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겨울

2005.02.08 12:35

권태성 조회 수:403 추천:49

유년의 겨울-눈 이야기

권태성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겐 계절에 따라 뚜렷이 기억에 남는
고향의 추억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덕유산과 지리산 줄기가 와 닿는 산골에서 자란 탓에 특히 겨울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이 있다.  산골이다 보니 겨울엔 눈이 많아 겨울의 반은 눈과 같이 생활
해야 했다. 그래서 인지 지금도 눈이 거의 없는 이곳의 겨울은 겨울다운 맛이 전혀 나질 않는다.  눈도 그 종류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함박눈을 제일 좋아했다. 하늘을 유유히 춤을 추듯 서두르지 않고 날아서 나무 가지에도 초가지붕 위에도 그리고 나의 머리 위에도 사뿐히 날아와 앉던 함박 눈, 뭔가 품위가 있어 보이고 여유가 있어 보이며 어머님 품 같이 포근함이 있어서 좋았다. 소복이 쌓인 함박 눈 위에 두 팔을 벌리고 누어본다.  
솜이불처럼 눈은 나를 포근히 감싸고 어디서 오는 것일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송이 들, 어린 가슴에 사뿐히 날아와 아련한 그리움 심어 주던 함박눈. 나는 눈이 온 후의 정적을 좋아했다.  
엄청난 양의 눈을 쏟아 붓던 잿빛 하늘은, 조금씩 흩어진 구름 사이로 별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면서 함박 눈은 멈추고 하늘을 나는 새도 땅 위를 기는 모든 짐승들 조차도 숨을 죽이는 정적이 찾아오고
간간히 구름 뒤에 숨었다 나타나는 달빛이 하얀 눈 위에 시리도록
눈부시게 부서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함박 눈의 무게에 눌려있던
나무 가지들이 기지개를 키며 눈을 털고 일어나는 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마을의 개 짖는 소리, 동네 머슴들이 눈길 헤치며 밤 마실 다니는 소리로 정적은 깨지고 어느덧 고향의 겨울 밤은 깊어 간다.

눈 쌓인 겨울이면 우리들은 동네 개들(사냥 개도 아니고 속된 말로 똥개 들이었지만)을 동원해서 노루와 토끼 사냥을 즐겼다. 눈이 많이 쌓이다 보니 먹이를 찾아 노루들이 마을 가까이 까지 내려오고 토끼들도 눈 때문에 잘 뛰질 못해 쉽게 잡을 수가 있었다. 참새와 꿩들도 눈과 추위로 쉽게 날지 못해 우리들의 좋은 사냥 감이 돼 곤했다.
우리 어린 시절엔 참새, 꿩, 토끼, 노루 등을 보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보다는 조금은 잔인한 이야기 이지만 “잡아서 구어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을까” 하는 원초적인 본능 뿐이었다. (만일 브리짇
바르도가 이 글을 읽는 다면 얼마나 나를 야만인이라 증오 할까!!)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친구들과 동네 개들을 모으고 마을의 뒷산을 훑기 시작하면 숲속에 숨어 있던 노루와 토끼들이 놀라 뛰어 나오고 우리는 큰 소리로 “물어라 식씩” 하고 개들에게 외치면 저보다
등치가 더 큰 노루를 여러 마리의 군중심리에 겁 없이 쫓기 시작한다.
우리는 동네 개들 하나 하나의 성격과 장단점 까지도 알고 있었다.
뒷집의 기봉이네 개는 세파트 잡종으로 우리 면에서 싸움은 제일
잘 했지만 신통치 못한 놈이 어쩌다 토끼라도 한 마리 잡는 날이면
아무도 접근을 못하게 하고 토끼를 놔주지 않아 애를 먹이곤 했고
앞집의 병국이네 개는 늙고 병약해 보였지만 저보다 덩치가 훨씬
큰 노루도 한번 물면 놔주지 않는 끈질김이 있어서 우리들의 사랑을 받았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고향의 어린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함박 눈이 내리고, 동네 친구들 모으고 개들을 불러 모아서 뒷동산으로 뛰어 올라가 “물어라 식씩, 물어라 식씩” 힘차게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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