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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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소설 / 칼럼 책 중의 책

2020.03.20 16:31

이산해 조회 수: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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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우물 옆의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  피에르 프랜체스코 마추켈리 作



예수는 신성(神性)인가, 아니면 신화(神話)인가?

인류사 이래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이 난제(難題)는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예수의 실상을 좇고 있다.

그가 신의 아들이든, 또는 가공의 인물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현재 지구별에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基督敎)인은 동서를 합쳐 모두 21억 명이다.

이는 지구별에 존재하는 인구 77억 1천여만명 가운데 약 36%를 차지하는 숫자다.


대한민국은 어떤가. 

전체 인구(2019년 말 기준)5천 2백 만명 가운데 약 20%인 1천만 여명(천주교 370만 여명)이 기독교인으로 집계됐다.

6만여개 교회가 이들을 수용하고 있다.

대한인(大韓人)5명 가운데 1명은 예수쟁이란거다.


덧붙여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인 불교를 보자.

아시아 지역에 분포한 불교도는 약 3억7900만 여명, 그리고 중동지역에 몰려 있는 무슬림은 약 16억명으로 나타났다.


통계가 보여주 듯 예수의 파급력은 가히 전 지구적이라 하겠다.


파급력은 복음서(聖經)판매에서도 두드러진다.

신구약(新舊約) 66권을 통권으로 묶은 복음서는 2019년 말 현재까지 지구별에서 무려 60억부가 팔린 것으로 추산됐다.

경이적인 숫자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그 어느 책도 이만큼 판매된 예가 없다.


복음서가 이처럼 최고의 베스트 셀러가 된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성스러운 책(聖經)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손을 빌어 쓴 복음서는 80만 개 단어로 기술한 장엄한 서사시(敍事詩)다.


구약은 분노하고 / 선포하고 / 위로하고 / 훈계하며 세상을 평화로 이끈 하늘의 소리였다. 

역사와 교훈, 그리고 예언으로 가득한 구약은 인간 사회의 법과 도덕, 윤리를 강조한다.


구약의 골간(骨幹)은 에덴동산의 회복과 율법에 따른 복종 그리고 엄숙함이다.


구약은 과학과 의학 발전에도 커다랗게 기여했다.  


신약은 어떤가?

에덴동산 이후 두번째로 신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나로 묶은 서책(書冊)이다.


신약은 미술, 문학,음악, 철학,수학, 의학, 천문학, 항해술 등 인류사의 전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줬다.

문예 부흥기인 르네상스가 대표적 예다.


‘신은 결코 믿음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동시에, 인간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혜도 선물했다.’


신약은 하늘나라를 향한 길라잡이 지침서다. 

그리고 빛으로 지칭되는 예수의 공생애(公生涯)를 다룬 연대기(年代記)다.


신약의 창시자인 예수는 가나에서 새 부대를 선보였다. 

새부대속에는 ‘사랑’과 ‘진리’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부드러운 포도주(言約)가 담겨 있었다.


구약의 준엄함과 엄숙함이 혼합된 독한 럼주와는 다른 것이었다. 


신주신대(新酒新袋)였다.


세상에 나 선 예수는 ‘빛과 소금’을 내보이며 하늘나라를 말했다. 

문맹자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잠언(箴言)이었다.

그러고는 하늘나라의 길을 예비케 했다. 


예수가 주창한 복음의 핵심은 ‘사랑’이었다.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보듬으라’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누구라도 ‘하늘나라가 저희 것’임을 강조했다.

어느 누가 이처럼 지고지순(至高至順)한가.

이것은 막연한 추상론이 아니었다.

예수가 주문한 사랑을 베풀 때마다 실제로 느끼는 행복감의 발로(發露)인 것이다.


예수의 이같은 교훈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이렇듯 신약은 사랑 / 겸손 /, 열정 / 지혜를 하늘의 소리로 담아 낸 새 언약 궤(櫃)다.


신약은 모두 27권으로 편집 돼있다. 

이 가운데 요한, 마태, 누가, 마가 4대 복음서(福音書)는 예수의 신성과 설화(說話)를 양분하며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같은 시시비비(是是非非)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논쟁의 불씨가 된 주요 쟁점은 3가지다.

첫째 예수가 처녀인 마리아의 육신을 통해 인간세계로 왔다는 신성 설.

둘째 예수가 공생애를 통해 다양한 기적을 행한 것.

샛째 예수의 부활이다.


이는 예수를 이해하는 상징적 표징(標徵)이다.


식자(識者)들은 이 대목을 어처구니가 없는 소설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그렇다.

과학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양대 시각으로 볼 때 이 3가지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괴리다.


어찌 남녀의 결합없이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죽은지 사흘 된 썩은 시체를 불러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까?,

뿐만 아니라 38년 긴 세월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 온 눈먼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가? 

더욱이 죽은 예수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 부활했다는 것도 그렇다.

해괘망측하지 않은가.

순수이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들인 것이다.


헌데, 신약 4 복음서는 예수의 이적담(異蹟談)을 무려 서른 일곱번이나 언급했다.

예수가 다양한 장소에서 표출한 기적을 말한다.


호객을 위해 시장 통 야바위꾼들이나 조작해낼 법한 기적 행위를 버젓이 공개된 문서에 기록하다니,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만약 예수의 기적이 허구라면, 당시 복음서가들이 예수의 기적을 신약에 옮기며 의구심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한번 더 강조 하건대 예수의 기적이 가짜뉴스라면 이들 지식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집필을 거부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4권의 신약 복음서는 한점 한 획도 부정하지 않고 예수의 기적을 그대로 서술했다.


현대인들은 이 대목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신약에는 예수를 따르는 12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예수쟁이들이 등장한다.

갈릴리에 위치한 다볼 산(山) 산상수훈(山上垂訓)때는 무려 5천 여명이 몰려든 것으로 기록됐다.


뿐만 아니다.


유대 사회의 권력 지배층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헤롯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 역시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한 인물들이다.


신약에서 이들은 예수와 늘 갈등을 빚었다.

주목할 것은 이들이 예수 앞에 나타나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이를 부정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들은 예수가 마술로 군중을 현혹시켰다고 힐난했다.


이들 위정자들이 예수를 적대시 한 배경은 이랬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이 날아갈까 전전긍긍했고, 해롯은 자신의 권위가 위협당할까 두려워 했다.

로마 총독부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바라바처럼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 계기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기적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 사회의 일반 기층민(基層民)과 예수교인들은 기적을 목격하며 예수의 신성을 더욱 굳혔다는 점이다.


예수 사후 37년 후에 태어난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도 과거에 기록된 문헌과 구전을 취합해 ‘유대 고대사’를 집필했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붓을 통해 예수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따라서 예수의 기적 논란은 유대 역사학자의 사무사(思無邪)한 기록으로 불필요 한 가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만약 예수의 기적이 조작된 것이었다면, 별나게도 따져 묻기를 즐겨했던 유대 사회가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호사가들이 시사(時事)를 독점하고 있었다. 

헌데, 이들 마저도 예수의 기이한 역사(役事)에 대해서는 전혀 시비하지 않았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예수의 기적은 당시로서는 최대의 가십거리 였음에도 말이다. 


유대를 관장하고 있던 로마 총독도 예수가 보여준 기적을 폄훼하거나 카더라로 치부하지 않았다.


총독 빌라도는 오히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와의 면담에서 예수의 놀라운 행적을 가감없이 보고했다. 


예수 동시대 때 로마의 역사학자 발레루스 파데르쿠레스는 예수를 직접 목격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목격담을 이렇게 기술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예수라는 젊은이는 고통에서 신음하는 모든 병자들을 치유 시켰다.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 살려냈다. 나는 그가 너무 두려웠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매우 고매 했으며, 마음의 파장을 일으켰다.” 


예수의 발자취를 다룬 이방인 석학은 또 있다.

로마제국의 역사학자 타치투스(Tacitus)다.


타치투스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킨 자신의 걸작 ‘연대기’에서 예수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治世)때 빌라도에 의해 처형됐다고 기록 했다.

타치투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네로 황제가 폭정을 휘두르던 때였다.  


예수의 기적은 당시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오병이어(五餠二魚)로 산상수훈에 모인 5천명을 배불리 먹인 것과 죽은 나사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가공할 행적 등이 그것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해 한번도 겪지 못한 전무후무한 대사건이었다.  

죽고 병들고 죄짓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측은지심으로 베푼 기적은 신 구약을 통해 오직 예수만이 해 낸 불가사의였다.


예수의 기적은 온갖 마술이 횡행했던 인도와 로마, 그리스, 터키에서조차 단 한 건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경이로운 것이었다. 


자연계에는 뛰어난 염력(念力)또는 타심통(他心通)을 지닌 인간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지력가들이다. 

허나, 한계는 여기까지다.

이들에게는 기적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특별한 지혜도 없다.


하지만 인간 예수에게는 수퍼내추럴(supernatural)파워가 있었다.

초자연인 힘을 배가 하는 힘을 뜻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으나, 예수의 기력은 결코 인간 세계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전 우주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 속의 티끌에 지나지 않는 지구별의 인간벌레들이 미스테리로 가득한 우주를 논한다는 것은 섣부른 예단(豫斷)이다.

더군다나 우주를 관장하고 있는 신의 세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역시 지나친 오만이다.

 

현재 지구별 21억 인구가 예수를 하나님으로 굳건히 받들고 있다.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름아닌 기적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무엇보다 예수가 하나님으로 받들어지는 것은 그가 지구별에 남긴 3년간의 발자취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인류사 최초로 사랑을 강조한 인물이다.

예수 전에도 후에도 사랑을 이처럼 말한 이는 없었다.

‘사랑의 전도사’로 불린 요한도 실은 예수의 사랑이란 자양분을 섭취했던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 단 이들 마저도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주문했다.

이는 신만이 할 수 있는 자비(慈悲)가 아닐까? 


미혹(謎惑)과 혼돈(混沌)의 세기인 광학문명 시대에 예수의 가르침은 더욱 절실하다.

예수의 절대 명제(命題)인 진리가 '우리를 미혹과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없이 에고(ego)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는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가 주창한 사랑을 더욱 실천할 때다.


현대인들은 지금 사랑부재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또 한 현대인들은 자신을 성찰(省察)할 기회를 번번히 놓치고 있다.

여타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는 인간의 내면을 밝게 비춰주는 거울이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쩌면 스마트 폰일 수도 있다. 


이럴 때 한번쯤 복음서를 펼쳐 들고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도 황폐해진 심신(心身)을 바루는 위안이 될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임종 직전 집사를 불렀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봐요, 집사. 어여 서재로 가서 책을 가져오시게.”

어리둥절한 표정의 집사가 말했다.

“어르신. 서재에는 책이 수천 권이 넘게 있는데, 어느 책을 가져오라 분부하시는 건지요?”

“사람하고는…거, 책 중의 책 말일세!”


이산해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