 ‘환상살인’ ‘어두움의 강’ ‘겨울무지개’ ‘세 도시 이야기’ ‘들소사냥’ ‘순결한 여인’ ‘인터넷 전자책방 등을 연속적으로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중편 소설로는 ’흑색 그리스도‘ ’성 바오로 신부‘ ’바다와 술집‘ ’작아지는 사람‘ ’마의계절‘ ’우리 어머니를 아시나요‘ ’떠도는 심장‘ ’소리‘ ’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 그리고 꽁트집으로 ’토요일 아무도 없다“를 펴냈다. 송상옥 선생은 미주문협 고문으로서 2010년 2월5일 73세로 영면 할 때까지 한결같이 부인과 자녀를 사랑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권경자 여사와 송인준 송규영 남매가 있다. 그는 정성의 인간이었고 사랑의 인간이었으며 정도를 걸어간 성실의 인간 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를 떠나보내면서 이렇게 슬퍼하는 것이다. 피카소의 말처럼 ‘인생을 짧지마는 참되고 아름답고 살기에는 길다’ 삼가 송상옥 선생의 명복을 빈다. (미주 중앙일보 10. 2월 10일) 哀悼 故 宋相玉 先生 / 秀峯 鄭用眞 拜 人間生也 白雲來 幽明今世 靑流去 相玉文友 他界信 他鄕山川 哀別淚 인간이 산다는 것은 흰 구름이 오는것 같고 명을 달리하여 세상을 떠나감은 푸르고 맑은 물이 흘러가는 것만 같구나 상옥 문우가 떠나가셨다는 소식에 타향 산천에는 슬픔의 눈물만 가득차오르네. 이승하 (2010-02-07 22:03:58) 송상옥 선배님의 소천에 목이 메입니다. 선배님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58학번으로서 저의 21년 선배가 되십니다. 창작집을 제가 몸담고 있는 문학나무사에서 내드리기로 했는데 돌아가셨다니 안타깝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국에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배님! 부디 편히 쉬십시오. 추모의 글, / 송상옥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내가 송선생님을 처음 뵈온게 1987년 봄이었으니, 벌써 23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 해 봄에 내가 신문사에 응모한 단편이 입선됐다는 전화를 받고 찾아가 만나뵙고 인연을 맺었다. 그 후로 송선생님은 내게 문단의 선배로, 문학의 길에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뿐 아니라 소설의 세계에서는 늘 스승으로 도움을 많이 주신 분이다. 송선생에게 도움을 얻고 가르침을 받은 분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문학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그 당시 1982년 부터 이곳 엘에이 지역에 미주한국 문인협회를 설립하고 창립자로 문단의 자리를 확고히 하는데 애를 많이 쓰셨다. 그리고 해마다 양 신문사의 문예 응모에 심사위원으로 수년간 수고하셨으니 그 등용문을 통해 나온 문인들만 해도 두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다. 송선생님께서 이곳 미주 땅에 이뤄놓은 문학의 사령탑이야 말로 실로 크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으시며 정통적인 문학성을 언제나 주장하시던 선생님은 좀 편협적이다 할 만큼 성품이 강직했다. 평소에 말씀이 많지 않은 편인데다 늘 엄한 표정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어려움이 있어서 가깝게 지내는 친지분이 별로 많지 않은듯 했다. 편법을 용납하지 않는 선생님은 문학하는 일을 삶의 사치나 부리는 취미정도로 여기며 이름이나 내고 단체 활동이나 하는 태도를 무척 경시 했다. 그래서 열과 성을 다해 작업을 하지 않고 글쓰는 일에 게을리하는 문인들을 대놓고 야단을 치며 싫어하는 지라 선생님을 가까히 하기를 꺼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문학이라는 한 배에 탔다, 그것도 장르가 같은 소설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을 믿고 가끔 사스러운 전화도 드렸고 몇 번 점심 시간에 만나 식사도 함께 나눴던 경험이 있다. 그 때 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의식하면서 저름 만났으며 '작품을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말아요. 혹시 표절이라도 당하면 어쩔려구요?' 이런 식으로 소심한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분의 성격이었는지 모르지만 문학에 있어서 표절 문제에 휩쌓였던 몇몇 문인들에 대한 바른 평가를 내기 위해 남이 짊어지기 싫어하는 거치장스러운 짐도 스스러 졌던 분이다. 송선생님의 이런 저런 노력이 그나마 이 땅에 문학을 꽃 피게 하는데 대단한 영향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유일한 문학 정통 잡지 '미주문학'을 계간으로 만든 후 수년이 흘러 그가 이뤄놓은 업적이 대단하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후배 문인 장태숙 회장에게 후임을 맡긴 후 당신의 문학 50년사를 정리한다고 외출도 삼가셨는데... '창작 50년, 작품에 쓰지않은 이야기들' 1,2,3, 회를 집필하시고 4회는 나오지도 못 한 채.... 아마도 가슴에 품고 가는 게 더 가치있다고 여기신 모양이다. 우리 후배 문인들에게 못 다 들져준 송선생님의 말씀 무엇인지 다 알 것 같다. 요즘으로는 짧게 사시고 인생을 마감하신 선생님께서 가슴에품고 가신 못다한 애기가 뭐겠는가? 계간 '미주문학'의 밝은 내일을 위해 문인들이여 깨어있으라! 송선생님의 약간 쉰듯 하면서 사투리 섞인 그러면서도 정겨운 목소리 어느새 그립다. 부디 안식하소서. 바다로 간 술집 가파른 언덕 너무도 숨찬 길에서 쉼 없이 떠돌던 26,645일들이 이제는 겨우 종잇장 무개 술집은 온갖 잡스러움, 천박함으로 가득 공허한 소리들만 맴돌고 비틀거림과 칙칙함이 뒤섞인 속되고 속된 인간 세상의 이름, 술집을 떠난다 벗어날 길 없는 일상의 늪 속에서 매양 허우적 거리다 아픈 가슴을 술집서 달랠 수 있었거늘 혀를 톡 쏘며 목젖을 흝어내리는 소주맛, 혀에 담은 채 간다. 생명의 근원이고 내 삶의 본향인 바다로 술집을 옮긴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꿈꾸어왔던 바다, 그 위를 훨훨 날아볼까 아니, 바다의 품에 안겨 술잔을 들리 2010년 2월9일 저녁 故, 송상옥 선생님을 추모하면서 조정희(소설가) 최미자 (2010-02-10 12:56:40) 혹시 1980 년대 후반 가든그로브 법왕사에서 법정스님 강연에서 만났던 분이 아닌가요? 늘 궁금했는데요. 미주문학책 주소 전화로도 통화가 안되었고요. 좋은 인연이셨군요. 올리신 글 잘 읽었답니다. 저는 송상옥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잘 모릅니다마는 미주문학의 기반을 닥아놓은 선배님으로 감사함을 드리면서 멀리서 그분의 명복을 빕니다. ----------제 목 : 송상옥 선생님 선생님의 부음을 대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습니다. 언젠가 뵈워야지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결국 다시 뵙지 못하고 선생님을 보내드렸습니다. 2004년 문학캠프에서 뵌 것이 마지막이었지요. 흰 셔츠를 입으시고 조용히 서 계시는데도 웬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던 분. 선생님은 문학의 길에 들어 선 저희들에게 칼같은 충고를 남기셨지요. '어려운 관문을 통하여 등단을 해서 인정을 받았음에도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는지 여기저기 배회하며 기웃거리다가 어설픈 상이나 받아내는 작가들'을 경계하시고 이민 생활에서 당장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작품에 매달려 창작하는 일이 어렵지만(실제로 선생님께서도 체험하신 일이므로), 주변에서 그들을 부추기고 격려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경희 해외동포 문학상을 수상하고도 선생님께 인사말씀 드리지 못한 것도 이런 선생님의 성품과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지...했던, 언젠가가 이제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엘에이의 따가운 햇살 아래 서있던 저에게 선생님은 등 뒤에서 한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배아기, 소설 좋아!" 한국일보 문예공모에서 가작을 했던 단편소설이었습니다. 메릴랜드에서 문학캠프에 참가하러 갔던 저에게 뭔가 격려를 해주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저는 선생님의 그 말씀을 어떤 문학상보다도 크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이제는 쉬지 말고 계속 쓰라고, 보상에 연연하지 말고 좋은 작품을 남기라는 충고로, 그리고 모두 같은 배를 타고 가는 거친 문학의 바다에서 서로 격려하고 일으켜주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여기겠습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편찮으신 것도 몰랐습니다. 한국에 있는 소설 지망생에게 선생님의 존함은 감히 부를 수도 없는 세계에 계신 분이었는데 ...미국에 와서 선생님께서 미주문협을 이끌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든지.... 그래도 뵈웠을 때는 그런저런 말 한마디도 못하고 그저 선생님의 흰셔츠만 바라보다 돌아왔던 일이 섭섭하고 섭섭합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시던 일, 순수문학을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하는 이들이 보석처럼 눈부신 걸작을 내놓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평안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장르 구별이 한정 되어있어서 생활에세이로 올렸습니다만, 저에 대한 다짐으로, 두고 두고 들여다 보겠다는 뜻에서 창작마당에 올렸습니다.> -------------------- 추모시 긴 항해 끝난 날이니 안식하시라 ―소설가 송상옥 선배님 영전에- 이 승 하 떠돌던 넋이여 이제 정박하시라 그대 70여년의 항해 참으로 힘들었으리 풍파와 싸우던, 해일을 넘던 피곤한 몸이여 이제 안식하시라 일본 토야마현(富山縣)에서 나서 마산에서 자랐고 서울 올라와 미아리 서라벌예대 문창과에서 공부했지 서울서 취직했지만 30년 미국 생활 태평양이 가로놓인 그 거리에서 그대 모국어로 소설 쓴 이유를 알 것 같다 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 사이의 거리 그 거리의 간격과 깊이 기쁨과 슬픔의 높낮이를 알 것 같다 왜 그 그리스도는 흑색 그리스도였을까 왜 그대 심장은 바다를 떠돌아야 했을까 왜 바닷가에 배를 대놓고 낮술을 마셔야 했을까 낱낱이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대는 마산과 서울과 LA 세 도시를 떠돌다 이제 쉬게 되었으니 다시는 돛 올리지 말고 닻 깊이 내리시기를 겨울에도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그곳에서 그대 안심하시라 태평양 이쪽에서도 고개 숙이는 사람들 있으니 소설책 꺼내 읽는 사람들이 있으니 ------------------------------- 미주문단, 큰 별이 지다 -송상옥 소설가를 추모하며- / 장태숙(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미주문단의 큰 별이 졌습니다. 30여 년 동안 미주문협을 사랑하시고 그 보다 더 오래 미주문단을 아끼시고 가꾸시던 소설가 송상옥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셨습니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청청한 생전의 성품답게 그렇게 가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이 충격에 우리는 너무 놀라고 황망하여 깊은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가시던 날,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은 밤새 어찌 그리도 모질게 몰아쳤는지요. 하늘도 선생님이 가시는 것이 슬퍼 통곡을 한 모양입니다. 미주문단의 가장 큰 어른으로, 미주문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시며 문학인의 참된 자세로 미주문협을 설립하시고, 초대회장부터 5번의 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미주문협을 튼실한 반석위에 세우심은 물론, 50여 년 동안 유명 소설가로서 창작활동을 펼치시어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주의 문인들에게도 더없는 귀감이 되셨지요. 너무나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점은 선생님의 등단 50주년 기념행사를 작품집이 나오는 올 봄에 열기로 했는데, 이제는 봄이 와도 할 수 없다는 것과 미주문학에 연재 중이던 ‘창작 50년, 작품에 쓰지 않은 이야기도 3회에 그치고 말아 우리가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삶 자체가 소설이셨던 선생님께서는 생의 마지막도 소설처럼 마치셨습니다.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하시는 분들은 혹 선생님이 엄격하고 차갑다고 하시지만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지켜 본 분들은 선생님께서 얼마나 낭만적이고 마음이 여린 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회식자리에서 항상 노래 대신 외우시던 김수영 시인의 시 ‘달나라의 장난’을 암송하실 때면 늘 처연하시곤 하셨지요. 문단에서 모진 일을 겪으실 땐 문단에 들어오지 말고 글이나 써야 하는 건데 괜히 진흙탕에 발을 담갔다고 한탄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폭풍 속에서도 굳건히 미주문협을 지키셨고 미주문단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선생님의 업적은 한국문단 뿐만이 아니라 이곳 미주문단에도 길이길이 보존, 기억되며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선생님과 지난 10여년의 일들이 영화의 장면처럼 스쳐갑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저에게 미주문협의 일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면 고분고분 하지 못한 저는 가끔 반항하곤 했었지요. 그때마다 호령 치시던 그 음성이 벌써 그립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땐 제가 생각이 많이 어렸어요. 그 호령으로 제가 이만큼 성장하여 감히 선생님의 뒤를 이어 미주문협의 중책을 맡고 있나 봅니다. 선생님의 숭고한 뜻에 어긋나지 않는, 바른 미주문단의 정립을 위해 더욱 전심전력하겠습니다. 높은 곳에서 항상 지켜 봐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즐겨 암송하시던 ‘달나라의 장난’ 한 부분, 선생님께 바칩니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 중 일부) 선생님 이제 이 세상살이 걱정, 근심 모두 내려놓으시고 평화와 안식의 세상에서 편안히 쉬소서 2010년 2월 11일 장태숙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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