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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평문 종교개혁과 교육의 변화

2017.09.04 11:56

paulchoi 조회 수:161

 

 종교개혁과 교육의 변화

 

  16세기 북부 유럽 카톨릭 국가에 일어난 종교혁명(reformation)이다. 그 결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가 탄생되어 오늘에 이르러, 오는 10월이면 종교개혁 500 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초대교회의 생명적 전통보다는 제도 형식 교권에 치우쳐 지상의 모든 것을 대신하던 카톨릭의 모순을 배격하여 성서적 신앙으로 돌아가며 신학의 평민화(平民化) 신앙의 직접성을 뜻하는 운동이 그 배후를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문예부흥의 뒤를 이은 휴머니즘(humanism) 사회경제적인 여러 조건들이 측면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직접적인 발단은 사면장(赦免狀)에 나타난 루터(Luther, M.)95개 조문의 발표와 멜란히톤(Melanchthon, P.) 등의 협조로 일어난 독일의 종교운동이었으나 후에 쯔빙글리(Zwingli, H.) 등이 중심이 된 스위스 및 라인지방의 운동, 칼빈(Calvin, J.)등의 주동으로 쥬네브에서 일어나 프랑스, 폴란드, 스코틀랜드에 파급된 개혁교회운동(改革敎會運動), 정치 국민적 영국교회의 독립 등이 일어 나 중세기적인 기독교의 세력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이로써 성서복음주의적(聖書福音主義的) 기독교가 등장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의 이유를 인정한 일부 카톨릭에서는 종교 각성의 운동을 일으켜 소위 반종교개혁(反宗敎改革)의 기치를 들었다. 이로부터 수세기 동안 두 교회의 대립은 계속되었고 서로 경쟁적인 교세확장에 임하여 오히려 기독교는 새로운 혁신과 신앙적 영토를 넓히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카톨릭교회의 악폐를 시정하고 기독교 본래의 순수한 입장으로 환원시키려는 운동으로 이미 14세기에 위클리프(Wycliff)나 허전(Hussan)에 의해서 계획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간 후 1517년에 루터는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사원을 개축하기 위해 소요되는 막대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면죄부(免罪符)를 발매한 데 분개하여 95개 조문으로 된 반항문을 낸 데서 시작되었다.

 

 그 후 구라파 제국에 카톨릭교회에 대한 신교회설립(新敎會設立)의 일대 운동을 야기시켰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고전인 신약성서를 원전(原典) 신앙의 각성을 촉구하고 카톨릭교회의 교권주의와 교회제도에 반항해서 개인의 신앙적 자유를 강조했다. 루터가 아동을 취학시키는데 대한 설교(1530)에서 당국자를 향해서 학교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후부터 각국의 종교개혁자들은 학교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으며 우선 초등교육 시설에 주력하고 남녀의 차별 없이 초등교육을 받도록 했다.

 

 이것은 종교적 생활 및 종교적 연구에 적당한 준비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아울러 인간의 요구에 맞는 준비라고도 생각했다. 중등교육의 목적도 초등교육과 같았고, 교수는 라전어, 희랍어에 중점을 두고 히브리어, 논리학, 수학, 역사, 음악 등도 가르쳤다.

 

 종교개혁의 지지자 쯔빙글리는 재빨리 1523년에 교본을 편집해 내고 멜란히톤(Melanchton, P.)1542년에 초등아동교본을 저술했으며 트로쩬드로프(Trotcndorf)1563년에 골드 베르크학교의 규정'을 발표하는 등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또한 1502년에 창립된 뷧텐베르크대학이 신교적(新敎的)으로 개혁되는가 하면 1527년에 마르부르크대학, 1544년에 케니스 뷔르크대학, 이어서 1548년에 예나대학 등이 종교개혁과 더불어 신설되었다.

 

 그 후 종교개혁 운동에 대해서 제주이스교육 운동이 일어났으나 신교의 부흥운동은 문예부흥운동에 호응해서 일반서민교육운동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점이 종교개혁이 일반교육에 미친 위대한 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