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고개

2004.04.14 10:36

이성열 조회 수:498 추천:39

봄만 되면 우리는 살아 남기 위해서
보리 고개라는 험준한 언덕을 넘었다.

5 학년 때, 밀린 수업료 800환 때문에 나는 선생님 앞으로
불려 나갔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담담했다 .
그날 나는 그녀가 묻는 질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거짓말을 더 이상 꾸며대기에도 이젠 환멸이 났다.
몇 마디의 질문 후에 나의 그 날 교실 출입은
허용되지 않았고, 돈을 가지러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거의 매일 담임은 나를 불러놓고 수업료를 언제 가져올 지
대답을 요구했다. 어떤 때는 약속을 억지로 강요했고,
심지어는 회초리로 손바닥이나 종아리 등을 후려쳤다. 나는
나의 학부형인 할머니를 밥상머리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벼르고 벼르던 수업료 및 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돈을 주기는커녕 말 한 마디 없이
수저를 내려놓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버린다.
어느 새 누나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왜 너는 하필 밥상머리에서 돈 이야기를 하니!" 하고 소리친다.
나는 안다. 전쟁 후 부모를 잃은 나는 무슨 말을 해도
들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집으로 돌아오는 언덕길 옆 보리밭엔 누렇게 익어 가는 보리가
바람에 무거운 숨을 쉬며 파도처럼 몸을 추슬렀다.
집에 와서 나는 누이에게 선언했다.
"그 따위 학교 다시는 안갈 테야!" 그리고...
나는 모른다. 이 말이 누이를 왜 돌아버리게 했는지-.
누나는 나에게 달려들어 소리쳤다.
"너 학교에 안 가면, 그럼 어디 갈 테야? 구두닦이 하러 갈래?"
그녀는 사정없이 나를 때리며 광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너 당장 학교로 돌아가지 못해!"
집에서조차 나는 누이의 구박을 견딜 수 없었다. 어쩌란 말인가?
나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돈 때문에 학교에서도 쫓겨났고
집에서는 돈 한푼 주지 않고 다시 학교에 돌아가라고 쫓아대고-.
나는 설움에 북 받혀 눈물만 흘리다가 소리쳤다. "누이야!
수업료 낼 돈 안 주면 난 정말 학교에 가지 않을 테야!"
나는 싸리문을 걷어차고 뒷산 너머 방죽이 있는 곳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오도 가도 반길 데 없는 서러운 몸
물에나 풍덩 빠져 이미 죽어버린 엄마나 따라 가 버릴 것이다.
그러면 보기 싫은 선생님도 누이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된다.
죽고나면 엄마도 내 편이 되어 줄 것이었다.
눈물로 앞은 뵈지 않았지만, 사방에서 보리 흔들리는 소리만은
선명하게 서걱서걱 들려 왔다. 소리는 마치,
"얘야, 어서 뛰어! 우리는 네 편이야!" 라며
밭 두렁 길 양편에서 나를 격려라도 해 주는 것 같았다.
얼마를 뛰었을 때, 나는 커다란 손에 의해 뒷덜미를 잡혔고,
그 길로 질질 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이웃집 재수 아버지였다.
다음날, 나는 할머니가 어디선가 빌려 온 단 돈 200환을 손에 쥐고
잔뜩 부은 얼굴이 되어 학교로 되돌아갔다.

지금도 나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보리고개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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