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도마

2006.11.02 11:03

이윤홍 조회 수:807 추천:24

        나무도마, 그 상처를 만지다


         마켓안 깊숙히, 고기 진열대 바로 뒤에 널평상(-平床)만한 나무도마가 있다. 한가할
        때면 나는 이 도마 앞으로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 하루일을 생각하거나 하루일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손에 와 닿는 나무도마의 느낌이 유난히 차다.
         평일보다 더 맗이 고기를 쓸거나 자르는 주말이면 나무도마는 새로운 칼자국과
        검붉은 선지피로 도배 당하는데 이때 나무도마의 느낌은 정말 차갑고 어떤 때는
        섬뜩 하기까지하다. 그래도 다른 날 같으면 하루 지나면서 나무도마는 제 체온을
        되찾는데 오늘은 다르다. 아직도 어제의 느낌 그대로다. 새로 생긴 칼자국에
        생피가 배어서일까. 어제 저녁 늦게 갑자기 손님이 몰려들어와 고기를 찾는 통에
        부처( Butcher)를 돕는다고 다가와서는, 왠만한 망치보다 더 무거운 뼈 절단용 칼을
        머리위로 번쩍 쳐들어 내린친다는 것이, 그만 빗나가며 중지 끝을 스치고나가 지금
        까지생긴 그 어떤 것들보다 더 크고 깊은 커다란 칼자국을 만들었다. 그 칼자국
        속으로 방울방울 핏방울이 흘러 들어갔다. 마감시간전에 부처가 열 두번도 더
        닦아냈는데도 그 곳으로 스며든 피는 아직도 검붉은 색조를 띠고있다.
         나무도마는 20년도 훨씬넘게 칼을 받아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크고작은 칼자국
        들이 가로세로 교차하며 이리저리 어지럽게 겹치고 겹쳐, 어떤 것은 깊이 그리고
        어떤 것은 얕게 음각(陰刻)되어, 바라보면 먼 옛날 어느 나무부족의 불가해(不可
        解)한 지사(指事)들로 뒤덮인 목판(木版)같이 되어버린 나무도마. 그 나무도마
        속으로 흘러들어간 나의 피 몆 방울이 도마를 얼어붙게한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천천히 나무도마를 손바닥으로 짚어본다. 칼자국을 따라 나가면서
         칼의 종류와 칼날의 날카로움을 그려보고 또 칼을 움켜쥔 손과 툭- 불거진 손목의
         힘줄을 바라본다. 숙련된 자의 칼이 빠르고 날카롭게 긋고 지나간 칼자국위로
         초보자의 위태로운 칼이 중심을 잃고 흔들거리는 것도 본다.
          나무도마위의 어느 한 부분은 무수한 칼들이 수도없이 내려 찍혀 칼자국 자체가
         형체도 없이 지워진 곳도 있다. 이것은 상처인가? 아니면 나무도마 본래의 모습
         중의 하나인가?
          나는 다섯 손가락을 모두 이용하여 그 곳을 만져본다. 그 속으로 얼마나 많은
         피가 배어들었을까. 피가 많이 배인 곳의 표면은 손가락 끝으로 와 닿는 느낌이
         다르다. 부석부석하다. 그 곳에다 칼날을 세워 밀면 힘들이지 않아도 나무의
         표면이 가루가되어 쉽게 밀려난다. 물론 나무가루의 색은 죽은 핏빚이다.
          나무도마위에는 칼자국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는 것도 있다. 그 것들은
         아마도10년 20년전의 상처가 아닌가 싶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나무도마에
         뿌리로 박혀있는 저 옛 상처들. 그 것들을 들쳐낼 수만 있다면 수많은 칼자국
         들의 언외(言外)를 해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맨 처음, 나무도마를 내리치며 흭- 한 흭을 긋고 지나간 칼이 남긴 서늘한  
        상처는 어느 것일까. 그 상처가 제 몸속 깊이 각인(刻 印)되는 순간 나무도마는
        퉁-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전신을 떨었을테고 그 울음이, 그 떨림이 허공을 지나
        자신을 도마로 만든 그 목재소의 뒷마당에 산처럼 쌓여있던 원목들을 뒤흔들었을
        테고 그 원목의 흔들림이 원시림속 깊이 하늘을 우러러 서있는 나무들에게까지
        전달되었을 것이다.
         보라, 이렇게 바람 한 점없이 맑은 날, 거룩한 숭배자들처럼 침묵속에 고요히
        서있던 나무들이 갑자기, 너무도 갑자기 물결치듯 파도치듯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을. 그 때 숲속의 새들은 까닭없이 놀라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숲속의 온갖
        짐승들이 울부짖으며 미친듯이 숲속을 내달리던 것을.
         숲을 떠나 화택(火宅)으로 들어서는 것들은 무엇이나 상처를 입는다. 서로
        상처를 주면서 상처를 받는다. 화엄속에서 가시에 긁히고 칼에 찔기고 발끝에
        채여 크고 작은 상처 하나 둘씩 가슴에 품게된다. 그 상처를 죽을 때까지 상처로
        갖고가는 것들이 있고 하늘의 별처럼 보석으로 만드는 것들도 있다.      
         이제 나무도마는 칼의 흉터, 칼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제 스스로 상처가
        되어가고있다. 상처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이 상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무도마의 길이다. 나무도마가 완전한 "상처덩이"가 될 때
        나무도마는 더이상 나무도마가 아닐 것이다.
         나의 나무도마는 아직 "상처덩이"는 아니다. 나의 나무도마는 앞으로도 몆 년,
        아니 몆 십년 더 칼날을 받을 것이다. 칼날을 받아 "상처덩이"가 되어가면서
        가물한 기억속으로 회미하게 살아지는 최초의 자신을 언뜻 언뜻 떠올릴 것이다.
        나는 지금 그 과정의 한 순간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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