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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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감빛

2018.05.19 09:43

최선호 조회 수:53

 

  감빛

 이미 설은 지났고 며칠만 더 지나면 정월대보름이다. 해마다 이맘때까지 동네 한가운데 김 씨네 집 뒤꼍에 서있는 감나무에는 아직도 감이 달려 있다. 감나무 맨 꼭대기에 달려 있어서 손쉽게 딸 수 있는 감이 아니다. 어릴 적 이따금 올려다보면 마치 하늘 한복판에 얹어놓은 모습으로 착각되기 때문이다. 해마다 거의 같은 자리에 달려 있다. 동네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이 감을 따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 높이 달려있기도 하지만 그 빛깔이 유난히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누구도 엄두를 내려 하지 않는다.

 

 이 감은 누구든지 따 내리지 않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한 노릇이라는 것이 동네 사람들의 누구나 지니고 있는 생각이다. 혹시라도 그 감을 따 내리기라도 한다면 하늘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오는 터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을 만큼 감의 색깔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내 생각도 그랬다.

  

 청명한 하늘 한복판에 달려있는 이 감은 유난하다. 모양은 한 개의 감일지라도 그 빛깔은 예사롭지가 않다. 붉은 빛과 노란 빛이 함께 어울린 듯 영롱함마저 지니고 있다. 극히 아름답고 이채롭기까지 하다. 가지에 너무 오랫동안 붙어 농익어서 그렇구나 싶었다. 그토록 농익은 감이 어린 내 마음에 박혀 어느덧 70여 년이 흘렀다. 어린 시절 그 시골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고, 그 후에 미국에까지 와서 사는 동안도 이따금 그 감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마다 감은 감이 아니라 사람으로 둔갑해 있는 게 아닌가. 틀림없는 사람이다. 사람 중에도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이다. 이를테면 성인의 모습이라고까지 생각되어지기도 했다. 그 감이 하늘 높이 매달려 이 마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 주먹만한 감에서 번져나는 생각은 그것만이 아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은 순전한 나드 감송향유라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분명 저것은 하늘에 달린 감송향유 한 옥합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수년 전 10월 말, 뉴욕에 문학세미나 강사로 아내와 함께 방문길에 올랐다가 김해종 감독이 시무하는 알파인처치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캐나다 쪽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눈을 부릅뜨고 시골마을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감빛을 만나기 위해 뉴욕 출발지에서 캐나다 도착지까지 줄곧 달리면서 감빛을 찾느라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 천자만홍인 알파인 산 속에도 필자가 찾는 단풍 빛은 없었는지 내가 찾지 못했는지 분간이 안 된다. 산이건 들이건 도로주변이건 보이는 것이라곤 거의 나무와 단풍뿐인데 그토록 찾고 있는 감빛은 만날 수 없었다. 뉴욕은 물론 뉴욕에서 캐나다까지 온통 깔려 있는 것이 단풍인데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거의가 노란 단풍이 자리를 차지했고 어쩌다가 빨간색 단풍이 눈에 띄긴 했으나 모두가 만족스러운 색깔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금강산 설악산 내장산 속리산 단풍이 정작 단풍다운 단풍이라는 생각에 내 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깊이 느꼈다.

 

 수년 전 내가 살고 있는 가까운 지역 로스앤젤레스 글렌데일 이름 없는 산 한편 등성이 길 옆에서 세 그루의 단풍나무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신묘하게도 그 세 그루 중 한 그루나무에서만 내가 찾는 단풍잎이 달려 있음이 눈에 띄었다. 그 나무 전체에 달린 잎이 아니라 그 나무에 달려 있는 수많은 잎 중에 오직 하나의 일새만이 내가 찾고 있는 빛을 띠고 있는 게 아닌가! 갑자기 참으로 반가움이 솟구쳤다. 너무 높이 달려 있어서,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일만이 최선이었다. 한참동안 넋을 잃었던 나는 며칠 후 다시 그곳을 찾았다. 내가 보았던 그 단풍은 붙어있던 자리마저 없이 사라지고 사라저 버렸다.(1-30-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