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26 05:51

이윤홍 조회 수:246 추천:22


     재


     제대앞에 놓여있는 조그만 동(銅)향로 안에서 은은히 향이
    타오르고 있다.
    불씨가 향을 따라 내려가면서 향구름이 모락모락 피워오르고
    어느덧 향은 하얀 재가되어 스러진다.
    새로이 향을 향로에 꽂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다.
    그러면 향은 다시 타들어가 또 다시 재가된다.
    어디 향 뿐이랴.
    불을 켜댄 성냥도 재가되어 버린다.
    아니, 불속에 던져지는 것들은 모두 형상과 자취도 없이
    재가되어 버린다.
     아름다운 것. 추한 것. 크고 작은 것.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모두 불속에서는 재로 변한다.
    한줌의 재를 들어 허공에 뿌려보아라.
    재는 바람결을 타고 이리저리 나블나블 불려다니다가는
    이윽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생명체이건 비생명체이건간에 하나의 존재였던 것이 우
    주의 삼라만상속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이것은 허무이며 공(空)이다.
    실체에서 비실체로의 바꿈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 그 존재를 챁아낼 수 있으랴.
    하여 재는 무상이며 덧없음이다.
     그러나 불길속에 던져지는 모든 것들이 재로 화(化)하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존재를 또렷히 남기는 것들이 있다.
    조동(粗銅)을 용광로에 녹여서 정련할 때 나타나는 순동
    (純銅)이 그렇고 다이야몬드가 엄청난 열과 압력에 의해
    생성되는 과정이 그렇다.
    인간으로서 이러한 광물질보다 더 온전히 자신을 연소시켜
    생전의 모습보다 더 찬란한 광명으로 다시 자신의 존재를
    영원성으로 또렷이 드러내는 분들이 계시다.
    누구이신가.
    그 분은 불타요, 성인들이시다.
    불타와 성인은 죽음속에서도 다시 살아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에게 주어진 삶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정도(正道)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나 불타와 성자뿐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죽음
    속에서 무엇을 남긴다.
    땅속에서도 그렇고 재속에서도 그렇다.
    사람은 죽은 후에 그냥 흙으로 변하고 한 줌 재로 변하는
    일은 결코 없다.
    사람은 그것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큰 것이건 작은
    것이건 반드시 무엇인가를 남긴다.
    언젠가 때가 와 우리들의 삶을 저 훨훨 타오르는 불길 속
    으로 던진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살면서 가슴속에 원망과 증오와 미움 그리고 멸시와 냉대
    와 거짓만을 지녔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재속에 그것들만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 사랑과 자비와 희망을 간직하고 머리
    위로는 늘 하늘을 경외하며 발 아래로는 흔들리지않는 삶의
    믿음을 굳건히 한 이들은 저 거무칙칙한 잿더미 속에다가
    순동보다 더 순동이며 다이야몬드보다 더 빛나는 보석,
    자신의 아름다운 삶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죽은뒤에 재속에서 반짝거리는 사랑은
    모든 살아있는 이들의 소중한 사리가 된다.
     재의 수요일.
    사제가 이마위에 그어주는 재의 십자가는 내 삶의 덧없음을
    깨우쳐주는 엄숙하고도 성스러운 표징(表徵)이다.
    시인은 노래한다.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신 말씀은
      영혼에 관한 말씀은 이였으리"

    하오니,
    온전한 사랑속의 사랑이신 주님,
    온전한 은총속의 은총이신 주님,
    오늘,
    사제가 그어주는 내 이마위의 재의 십자가가
    내 삶의 허무로서가 아니라
    내 죽은뒤에 땅속에서 재속에서
    영롱히 빛나는 사랑의 결정채로
    남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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