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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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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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종 갈등을 촉발한 로드니 킹 집단 폭행 장면(출처 구글 사진)

 

 1992429

천사의 도시 LA(로스 엔젤리스)코리아 타운

 

 

윌셔 가(:Wilshire Boulevard)와 사우스 윌턴 플레이스(S Wilton PL)에 위치한 리쿼스토어 레미마틴(Remy Martin)’으로 두 남녀가 들어섰다.

다름아닌, 가게 주인인 벤자민 홍(한국명:홍준표)과 그의 무남독녀 그레이스 홍(한국명:홍예주)이었다.

 

때는 오전 8

밖은 여전히 고온다습(高溫多濕)한 기후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부녀(父女)는 늘 반복하는 일상에 돌입했다.

리쿼스토어 개점(開店)시간인 오전 10시에 앞서 물품을 정리하고 금전등록기에 잔돈을 채우는 일이 그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술을 선반과 냉장고에 스탁하는 일은 주인장 몫이었다.

그리고 돈을 주고받는 캐셔(Cashier)카운터의 임무는 딸내미가 해냈다.

물론 레미 마틴 리쿼스토어에는 근무자들이 있었다.

매장을 관리하는 매니저 스티브 현과 금전등록기를 다루는 흑인 여성(대학 휴학중)글로리아 맥스웰 그리고 히스패닉 청년인 안드레스 누에즈 로드리게스 주니어가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종업원들은 항상 개점 직전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때문에 리쿼스토어를 자신의 생명 줄로 여기는 벤자민 홍은 사시사철(四時四-)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확히 아침 8시에 매장에 왔다.

 

서부(西部)의 명문 대학인 캘리포니아 대학(UCLA)을 졸업한 무남독녀 딸내미는 하릴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다 아빠를 따라 나섰다.

허우대가 멀쩡한 년이 집에서 밥만 축내는 꼴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며 엄마가 딸을 리쿼스토어로 내몬 것이다.

따라서 그레이스 홍은 자신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캐셔 그로리아 맥스웰을 보조하며 가게 일을 거들었다.

매장에 들어선 두 사람은 가져 온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눈 뒤 각자 할 일을 찾아 나섰다.

벤자민 홍은 어젯밤에 배달된 값비싼 하드리쿼를 스탁하기 위해 가게 뒷마당에 따로 설치한 창고로 갔다.

동시에 딸내미도 두 대의 금전등록기에 채울 소액권을 가져오기 위해 2층 사무실로 향했다.

영업 자금과 서류를 보관하는 대형 금고가 그곳에 있기 때문 였다.

 

한편 술 보관 창고에 붙박이로 걸려 있는 아날로그 컬러 TV에선 뉴스 앵커가 과잉(過剩)된 어조로 숨가쁜 멘트를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CNN 뉴스 특보였다.

배추 머리에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독수리의 부리처럼 콧잔등이 휜 매부리 코에 두터운 삼겹살을 위아래로 붙여놓은 듯한 형상의 입술을 지닌 백인 앵커가 현장과 연결된 취재 기자와 다급한 질문을 주고 받았다.

삼겹살 입술 앵커가 말했다.

이봐요, 게이브리얼 프랜시스 기자.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각 현재 법정에는 배심원단이 도착했습니까?”

프랜시스 기자가 답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아직은….현재 12명의 배심원단은 은닉된 모처에서 로드니 킹 폭행 사건 최종 평결을 위한 마지막 심의를 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배심원들의 평결 합의는 관례 절차상 이미 마무리 됐을 겁니다. 따라서 오늘 오후 3시에 슈프림 코트(Supreme Court:대법원)에서 펼쳐질 폭행 경찰 4명에 대한 평결은 지구촌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꼬냑과 보드카 등 각종의 양주들이 들어 있는 종이 박스에서 하드 리쿼를 꺼내고 있는 벤자민 홍은 방금 앵커와 기자가 주고 받은 리포트를 주의 깊게 여겼다.

연일 미주지역을 들썩이게 한 교통 경찰의 로드니 킹 폭행 사건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다.

사건이 촉발된 지난해 19913월부터 불기 시작한 흑인들의 인종분리 감정은 급기야 폭력사태로 번지며 공권력을 자극했다.

그리고 1년이 넘게 지리멸렬하게 지속된 폭력 경찰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 오늘에야 이른 것이다.

럭키 금성(LG)제품인 아날로그 컬러 TV에선 삼겹살 입술 앵커가 법조인을 비롯한 평론가 3명을 화면에 끌어들여 마지막 평결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구했다.

시선은 하드리쿼에 가 있었으나 여전히 TV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벤자민 홍은 느닷없이 몸놀림을 서둘렀다.

아무래도 느낌에 와 닿는 기분이 꺼림칙했다.

무언가가 뒷덜미를 낚아채는 것 같았다.

진열할 술들을 핸드 카트에 옮겨 담은 주인장은 매장으로 건너와 능숙한 손놀림으로 하드리쿼를 스탁해 나갔다.

 

캐셔 업무를 담당하는 딸내미는 아빠와는 달리 로드니 킹 사건에는 무관심이었다.

그녀가 이 사건에 관심을 표명한 것은 오직 동료 캐셔인 글로리아 맥스웰 때문 였다.

맥스웰이 언젠가 자신에게 ‘4명의 경찰이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내역을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언론의 호들갑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딸내미는 여전히 로드니 킹 사건을 가슴에 새기지는 않았다.

 

대형 금고에서 25센트 쿼터 동전과 1달러를 비롯한 5달러와 10달러 그리고 20달러 지폐를 차례로 꺼내 금전 등록기에 옮긴 그녀는 연필을 집어 잔돈 총액을 일일 입출금 장부에 기록했다.

그러고는 삼성 폴더 폰을 열고 아빠에게 전화를 넣었다.

스탁이 잘되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캐셔 데스크 뒷면 벽에 부착된 전자 시계는 어느 새 오전 950분을 가리키며 명멸(明滅)하고 있었다.

순간, 리쿼스토어의 출입문이 활짝 열리면서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왔다.

가게 일을 돕는 종업들의 아침 출근 신호였다.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박하사탕처럼 상쾌하고 호방(豪放)했다.

오후 2.

리쿼스토어 매장에 놓인 검정색 플라스틱 몸체의 컬러 TV에선 LA 시미벨리 지방법원의 외부가 클로즈업됐다.

각도를 잡은 것은 CNN의 취재용 커머셜 카메라였다.

법원은 LA 카운티에서 치안 상태가 매우 양호한 시미 벨리에 위치했다.

좀 더 디테일 하게 표기하면 벤추라 카운티 남동쪽이다.

레이건 전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은 백인 거주자가 무려 75%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화이트 타운이었다.

 

로드니 킹 폭행 사건을 이곳에서 최종 평결하는 이유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소요 사태를 피하기 위한 자구책에서 였다.

법원 주변은 이른 아침부터 몰려 든 취재 차량과 지역 주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한동안 법원 바깥 풍경만을 클로즈업 시켰던 카메라 앵글의 스포트라이트가 이번에는 법정 내부로 옮겨졌다.

방송용 비디오 카메라가 포착한 앵글에는 다음과 같은 형상이 담겨졌다.

 

방청객의 출입이 완전 차단된 가운데 재판정에는 판사와 배심원 12, 4명의 피고 경찰과 변호인단을 비롯한 검사와 재판을 돕는 서기 등이 자리했다.

알레스카 산() 침엽수를 건조해 만든 재목(材木)으로 인테리어를 꾸민 법정은 시종 팽팽한 긴장감만이 부유(浮遊)하고 있었다.

매우 비싸게 여겨지는 회전식 가죽 의자에 거만스레 등을 기댄 남성 판사는 6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백인이었다.

판사가 걸친 검은색  법복도 주단으로 만든 값비싼 옷이었다.

 

판사석을 중심으로 왼쪽에 배치한 배심원석엔 모두 12명의 남녀들이 착석했다.

두 줄로 나눠 자리를 잡은 배심원의 성향은 이랬다.

백인 10명 ▲히스패닉계 백인 1명 ▲그리고 아시안으로 조합 됐다.

▲기소 담당 검사는 흑인이었다.

4명의 피고 경찰을 변호하는 변호사들도 모두 백인 일색이었다.

경찰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피고 경찰의 명단은 이랬다.

로런스 파월 / 티모시 윈드 / 시어도어 브레세노 / 스테이시 쿤

오후 2 10

의자에 비스듬한 자세로 앉은 주심 판사가 피고 경찰 대표 변호사와 검사를 턱으로 가리키며 자신에게 다가올 것을 명했다.

판사석에 다가간 변호사와 검시는 노회(老獪)한 판사가 주문하는 말귀를 새겨들었다.

판사가 말했다.

이보시게. 신사 양반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잘 알터이지? , 말요. 오늘 아침에 마누라한테 엄청 시달렸거든. 그러니 내 신경 건드리지 말고 일사천리로 일을 마무리 합시다. 언더스탠?”

시큰둥한 표정의 판사가 말꼬리를 치켜 세우자 검사와 변호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양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오늘이 어떤 날인가!

세기적 쇼타임을 펼치는 날, 아니냐.

헌데, 일분 일초가 황금 같은 시간에 재판을 속전속결로 해치우자고….

빌어먹을 판사 영감탱이!

두 법조인이 판사 앞에서 인상을 쓰자 이를 알아차린 판사가 손사래와 함께 어여 자리로 돌아가라며 입술 말을 했다.

검사와 변호사가 각자 자신의 자리에 앉자 판사가 배심원단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본 법정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이 사건을 최종 평결하는 막중한 장소올시다. 따라서 검사와 변호인단은 주어진 시간 안에 견해를 피력하시오. 또 한 배심원단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마시고 세상이 납득할 수 있는 최종 평결을 내려주시면 고맙겠소.”

여기까지 말한 판사는 잠시 말문을 닫고 법정 서기가 건네 준 크리스탈 유리잔을 집어 생수로 목을 축였다.

그러고는 마이크로 폰에 입술을 바짝 들이밀고 덧붙였다.

그럼 지금부터 검사 측과 변호인단의 변론을 들어봅시다.”

 

오후 210분에 속개(續開)된 재판에서 검사와 변호인단은 견원지간(犬猿之間)처럼 목과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시시비비를 따졌다.

한치의 양보나 물러섬도 없었다.

두 법조인이 침을 튀기며 핏대를 올릴 때마다 배심원들도 긴장한 눈초리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평결은 이미 나 있는 상태였다.

이 날 피고 경찰들의 운명을 가를 히든 카드는 배심원을 대표하는 단장의 손에 이미 쥐어져 있었다.

따라서 배심원들은 검사와 변호인의 공방(攻防)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 어느 덧 오후 3시 15분이었다.

변호사의 호소력 짙은 변론을 끝으로 모든 재판 절차가 마무리 됐다.

남은 것은 배심원단의 최종 평결이었다.

법정 안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만이 휘돌아 칠 뿐이었다.

이처럼 호흡마저 곤란하게 했던 침묵은 머지 않아 깨졌다.

 

허리를 굽혀 마이크로 폰에 입을 가져간 판사가 배심원단을 향해 주문을 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지난 19913월에 시작된 순찰 경찰 4명에 의한 로드니 킹 폭행 사건 공판은 마무리됐소. 따라서 이 사건을 배당 받아 진행해 온 본인도 판결 결과와 관련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어 매우 기쁘오. 그럼 지금부터 배심원 여러분의 최종 평결을 들어봅시다.

 

낫 길티!(Not Guilty:무죄)”

배심원을 대표하는 리더가 자리에서 선 자세로 외친 천둥과 같은 두 음절이었다.

배심원들이 7일간의 장고(長考)끝에 최종 합의한 하일라이트였던 것이다.

1분 뒤

레미 마틴 리쿼스토어의 아날로그 컬러 TV에서도 낫 길티가 전송됐다.

삼겹살 입술 앵커가 호들갑을 떨며 방금 배심원 단이 폭력 경찰 4명에게 무죄를 평결했다는 타전(打電)을 속보로 알렸다.

순간, 금성 컬러TV에 시선을 집중했던 흑인 여성 글로리아 맥스웰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오마이 갓!’을 외쳤다.

특히 글로리아 맥스웰은 그 누구보다 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말도 안되는 평결이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술 스탁을 끝낸 후 휴식을 취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벤자민 홍도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었다.

가공할 정도의 폭력을 휘두른 폭력 경찰들이 무죄라니….CNN 속보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그는 착잡한 심경이었다.

웬지 모를 쓰나미가 밀려올 것만 같은 예감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민 생활 짠 밥 30년인 그가 세태(世態)의 흐름을 그 누구보다 앞서 간파할 줄 알았다.

벤자민 홍의 머리 속에 불현듯 사우스 센트럴이 오버랩 됐다.

사우스 센트럴

희비애환(喜悲哀歡)이 교차했던 곳.

흑인들이 대거 거주하는 천사의 도시 속 게토(Ghetto:할렘가).

벤자민 홍은 이민 초기에 이곳에서 델리 가게를 운영하며 흑인들의 적나라 한 실생활을 목격하고 체감(體感)했다.

그곳은 마약과 폭력, 야바위가 횡행하는 곳이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가 불분명한 사생아를 서너 명씩 출산해 기르는 10대 미혼모들이 넘쳐나는 지역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천국과 지옥을 말하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헌데, 지옥이 관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사우스 센트럴 게토가 지옥이었다.

이권을 빙자한 총기 사건으로 사람의 존엄(尊嚴)이 개보다 못하게 취급되는 이 곳은 공권력도 혀를 내두르는 치외법권(治外法權)지역 같은 장소였다.

이처럼 살벌하고 을씨년스런 할렘지역에서 벤자민 홍은 겁도 없이 장사를 했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 강아지처럼 방탄 유리창 밑에 샷건과 글록 자동 권총을 숨겨 놓고 델리가게를 일구었다.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는 행운도 따르기 마련이다.

타고난 장사꾼 기질이 몸에 흐르는 그는 전임 코리안에게 파격적인 가격(매우 저렴한)으로 델리가게를 인수한 뒤 흑인고객들을 포섭해(?)나갔다.

그는 흑인들이 손에 쥐어진 돈은 모두 써버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다혈질 DNA인 이들의 심리를 파악한 벤자민 홍은 같은 상품을 이웃 가게들 보다 저렴하게 판매함으로써 순식간에 단골을 확보했다.

흑인들에게 까탈스러운 인물로 찍힌 전임자(코리안)에 비해 벤자민 홍은 전혀 다른 후한 인몰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돈이 없어 다음에 갚겠다며 외상을 요구하는 미혼모들에게 잊지 말고 갚으라는 조건을 걸고 선뜻 물건을 내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내준 물건 외상을 뜯긴 것도 부지기수 였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박리다매(薄利多賣)를 통해 뜯긴 돈을 얼마던지 만회할 수 있었기 때문 였다.

흑인 커뮤니티에서 인심 좋기로 소문을 탄 그는 홍 밥(아저씨)이미지로 각인되며 날이면 날마다 문정성시를 이뤘다.

그리고 마침내 넘쳐나는 수입금 케시를 부대 자루에 발로 밟아 담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축한 현찰은 창고 바닥에 설치한 비밀스런 장소에 감췄다.

벤자민 홍은 사우스 센트럴에서 델리 가게를 오픈 한지 만 5년 만에 당시로선 엄청난 거액인 헬프 밀리언(50만 달러)을 순수익으로 벌어들였다.

그것도 현찰로.

 

이같은 부의 축적은 연방정부에서 흑인들에게 건네는 푸드 스템프를 현금처럼 다뤄 취해진 이득의 결과였다.

이를테면, 다급한 급전(急錢)이 필요한 이들에게 푸드 스탬프를 건네받고 얼마 정도의 임의 수수료를 공제한 후 캐시를 손에 쥐어주는 수법을 뜻한다.

재미있는 현상은 현찰을 손에 쥔 대부분의 흑인들은 가게의 문지방을 나서기 전 돌아서서 현찰을 디밀고 자신이 원하는 물품을 즉석 구매한다는 사실이다.

이래저래 즐거운 사람은 주인장 뿐이었다

 

한편 벤자민 홍은 5년여에 걸쳐 마법의 상자 역할을 해 준 델리 가게를 느닷없이 처분했다.

두 가지 이유가 따랐다.

첫째는, 윌셔가 인근에 목이 좋은 리쿼스토어가 매매로 나왔다는 것과 그 다음은 아내의 집요한 델리가게 정리 요구 때문 였다.

하늘나라 교회 집사인 아내는 흑인들을 통해 모은 거액 때문에 마음 한 켠으론 항상 죄스러움을 느꼈다.

흑인들이 우리 가족을 부유하게 만든 원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이들의 비정상적인 돈거래 루트에서 기인한 결과가 아니던가!

아무리 직업이 미천하다 해도 생활기반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이상 사우스 센트럴에서 발을 빼야 한다.

 

그녀는 때때로 새벽 기도회에 나가 신에게 고백했다.

자신의 길을 인도해 달라….

 

그녀는 서방에게 말했다.

그레이스 아빠. 우리가 지닌 이 돈으로도 먹고 살기에 충분해요. 웬지 날이 가면 갈 수록 예수님에게 죄를 짓는다는 기분이 드는군요. 우리는 이웃들(흑인)을 통해 풍족한 삶을 보장 받았지만 우린 그들에게 결코 해준 것이 없어요.때문에 이곳에서 더 이상 비지니스를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보아 둔 리쿼스토어로 진로를 바꿔요.”

물론 술 가게의 매매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쿼스토어가 위치한 지리적 조건과 비지니스의 매력이 벤자민 홍을 부추겼다.

그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아내의 말을 수용키로 했다.

온갖 애환이 서린 델리 가게를 처분하면서 부대 자루에 꾹꾹 밟아 쟁긴 현찰로 리쿼스토어 매매를 성사 시켰다.

벤자민 홍이 사우스 센트럴을 뜬다는 소문이 나돌자 지역주민 흑인들은 매우 섭섭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막상 가게를 떠나는 당일이 되자 그의 수많은 흑인 고객들이 몰려와 위로 파티를 성대하게 치뤘다.

이들 흑인 가운데는 벤자민 홍이 건넨 장학금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여성도 두 명이나 섞여 있었다.

이들은 고별을 고하는 벤자민 홍 가족들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렇듯 벤자민 홍은 이곳 사우스 센트럴 게토에서 돈도 벌고 인심도 후하게 쌓았다.

모르긴 해도 흑인들이 동양인에게 진정한 우정을 보인 예는 벤자민 홍이 유일무이(唯一無二) 할 것이다.  

 

한편 새로이 구입한 리쿼스토어의 실내장식은 딸내미의 조언을 따라새롭게 꾸몄다.

고급 술꾼들의 취향에 걸맞는 그런 시설이었다.

리쿼스토어의 간판은 꼬냑 이름인 레미 마틴으로 정했다.

고급 술 종류의 이름이었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오픈한 리쿼스토어 레미 마틴도 순풍에 밀리는 돛단배처럼 문전성시를 이뤘다.

술 가게를 통해서도 대박을 친 벤자민 홍은 부촌(富村)인 베벌리 힐스에 대저택을 구입해 지금껏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잠시 상념(想念)에 젖었던 벤자민 홍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정신을 되돌린 뒤 다시 TV 속보에 집중했다.

오후 4

한편 시빅 센터에 위치한 로스 엔젤레스 시티 카운실(시청)에 요란한 전화 벨소리가 진동했다.

시장 비서실 데스크에 놓인 버튼식 갈색 전화였다.

데스크에 앉은 여비서는 대략 50대 중반으로 추정됐다.

금발이 회색으로 변한 머리에 목덜미와 손목 주변이 주름진 피부를 드러낸 여비서는 전화기 몸통에서 빨간 불을 깜박이며 벨 소리가 경끼를 일으키자 하던 일을 멈추고 송수화기를 낚아챘다.

여비서의 억양에서 미 남부지역 사투리가 묻어났다.

시장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송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가 말했다.

남자였다.

허스키 한 목소리였고 화급한 투였다.

“LAPD 살인계 소속 스티브 유 형삽니다. 지금 시장님 계십니까? 당장 바꿔 주세요.”

여비서가 은근한 목소리로 답했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디텍티브(형사)께서 매우 다급한 것 같네요. 하지만 일에는 순서라는게 있잖아요. 지금 시장님은 자신을 지지하는 후원자들과 담소(談笑)를 나누고 계십니다. 하여, 저에게 용무를 말씀해주세요. 제가 메모로 전해드릴께요.”

이때였다.

빌어먹을!”하며 상대가 발끈했다.

여비서도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상대가 곧바로 덧붙였다.

이보쇼. 여비서 나리. 지금 말요 화급을 다투는 일이 터졌다 이 말입니다. 댁도 아시겠지만, 조금 전 3시에 확정된 배심원들의 낫 길티로 인해 흑인들이 발칵 뒤집어졌다고요. 지금 흑인 밀집지역인 사우스 센트럴에선 흉기로 무장한 수 천명의 니그로(흑인)들이 북상하고 있소. 앞으로 한 시간 후면 시청사는 물론 인근 코리아 타운과 백인 부자 동네인 베벌리 힐스도 덮칠거요. 여비서 양. 내 말 듣고 있습니까? 뜻을 제대로 이해는 하는거요?”

비록 고압적이긴 했으나 코리안 출신 디텍티브에 일목요연한 나열에 당황한 여비서는 상대에게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리라는 주문을 한 뒤 발빠르게 시장업무실로 들어섰다.

오후 5   

사우스 센트럴 흑인 집단 거주 지역  

오전부터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TV 앞에 집결한 흑인들은 오후 3시에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낫 길티평결이 떨어지자 저마다 머리를 움켜쥐고 괴성을 지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백인들의 빌어먹을 농간이라는 것이었다.

망연자실한 상실감에 젖은 흑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순식간에 그룹을 형성했다.

이들 그룹 가운데는 몰인정하기로 소문난 흑인 갱 조직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검은 안식일<헤비메탈 그룹 블랙 사바스와 동명>)’의 두목인 로버트 클레이도 끼여 있었다.

무슬림 신자인 그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뒤 하버드와 예일대에서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한 특이한 경력의 인물이었다.

이같은 우아한 백그라운드에도 불구하고 그가 뒷골목 갱단에 투신한 것은 다름아닌 인종 차별에 따른 분노 때문 였다.

천재성을 지닌 로버트 클레이는 현재 미 남부지방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백인우월주의 그룹 KKK(Ku Klux Klan:쿠 클럭스 클랜)의 은밀한 지원을 받으며 블랙 사바스의 두목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휘하에는 주로 20대 초반 흑인 청년과 간담을 서늘케 하는 두둑한 배짱의 여성들로 구성된 2백 여명의 갱들이 무조건 적 복종으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도 부하들이 대거 거주하는 아파트에 찾아가 조직원들과 함께 재판 추이를 TV이로 지켜 본 두목은 끝내 치를 떨며 부하들을 충동질 했다.

헤이, 브라더 & 시스터. 오늘이야 말로 우리가 덜 떨어진 백인 원숭이들과 백인 원숭이들의 똥구멍을 핥으며 아첨을 떠는 코리안들을 징벌할 그런 때다. 우리는 엉터리 판결로 범법자들을 구제한 백인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힘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더불어 우리 컬러(흑인 지칭)를 우습게 여기는 백인이 되고 싶은 코리안 원숭이들도 응징할 때다. 언더스탠!”

로버트 클레이가 부하들에게 명령한 사라져야 할 적은 백인들뿐만 아니라 코리안도 대상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코리안인가?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두순자 사건에서 비롯된 앙금이었다.

코리안 두순자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당시 15세 흑인 소녀인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치는 것으로 오해해 말다툼과 몸싸움을 벌이다 권총으로 소녀를 사망케 한 사건이 그것이다.

 

범행 후 재판에서 검사는 피의자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하지만 판사는 여러 정황을 고려해 400시간 사회봉사 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인해 이성을 잃은 흑인들이 코리안들을 무차별로 두들겨 패거나 때로는 총격을 가해 중상을 입히는 등 한흑간의 갈등이 심화 됐다.

이같은 과거사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로버트 클레이가 코리아 타운을 방임(放任)할리가 없었다.

표적과 목적이 선명하게 각인된 검은 안식일의 패거리들은 손에 자동 권총을 비롯한 단발식 샷건과 사시미 칼, 체인, 사제 다이

나마이, 야구방망이 등으로 무장한 채 두목을 따라 북상(北上)했다.

20명씩 조를 편성한 이들 무장 시위대들은 맨 정신이 아니었다.

코카인과 대마초 헤시시 크랙 등 마약으로 말초신경을 잔뜩 자극한 상태였다.

한마디로 이들에겐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이성이 마비된 이들 흑인들은 LA 다운타운을 연결하는 남쪽 방향 10번 프리웨이와 슬로슨 애비뉴 그리고 크렌쇼 블러바드를 벗어나 코리아타운을 향해 달려나갔다.

이들 뒤로는 캠든에서 튀쳐나온 흑인 무리들이 괴성을 지르며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흑인 시위대들은 처음에는 악다구니만 부리다 차츰 폭도로 변질됐다.

차량 행렬이 빈번한 대로를 점거한 폭도들은 지나가는 차량을 무작위로 세운 뒤 금품을 약탈하고 특히 백인과 동양인 운전자에게 혹독한 린치를 가했다.

뿐만 아니었다.

총과 살상무기로 무장한 흑인과 히스패닉계 갱들은 주변을 순식간에 무법천지로 만들며 시민들에게 공포를 조성했다.

코리아 타운에 도달한 이들은 무방비 상태였던 코리안 가게에 침입, 닦치는대로 탈취하고 두들겨 부셨다.

코리안들은 불시에 들이닥친 이들을 제어할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채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물론 뒤늦게 총기로 무장한 코리안들이 자경단을 결성해 흑인 폭도들과 대항 했지만 미쳐 날뛰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역부족이었다.

오후 630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시장과 주지사는 곧바로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주 방위군과 군 병력을 조속히 투입할 것을 관계당국에 요청한 것이다.

사태의 긴박감을 보고 받은 백악관의 수장 조지 H. W 부시 대통령도 업무 데스크인 '결단의 책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명령 했다.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육군 병력과(6.000명)연방 육군 제7보병사단, 그리고 제1 해병사단 병력(1.500명)등 폭도들을 제압할 진압군을 즉시 LA로 급파하시오."

백악관 웨스트 윙의 신속한 병력 파급 결제로 사단급 병력 13만 5000여 군이 천사의 도시로 진군해 당시 폭도들에게 밀리고 있던 경찰과 합동 진압에 나섰다. 

(계속)

이산해 / 추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