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꽃

2007.02.13 04:01

이윤홍 조회 수:841 추천:29


                 선인장 꽃





콜로라도로 장거리이사를 하고나니 집안에 꽃이 없다. 레지나와 함께 꽃을 사러
월마트로 갔다.
아파트가 좁아 꽃을 들여놓을 자리도 없고 또 단 며칠 동안이라도 여행을 할 시에는
꽃을 혼자 놓아두는 것이 마음에 걸려 기르기 쉬운 선인장을 찾았다.
아주 작은 .99센티 짜리 선인장을 사다 키우는 재미가 여간 아닌지라 이번에도
작은 선인장들이 있는 곳만 기웃 거리는데 집안이 너무 삭막했었는지 레지나가
선인장이 아닌 다른 꽃들이 있는 곳을 자꾸만 기웃거린다.
둘러보니 선인장들도 조금 자란 것들은 예외없이 모두 한 송이 내지 두 세 송이의
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가격도 $2.99에서 조금 더 큰 것은 $3.99로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는 듯싶어 꽃핀 것들 중에서 고르기로 했다.
  선인장의 종류도 다양하고 꽃 종류도 많아 어떤 것을 고를까 망설이는데 레지나가
노란 꽃 세 송이가 피어있는 손가락처럼 길쭉하게 생긴 선인장이 어떠냐고 묻는다.
바라보니 예쁘다. 아직 제 철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예쁜 꽃을 피워냈는지 신기하고
고맙기도 해서 그 선인장을 고른 다음 커다란 빨간 머리를 이고 있는 선인장 하나를
더 골랐다.
  화원을 나오는데 문 바로 옆에 실내용 장미가 띄었다. 한 참 꽃구경을 한다가
레지나가 빨간 장미를 집어 들고는 바라보며 말없이 웃는다. 장미보다 말없이 짓는
미소가 더 아름답다.
  꽃을 사고 난 뒤 우리는 꽃들에게 맞는 화분을 고르기로 했다. 선인장에게는
제일 싼 무문토기의 화분을 고르고 장미에게는 꽃이 새겨져있는 자기화분을 샀다.
  집으로 돌아와 제 위치를 찾아 꽃을 올려놓고 다음 날 레지나는 L.A.로 떠나갔다.
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 꽃들은 발렌타인 선물이라고 싱긋 웃어 보인다.  
나는 레지나의 선물은커녕 발렌타인 데이도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레지나는 말없이
선물을 챙겨준다. 생각해보니 언제나 그렇다.  
레지나를 보내고 집으로 오자 나는 바로 비닐백을 들고 아파트 뒤의 넓은 들판으로
나갔다. 아직도 군데군데 눈이 그대로 쌓여있고 땅은 질척거리지만 산책로를 따라
빈 들판을 혼자 걸어가노라니 때를 알아 챙길 줄 아는 레지나가 더 고마워진다.
  흙을 비닐백에 담아 돌아와서는 꽃이 피어있는 선인장을 제일 먼저 꺼내 흙을
채우기로 한다. 보면 볼수록 노란 꽃 세 송이가 가지런히 피어있는 것이 너무 아름
다워서 바짝 다가가 안경을 벗고 다시 들여다본다. 들여다보다가 그만 가슴이 떨려
오는 것을 느낀다. 진가민가하며 손으로 꽃을 건드려본다. 어허! 어허!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영수증을 찾아 다시 월마트로 가서 물릴까 생각하다가
다시 생각한다. 그대로 기르기로 마음먹는다.
  선인장을 화분에 옮긴 다음 흙을 듬뿍 채우며 생각한다. 선인장이 자라면서 꽃도
자라리라. 자라면서 밤사이 지고 내가 아직 눈 뜰 무렵의 새벽 어느 시간 꽃은
나보다 먼저 다시 피워나리라. 하여 내가 바라보는 꽃은 날마다 새로운 꽃이 될 것
이고 나는 날마다 똑같은 모습으로 날마다 새로이 피어있는 꽃을 대하리라.
  꽃들을 화분에 다 옮긴 다음 제 자리에 다시 갖다놓고 바라보니 아름답다.
이제 비로소 집안에 레지나와 나 이외에도 같이 호흡하고 같이 느끼고 같이 생각하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생명이 있게 되었다.  
노란 꽃 세 송이가 피어있는 선인장을 바라본다.
꽃이 말을 걸어올 날을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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