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조금은 더 깊어진 침묵 속에서

2006.09.22 15:21

이윤홍 조회 수:265 추천:18




      비, 조금은 더 깊어진 침묵 속에서



      가을의 마지막 음계위로 비는 내린다
      이마에 부딪치는 사선(斜線)의 비는 차갑고 무겁다
      한 때 내장산 단풍보다 더 붉게 타오르던 사랑의 예감
      검은 잎처럼 떨어지고
      조금은 깊어진 침묵
      그때 우리는 보았다

      비는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밤을 부른다
      무너진 토담의 한쪽 귀가 빗소리에 젖고
      한낮을 앞질러 내려앉는 정밀한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는 한마리 짐승
      뼈 속까지 벌어진 깊은 상처와
      그 속으로 스며드는 가을의 깊은 우수(憂愁)

      비는 상처를 씻으며 흘러내린다
      상처를 씻으며 상처를 악화시킨다
      젖어본 사람은 알리라
      온 몸 구석구석 소리없이 번지는 저 에테르의 치명적인
      쓸쓸함을

      비 그치고나면 겨울은 성큼 흰 가슴을 드러내리라
      어둠 속 부릅뜨다 스스로 감기는 시뻘건 눈빛의 잔영 앞에서
      우리는 밤새도록 비의 레퀴엠을 듣는다
      조금은 우을하게 조금은 가뭇하게 그러나 조금은
      더 깊어진 침묵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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