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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소설 / 칼럼 (5) 삿포로 殺人事件

2022.03.22 12:04

이산해 조회 수: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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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일본의 대표적인 유력지들(구글 사진)

 

21 

이튿날.

여명이 거주하는 팔판동 고택에서 함께한 법무법인 ‘백전백승’ 소속 변호인단은 배불뚝이가 요구한 일본 동행에 대해 숙고에 들어갔다.

서울 중앙지검 특수부 소속 검사 시절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차유람 변호사가 탁자에 흐트러진 자료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말했다.

“우리가 국내 재판을 고집한다 해도 저들(배불뚝이)은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인터폴 협약을 물고 늘어질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인터폴 본부인 프랑스 리옹에 구인 요청도 할 거고요.”

여 변호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또 다른 변호사가 끼어 들었다.

50대 초반 쯤으로 여겨지는 남자였다.

떡 벌어진 풍채가 조폭을 연상케 했다.

얼굴엔 개기름이 번들거렸다.

오른쪽 손목에는 금장 롤렉스 시계가 채워져 있었고 넥타이 핀에는 프리메이슨 마크가 음각돼 있었다.

롤렉스 시계가 맞은편에 자리한 여명을 바라보며 낮은 저음으로 말했다.

방금 차유람 변호사가 말씀 한대로 여명씨가 서울에서 재판을 받을 확률은 매우 희박합니다.물론 우리가 배째라로 버티면 저들도 어쩔 수는 없겠죠. 하지만 자칫 한일간의 정치문제로까지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겁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법은 우선 여명씨의 의중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동서남북 신문 연청음기자와 어깨를 맞댄 여명이 롤렉스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재판 장소가 일본이라 해도 관계치 않아요.단 조건이 있어요.”

순간 여섯 개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시선을 의식한 여명이 연청음 기자를 곁눈질했다.

그러자 연청음이 손바닥 크기만한 기자 수첩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여명이 삿포로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그의 요구 상황이 우선 관철돼야 할 것입니다.첫째:인신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둘째:일본 경찰이 제공한 안가에서 숙식할 셋째:공권력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할 네째:언론과의 접촉을 보장할 다섯째:배심원단은 무작위로 선정할 .이같은 요구를 일본측이 받아들인다면 여명은 개의치 않고 일본으로 건너갈 것입니다.

연청음 기자의 요구 상황을 귀 담은 두 변호사는 당혹스런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요구가 무리한 탓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요구의 타당성도 있다고 여겼다.

어차피 남의 나라에서 재판을 받을 바에는 기자가 지적한 내용을 요구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라고 뜻을 모았다.

여명의 요구조건을 변호사 수첩에 옮긴 차유람 변호사가 롤렉스 시계를 향해 말했다.

여명씨의 지적이 일리가 있어요.따라서 선배님 하고 저는 배불뚝이와 동행한 변호사에게 다섯가지요구 상황을 관철시켜야 해요.”

여 변호사가 단호한 어투로 말하자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롤렉스 시계도 체념하는 눈치를 보였다.

여명과 마주보고 앉은 두 변호사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여명이 재판에 대처할 다양한 방법들을 조력하고 앞으로 전개될 법적 문제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두 변호사의 법적 조력 안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귀 담은 여명은 전쟁터에 나서는 여 전사처럼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상기된 표정의 연청음 기자도 여명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 막히 속삭였다.

허니.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야.”

여명은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한편 차유람 변호사와 금장 롤렉스 시계의 요구조건을 경청한 배불뚝이와 동행변호사는 처음에는 발끈하며 펄쩍 뛰었다.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일본측 강경 대응에 여명측 변호사들은 그렇다면 국제법을 어겨서 라도 일봄 송환은 받아들일 수 없다‘ 고 버티자 끝내는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다.

배불뚝이 팀이 여명 측 변호 팀의 요구를 받아들인 배경은 이랬다.

여명측 변호 팀의 요구를 받은 배불뚝이가 난색을 표하며 손사래를 쳤으나 상대는 양보할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낭패한 배불뚝이는 결국 자신의 스마트 폰으로 삿포로 경찰서를 연결, 서울의 이같은 분위기를 타전했다.

배불뚝이와 동행한 법률고문 변호사의 자초지종을 청취한 삿포로 경찰서장과 홋카이도 법률지원팀(국제법 변호인 단)범인의 있을 수 없는 요구는 난감하지만, 그를 일본 법정에 세우기 위해서는 관례를 깨고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의견 일치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측이 저자세로 나오자 차유람 변호사와 롤렉스 시계는 한가지 더 단서를 달았다.

양측의 합의 내용을 문서화 하자는 것이었다.

한국측 변호인단의 이같은 요구에 대해 일본측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하나를 주니, 아홉 개를 더 달라는 것 아니냐!’

하지만 이와무라 미치토시를 살해한 범인을 당장 데려오라는 일본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양보를 거듭해야 했다.

배불뚝이와 일본인 변호사는 정식 공문에 양해각서를 교환하고 사인까지 휘갈겼다.

 

한일 양측 변호사들이 각기 사인을 받아내자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후배 형사가 탁자를 내리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빠가! 조센징.”

22

삿포로 안가는 독립 가옥이었다.

일본 에도시대의 건축양식과 현대 내부시설을 조합한 안가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주거시설이었다.

삿포로 경찰서 부속 시설인 안가에는 24시간 경비를 책임진 경비원들과 출퇴근 하는 하우스 키퍼가 근무했다.

뿐만 아니었다.

여명의 신변보호를 위해 삿포로 경찰 소속 여경 4명이 특별 경호를 담당했다.

배불뚝이의 안내로 안가에 여장을 푼 여명은 일본 여성들로 구성된 하우스 키퍼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으며 첫날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안가 시설 주변에 조성된 체육시설에서 가볍게 몸을 푼 여명은 자신과 서울에서 동행한 차유람 변호사와 롤렉스 시계를 접견했다.

접견 자리에는 한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한국계 일본인 3세 남성 변호사와 영어에 능통한 일본인 출신 여성 변호사가 합석했다.

한국계 일본인 3세 남성 변호사의 이름은 하라다 마사토(42세 한국명: 진인).여성 변호사는 35세의 이시가미 구니코였다.

이시가미 구니코 변호사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차유람 변호사와 영어로 말했다.

한국인 피의자 변호인단에 일본인인 이시가미 구니코가 합류한 이유는 그가 친한 파() 인데다 하라다 마사토의 아내였기 때문 였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하라다 마사토와 영국 브리튼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변호사로 변신한 이시가미 구니코는 홋카이도 법률지원 로펌허리케인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법률가들 이었다.

이들 부부 변호사가 여명 재판에 법률 조력 팀으로 나선 이유는 사건의 백그라운드가 매우 흥미롭고 한번도 경험치 못한 재판이 펼쳐지기 때문이었다.

특히 피의자의 범행이 명명백백 드러났음에도 불구속 재판이라는 이례적 상황도 호기심을 부추긴 것이다.

여명을 변호할 4명의 변호인단은 이 날 불구속 기소에 따른 영장 심사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고 오후에 있을 검사 측과의 사전 면담에 대비했다.

여명에 버금가는 미모인 차유람 변호사가 영어로 말했다.

“3일 후 공식적인 첫 재판이 시작될 거예요. 그에 앞서 삿포로 지검 소속 검사가 청구한 구속 영장에 대해 지방법원 영장 실시 판사가 불구속 기소 결정을 내렸어요. 따라서 여명씨는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아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내일 오전에는 법원청사에서 판사와 회동을 할 겁니다. 물론 검찰측에서도 합류 하고요. 판사는 홋카이도 순회 판사예요. 이름은 기타무라 쓰네오. 나이는 62.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 했고요.성향은 매우 보수적으로 알려졌어요. 마지막으로 배심원 단 문제인데, 배심원단은 홋카이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무작위로 선출했어요.”

차유람 변호사가 여기까지 언급 했을 때였다.

반듯한 자세로 상대의 말을 귀 기울이고 있던 이시가미 구니코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그 대목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일본어 액센트의 영어였다.

저희 허리케인 법률 팀이 법원으로부터 건네 받은 배심원은 모두 12명이예요. 좀 더 디테일 하게 말씀드리면 이래요. 배심원 단장은 남성 이고요.남자 7여자 5명으로 구성돼 있어요. 물론 명단은 비공개 고요. 이들 배심원들은 지방법원이 정한 특정 호텔에서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재판이 종료될 때까지 머물 것입니다.그리고 우리에게 적일 수 밖에 없는 검찰측 상대 검사들을 소개하죠.”

이시가미 구니코 변호사. 저에게도 설명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목소리는 다름아닌 여 변호사의 남편이자 팀원인 하라다 마사토 변호사였다.

그가 말했다.

역시 영어였다.

“검찰측에서는 2명의 검사가 출정합니다.우리가 접수한 이들의 백그라운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을 지녔습니다. 우선 수석 검사인 가타야마 다이스케는 홋카이도 지방검찰청 중앙수사부부장 검사로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입니다. 나이는 51. 그는 검찰청에서 무려 25년 동안 잔뼈가 굵은 공안 통으로 이제껏 단 한번의 실패도 맛보지 않은 전설적인 검사로 알려졌습니다.저도 법정에서 그와 서너 차례 공방을 펼친 경험이 있는데,빈틈이 전혀 없는 두뇌의 소유 잡니다.다음으론 가타야마 다이스케 검사를 보좌하는 검사입니다. 이름은 모리모토 신지. 나이는 38.와세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인물 이고요.사법고시 역시 수석으로 패스한 천잽니다.현재 삿포로 지방검찰청 형사 담당 검사로 재직하고 있고요. 예리한 식견과 추리가 뛰어난 인물로 알려집니다. 특히 그동안 미궁에 빠졌던 미 해결 살인사건들을 해결하는데 결정적 답을 이끌어 내 언론으로부터 일본의 셜록홈즈‘라는 칭호를 얻은 인물이기도 합니다.우리 변호 팀이 상대하기에 껄끄러운 검사들입니다.”

단 한번의 쉼표도 찍지 않고 여기까지 일사천리로 말한 하라다 마사토 변호사가 숨을 고르자 롤렉스 시계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유창한 영어였다.

“길고 짧은 것은 겨눠 봐야 아는 법.우리도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오. 제 옆에 계신 차유람 변호사로 말할 것 같으면 그동안 크고 작은 형사 소송 변론에서 무려 3백 여건을 승소로 이끌었소. 특히 지난 2019년 미 LA에서 펼친 한인 유학생 총기 살해사건을 무죄로 이끈 변론은 세기적 재판으로 기록되기도 했을 정도였소. 따라서 차 변호사는 베스트 중에 베스트 지.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특히 굵직굵직한 정치쟁점 소송에서 백전백승을 한 이력의 소유 자요. 안 그렇소? 차유람 변호사!”

롤렉스가 동의를 구하듯 여 변호사를 흘끔 곁눈질 했다.

여 변호사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롤렉스가 덧붙였다.

따라서 법정은 비록 일본에 위치해 있으나 지형적 불리함을 딛고 우리 팀이 완벽한 승소를 이끌어 낼 것이라 확신 하오.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소. 장담 하오.

이렇게 힘주어 말한 롤렉스 시계는 서울에서 준비해 온 소송관련 자료들을 어루만졌다.

 

한편 여명 곁에서 변호인단의 재판절차 계획을 귀 담은 연청음 기자는 변호인단의 양해를 구한 뒤 기사화 할 수 있는 대목을 추려 서울 본사로 기사를 송고 했다.

23

오전 10.

이시야마 124()452가 코노에 위치한 삿포로 지방 법원 형사 재판 제1부 법정 판사 실.

감색 정장에 붉은 빛이 감도는 넥타이를 두른 기타무라 쓰네오 판사가 판사 실로 들어선 검찰측과 변호인단을 맞이하며 자리를 권고했다.

법률 서적이 빼곡히 들어 찬 책장과 거대한 데스크가 실내를 차지하고 있는 판사 실에는 모두 12개의 가죽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판사가 가리키는 의자에 착석한 방문객들은 업무보조 요원들이 내 온 차를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객담은 서울에서 건너 온 변호 팀의 환대였다.

10여분 간 가벼운 환담이 오간 뒤 판사가 이내 정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내가 숙녀 신사 여러분을 이 자리에 뫼신 것은 통상적인 상견례 절차요. 전쟁에 돌입하기에앞서 상대 적장과 악수 정도는 나눠야 하지 않겠소. 따라서 심판인 내가 여러분을 소개하지요.”  

이렇게 말한 판사는 서로 마주보고 앉은 변호인 단과 검찰 측을 번갈아 바라보며 운을 뗐다.

이와무라 미치토시 케이스를 담당한 검찰 측 검사 분들부터 소개 하겠소.일본 검찰계의 스파이더맨으로 불리는 야마모토 히데오 수석 검사. 그리고 수석 검사를 보좌하실 아름다운 미녀 키시모노 카요코 검삽니다.

판사는 그러고는 변호인단을 향해 두 검사를 가리켰다.

판사가 스파이더 맨이라 칭한 야마모토 히데오는 형사 특수 통으로 법조계와 야쿠자 세계에서 매우 교활하고 잔인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현재 나이 45세인 그는 차기 일본검찰총장으로 유력시되고 있었다.

변호인단이 검사들에게 시선을 주며 목례를 했다.

하지만 두 검사는 딴청을 피우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판사가 덧붙였다.

이번에는 검찰측과 맞설 변호인 단을 소개 하겠소.”

판사는 검사들을 소개한 것처럼 4명의 변호사를 일일이 거명하며 이력을 밝혔다.

창과 방패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판사가 차유람 변호사와 롤렉스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어눌한 발음의 영어였다.

두분 변호사는 재판에 임하기에 앞서 우선 내 앞에서 선서를 해야 하오.옛말에 로마에서는 로마 법을 따라야 한다‘ 고 했소.따라서 외국인 변호사님들 역시 일본 법에 의거해 법칙을 준수 하겠다는 서약을 해야 하오. 내 말 뜻 아시겠지?”

물론이 예요.당연히 선서를 해야죠.”

차유람 변호사가 롤렉스를 곁눈질 하며 답했다.

롤렉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두 변호사가 판사 앞에 부동자세를 취했다.

순간 일본측 변호사와 검찰측 검사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증인 역할을 했다.

법복을 걸친 판사가 근엄한 표정으로 두 변호사를 향해 말했다.

“이와무라 미치토시 살해사건 피의자의 변호인단으로 합류한 대한민국 국적의 두 변호사는 재판에 임하기에 앞서 일본 법을 철저히 따를 것을 맹세합니까?”

두 변호사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판사가 덧붙였다.

그리고 피의자의 변론을 맡은 하라다 마사토 변호사와 동료 파트너는 서울에서 온 이들 두 변호사의 법정 보증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 저희 법률회사에서 두 변호사를 책임 보증합니다.”

 

서약 준수를 끝낸 판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차유람과 롤렉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이 시간부터 재판 종료 시까지 자신의 법정에서 변호사 활동 자격이 주어진다고 말했다.

 

서약 선서가 끝나자 판사가 티 테이블 정중앙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두 명의 검사와 4명의 남녀 변호인단도 좌우로 갈라져 자리했다.

모두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손을 깍지 낀 판사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와무라 미치토시 재판 케이스는 딱 7주일 시간을 드리겠소. 재판에 돌입하기 전 검찰측과 변호인단은 법정에서 다툴 쟁점 들을 단단히 예비 하시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배심원단의 평결은 늦어도 8일 안에는 나와야 하오.내 말 명심 하시오.”

판사가 다그치듯 묻자 검찰측과 변호인단은 서로를 곁눈질 하며 결의를 다졌다.

판사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야마모토 히데오 검사가 롤렉스를 노려 보며 짜증 섞인 어투를 쏟아 냈다. 일본인 특유의 어눌한 영어였다.

“검찰에 몸을 담은 이래 살인범을 경찰과 검찰 수사도 생략한 채 불구속 재판을 하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군요 참으로 해괴한 절찹니다. 그리고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서울에서 온 두 변호사가 하라다 마사토 변호사와 원 팀이 돼 피의자를 변호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미국에선 이같은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합니다만, 여긴 일본이오. 상급 기관인 법무성에서 한국측 요구에 따르라는 오더가 떨어져 그대로 할 수 밖에는 없겠으나 변호인 단은 단단히 각오를 하세요. 나는 여명이라는 여자 살인범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종신형에 처할 거요.”

팔짱을 낀 채 스파이더 맨의 겁박을 귀 담고 있던 차유람 변호사가 매끄러운 일본어로 말했다.

“역시 소문대로 검사님은 터프가이군요.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초장부터 거칠게 나오 시다니.저의 의뢰인은 어제 무려 15시간에 걸쳐 검찰 심문을 받았어요. 당시 야마모토 히데오 검사께서 진두지휘 하셨고요.검찰 조사에서 의뢰인은 범행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고, 한일간 사전 협의로 불구속 기소를 했죠. 따라서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의뢰인의 유 무죄는 이 곳 법정에서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두고 봅시다.내가 살인범을 기필코 영원히 삿포로 형무소에 가둘 것이오.”

“그건 당신 생각이고…..아무튼 행운을 빌겠소.”

롤렉스가 비아냥 투로 검사의 말을 비틀었다.

 

예상치 않은 창과 방패의 기 싸움이 판사 실의 분위기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이처럼 상견례 자리에서 양측이 삐걱거리자 노회(老獪)한 판사가 혀를 차며 중재에 나섰다.

“교양이 넘치는 숙녀 신사 여러분. 벌써부터 왜들 이러시나….말씨름은 아껴 두었다가 법정에서 하시구려.”

떨떠름한 표정의 판사가 좌중을 훑어보며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서울에서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내가 근사한 곳에서 점심을 대접 하겠소.”

24

화강암으로 외장을 장식한 삿포로 지방 법원 청사 앞은 이른 아침부터 북새통이었다.

다름 아닌 세간의 이목을 집중 시킨 이와무라 미치토시 살인사건 첫 재판이 열리기 때문 였다.

삿포로 지방법원‘ 이라고 새긴 양각 형 동판이 부착된 입구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메이저 언론을 비롯, 대한민국과 미국 등 각국의 언론사들이 진을 치고 취재 경쟁에 돌입했다.

그런가 하면 5층 규모의 법원 청사 주변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좌익 단체 ‘신풍(가미카제)’욱일승천’ 멤버 수백명이 진을 치고 끊임없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들 좌파들은 일본의 영웅인 이와무라 미치토시를 살해한 조센징 출신 여명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며 변호인단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일본인들의 적개심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튜브와 SNS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일본 출신 인플루언서들도 부화뇌동 하며 험한(險韓)발언을 마구 쏟아냈다.

팩트는 살인범 여명이 경찰과 검찰 조사를 거의 생략하고 곧바로 재판에 회부된 것은 일본 형법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재판을 중단 하고 먼저 공권력의 수사부터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 법무성은 이와무라 미치토시 케이스와 관련, 대한민국과 불구속 재판이라는 사전 조율을 거쳤기 때문에 합의를 깰 수가 없다는 원칙을 드러냈다.

따라서 비록 상식을 초월한 이례적인 재판이라고 할지라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이처럼 재판을 목전에 두고 일본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삿포로 경찰은 예상치 않은 불상사에 대비, 상당수 경찰력을 청사 주변에 배치한 뒤 삼엄한 경비 태세에 들어갔다.

 

오전 9

검은색 링컨 타운 카 한대가 경찰승합차의 호위를 받으며 법원 청사 후문으로 다가섰다.

경찰승합차에는 무장 한 정복 경찰 6명이 타고 있었다.

후문을 경비하는 법원 경비원이 초소에서 걸어 나와 경찰 승합차 운전자와 짧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러고는 경비가 뒷걸음질 치며 초소를 향해 손짓을 했다.

곧바로 자동으로 작동하는 바리케이트가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경찰승합차와 뒤꽁무니에 달라붙은 링컨 타운 카 가 청사 안으로 들어섰다.

두 대의 차량이 주차구역 내네 정차하자 무장 경찰 6명이 재빠르게 차에서 내려 법원 후문 입구로 다가가 에워쌌다.

뒤이어 링컨 타운 카 에서 검은색 정장을 걸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삭의 임산부처럼 배가 튀어나온 인물이었다.

다름아닌 삿포로 경찰서 강력계 고참 형사인 배불뚝이였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배불뚝이의 파트너인 후배 형사였다.

두 형사가 차에서 내리자 이번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정색 바지에 검정색 캐주얼 정장 상의를 걸친 여성이었다.

정장에 흰색 와이셔츠를 받쳐입은 그는 화장기가 전혀 없는 쌩 얼에 머리는 뒤로 틀어 핀으로 고정시켰다.

피의자 신분이었으나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얼굴에서도 초조함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여명이 차에서 내리자 배불뚝이와 후배 형사가 앞뒤로 그녀를 호위하며 걸었다.

여명이 두 형사와 함께 자동 개폐식 후문 입구로 들어서자 때마침 진을 치고 있던 언론사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카메라 기자들은 섬광을 번쩍이며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 댔고 취재 기자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질문을 쏟아냈다.

법원 로비가 갑자기 북새통으로 돌변하자 화들짝 놀란 법원 경비들이 기자들을 제지하며 포토라인을 준수해달라고 읍소했다.

기자단을 대표해서 누군가가 여명에게 주문했다.

“포즈를 부탁합니다.”

어눌한 일본식 영어였다.

여명은 관례에 따라 포토라인에서 사진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취재 기자들의 다양한 질문에는 단아한 표정을 지으며 노코멘트로 대응했다.

5분여가 지나자 배불뚝이가 다가와 기자들을 제지하고 여명을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배불뚝이가 앞서 걸어간 곳은 법정 안에 위치한 피의자 대기실이었다.

여명을 이곳까지 안내한 배불뚝이와 후배 형사는 대기실에 자리한 인물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한 뒤 곧바로 등을 보이고 사라졌다.

 

피의자 대기실은 정갈하고 아늑했다.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런 일반 피의자 대기실과는 달리 이곳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이유는 고위급 정치범 또는 사회 저명인 범법자들을 위한 특별 시설 이었기 때문 였다.   

여명이 대기실에 들어서자 모든 시선이 반색했다.

차유람 변호사를 비롯한 롤렉스와 하라다 마사토 변호사 그리고 파트너 여자 변호사인 이시가미 구미코였다.

여명은 차유람 변호사가 건넨 스타벅스를 마시며 곧 전개될 재판에 임했다.

자신의 변호를 이끌 선임 변호사인 하라다 마사토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면은 충분히 취했나요?”

여명이 눈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 예요.”

다행입니다.어제 안가에서 저희들과 숙지한 재판 과정을 그대로 따라하시면 됩니다.재판 첫 날인 오늘은 검찰측에서 파죽지세로 물고 늘어질 겁니다. 그렇다 해도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이 재판은 단언컨 데 배심원 단으로부터 낫 길티(무죄)‘를 받아 낼 것입니다. 그리 아시고 저희들과 함께 거친 항해에 나섭시다.”

선임 변호사가 완벽한 모국어(한국어)로 여명을 안심시켰다.

차유람 변호사 곁에서 스타벅스를 홀짝 거리던 롤렉스가 선임 변호사에게 말했다.

판사에게 제출한 우리의 소명 자료는 부족한 점은 없소?”

이번에는 이시가미 구미코 변호사가 말했다.

어눌 하긴 했으나 완벽한 한국어였다.

“제가 밤늦도록 검토한 여명씨의 소명 자료는 완벽한 논문 같았습니다. 때문에 판사도 자료를 훑어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습니다.물론 그 양반은 어디까지나 중립을 지키며 자신의 법정이 빛나 줄 것을 기대 하겠지요. 아무튼 이 재판은 여론 전으로 몰아가야 절대 승산이 있습니다.”

차유람 변호사가 여 변호사를 곁눈질 하며 말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 예요.일본 검찰은 이 재판을 철저하게 법리적으로 끌고 갈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에겐 이득이 없어요.따라서 우리 팀은 시종일관 여론 전을 펴며 배심원단의 심금을 자극해야 할 것입니다.”

롤렉스가 스타벅스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우리가 승리하려면 우선 지구별의 SNS를 최대한 이용해야 할거요. 특히 일본 강점기 때 피해를 입은 중국을 비롯한 인도네시아 등지의 여론을 최대한 자극해야겠지. 또 한 일본인 가운데 양심적인 인플루언서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소. 이들의 감성을 두드려 여론몰이를 병행하는 거요.”

그 역시 하나의 전술 방법입니다.”

선임 변호사 하라다 마사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들 변호사들은 피의자 대기실에서 대략 1시간에 걸쳐 법정 전투에 관해 의견을 개진했다.

그리고 다방면으로 확보한 변론 관련 자료들을 거듭 점검한 뒤 법정 서기의 안내를 받고 여명과 함께 변호사 석으로 향했다.

25

여명의 첫 재판이 열리는 당일 오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종합 일간지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비롯한 조중동(朝中東)은 조간 신문을 통해 여명 재판을 대서특필했다.

삿포로 발 기명 기사로 편집된 여명 재판 특집 기사는 대체로 비슷한 논조로 전개됐다.

피의자 신분인 여명이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 재판에 임한다는 전제하에 일본 법조계는 물론 미국과 대한민국에서도 여명이 자칫 종신형에 처할 수 있다는 조심스런 관망을 내비쳤다.

이유는 여명의 살해사건은 우발적인 아닌 고도로 계획된 죄질이 나쁜 범죄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꼽았다. 

삿포로에 특파된 연청음 기자도 현지의 이같은 분위기를 전하며 비관적인 전망을 조심스레 내놨다.

그는 특집 기사를 통해 이렇게 진단했다.

‘여명의 운명은 유 무죄의 최종 판단을 내릴 배심원 단에게 달렸다. 남성 7, 여성 5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의 성향은 대체로 급진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들에게 여명의 운명을 건다는 것은 어쩌면 뱀과 어린아이가 함께하는 무모한 도전이라 하겠다.뿐만 아니다. 여명 재판과 관련, 현재 일본내 여론은 험한(險韓)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인들은 검찰을 향해 좌고우면 하지 말고 살인범에게 무조건 사형을 구형 하라는 주문이다. 극성스런 여론은 배심원단을 향해서도 노골적으로 사형을 요구하고 있다.이처럼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있는 여명 사형 구호로 인해 그에게 재판이 매우 불리해 질 수도 있다는 진단이 속출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힘겨운 전투가 시작됐다. 이제 여명의 앞날은 변호인단의 지략에 달렸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종합 정론 지 조중동 역시 여명 재판을 비관적 시각에서 다뤘다.

재판 장소가 일본이라는 특수한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다 일본인 특유의 반한(反韓) 정서가 짙게 깔려 있어 이번 재판은 난항이 예상된다고 진단했다.

이어진 기사에서 여명의 살인 행위의 이유가 정당했다 해도, 명백한 총기 살인으로 드러난 이상 변호인단이 그를 무죄로 이끌어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비관론을 폈다. 덧붙여 변호인단이 사즉생의 자세로 변론을 펼쳐 여명의 죄를 최대한 가볍게 이끌어 내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희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무라 미치토시 살해사건을 취재중인 CNN도 삿포로 리포터를 통해 비관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CNN은 삿포로 경찰서 강력계 고참 형사인 배불뚝이의 인터뷰를 인용 이번 재판을 통해 피의자인 여명은 사형은 피할지 몰라도 결코 종신형은 면하지 못할 것 ‘이라는 코멘트를 전했다.

피의자의 죄질이 극명하고 또한 포악 하다는 점을 꼽은 것이다.

 

이처럼 국내외 여론이 비관적으로 비춰지자 대한민국 내 각종 여론도 반일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며 험악한 분위기로 치닫았다.

특히 페이스 북과 유튜브 등 SNS 커뮤니티에는 일본인을 폄훼하는 쪽바X’ 또는 섬나라 원숭이운운하는 댓글이 폭주하는 등 반일 감정이 극에 달했다.

26

150여 명을 수용하는 법정은 입추의 여지도 없이 방청인들로 가득 찼다.

단 한석의 빈자리도 없었다.

법정 중앙 한 켠에 자리한 판사 석을 축으로 검사석과 변호인단 그리고 배심원들이 각기 위치를 점한 법정은 매우 어두운 분위기 였다.

이유는 인테리어 때문이었다.

떡갈나무로 장식한 벽면은 온통 짙은 밤색으로 덧 씌어 우중 충 했다.

그런가 하면 실내를 밝히는 조명의 조도도 낮아 분위기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실내를 덥히는 히터의 소음도 귀를 거슬리게 할 정도로 윙윙거렸다.

그럼에도 방청인들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앞으로 전개되는 재판에 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편 법정 출입구 주변에 나열해 선 취재 기자들은 손에 쥔 취재 수첩에 법정 분위기를 꼼꼼히 스케치 하고 있었다.

카메라 기자들 역시 판사 석 앞에 쭈그리고 앉아 검사석과 변호인 석, 배심원단, 그리고 방청석을 다각도로 렌즈에 담았다.

수많은 언론과 방청인들이 쏟아내는 소음이 법정을 휘돌아 치고 있을 즈음 어느덧 시간이 950분을 가리켰다.

검정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법정 서기가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며 판사 석 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부동자세로 방청석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이와무라 미치토시 케이스를 이끄실 기타무라 쓰네오 주심 판사님께서 입정하십니다. 방청인 여러분들은 모두 일어서서 예를 갖춰주십시오.”

법정 서기의 안내가 있자 검은색 법복을 걸친 주심 판사가 양팔을 휘적거리며 판사 석으로 다가왔다.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판사가 거만한 몸짓으로 회전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자 모든 이들이 비로소 자리에 착석 했다.

검정색 가죽회전의자에 상체를 파묻은 판사가 검찰측 수석 검사인 야마모토 히데오와 변호인단을 대표하는 하라다 마사토를 손짓으로 불렀다.

(검찰측)과 방패(변호인 단)가 판사 석으로 다가가자 판사가 상체를 수그리고 두 남자를 번갈아 노려 보았다.

판사가 말했다.

“잰틀맨! 오늘은 삿포로 법정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첫 재판이 펼쳐지는 날이 오.따라서 두 신사 양반은 신중하고도 물 흐르듯 공방을 펼쳐야 하오.아시다시피 지금 전세계 언론들이 포커스를 나의 법정에 들이대고 있소. 때문에 당신들이 쇼 타임을 어떻게 펼치느냐 에 따라 나와 당신들의 미래도 좌우 되오.내 말 뜻 아시겠 소?”

여기까지 말한 판사가 이번에는 배심원 석을 곁눈질 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건 사적인 문제이긴 한데…… 빌어먹을! , 말요. 아침에 마누라한테 엄청 시달렸 소. 오늘이 우리 결혼 기념일인데 선물은 고사하고 꽃 한송이 건네지 않았다며 앙탈을 부렸 소. 마누라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직도 다리가 떨린다니까. 따라서 지금 내 컨디션은 저기압이요!”

“…….”

그러니 두 신사 양반은 나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물 흐르듯 매끄럽게 공방을 이어가야 하오. 말인즉 슨 쓸데없는 헛발질은 삼가해 달라는 주문 이오. 언더스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판사가 창과 방패를 향해 우격다짐 하듯 몰아 붙이자 두 사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창과 방패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판사가 덧붙였다.

“왜들 똥 씹은 표정들이신가! 내 말에 무슨 하자라도 있소?”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창과 방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기양양해 진 판사는 군더더기 지침을 몇 마디 덧붙인 뒤 턱으로 돌아가라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이 등을 보이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판사 석 주변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카메라 기자들이 벌떡 일어나 섬광을 번뜩이며 플래시를 터뜨렸다.

 

요란스런 언론 취재가 끝나자 판사가 12명이 앉은 배심원 석을 향해 말했다.

이제 검찰과 변호인의 법정 다툼이 시작 되오. 배심원은 양측 공방에 대해 심사숙고를 해야 하오. 두 귀를 고추 세우고 최종 평결에 대비하세요.”

감색 점퍼 차림의 50대 중반으로 여겨지는 남성 배심원 단장이 판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 배심원들은 한점의 부끄럼이 없는 공정한 평결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판사가 법정을 훑어보며 말했다.

나의 법정을 찾아주신 삿포로 주민 여러분. 그리고 이 재판을 이끌어갈 검찰측과 변호인단, 그리고 배심원들….잘 아시다시피 본인이 이끌 이와무라 미치토시 살인사건 재판은 세기의 재판으로 지구별의 이목을 집중 시키고 있소. 왜냐! 피의자가 한국출신 외국인 데다 일본 사법 사상 최초로 적법한 공권력의 수사가 생략된 재판이기 때문이오.일본 내 여론이 들끓고 있는 이유도 이같은 배경의 결과이고…..따라서 막중한 의무가 부여된 본인의 사명이 두려움 마저 느끼게 하오.검찰측과 변호인단은 이점을 헤아려 7주일 안에 재판이 종결되도록 협조해 주시오. 또 한 배심원 역시 사심이 개입되지 않은 냉철한 판단으로 8일내에 평결이 무리없이 종지부를 찍을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해줄 것을 완곡히 부탁 하오.”

두 손을 깍지 낀 판사가 이번에는 방청석에 눈길을 주며 덧붙였다.

“방청인 여러분에게도 당부를 하겠소. 재판 도중 소란을 피우거나 법정 모독을 꾀하는 방청인은 곧바로 퇴장은 물론 자칫 구속까지 당할 수 있소. 이 점 단단히 살피길 바라오.”

근엄한 목소리로 법정 준칙을 피력한 판사가 진행 봉을 3번 두드린 뒤 재판의 서막을 알렸다.

동시에 카메라 기자들도 기다렸다는 듯 정신없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한참 후 플래시의 섬광이 가라앉자 판사가 검찰측을 바라보며 말했다.

“검찰 측은 공방을 펴시오.”

매부리 코에 주걱턱인 야마모토 히데오 수석검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걱턱이 변호인 단 석에 자리한 피고인(여명)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재판장님! 피고인을 증언 석에 앉힐 것을 요구합니다.”

순간 하라다 마사토와 이시가미 구니코 변호사가 판사 석을 바라보았다.

판사가 말했다.

받아들이겠소.”

판사가 수긍하자 법정 서기가 여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이끌고 판사 석 좌편에 마련된 증언 석에 앉혔다.

여명이 증언 석에 앉자 판사가 그녀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일본어였다.

피고인은 나의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서 하시겠소?”

여명이 유창한 일본어로 답했다.

본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만을 증언할 것임을 이 법정에서 선언합니다.”

여명이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당당한 자세로 말하자 판사가 검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증언 석에 다가간 주걱턱이 말했다.

우선 피고인의 백그라운드를 밝히시오.”

검사가 여명에게 이같은 요구를 하자 하라다 마사토 변호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판사를 향해 말했다.

존경하는 판사 님. 저의 의뢰인에 대한 이력은 본 변호사가 밝히는 것이 합당하다는 견해입니다.”

판사가 말했다.

무얼 그리 번거롭게 하시는가. 검찰측의 요구를 따르세요.”

판사의 중재가 못마땅했던 변호사가 말꼬리를 이으려 하자 이를 눈치 챈 판사가 손바닥을 아래로 누르며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변호사도 도리가 없음을 눈치채고 자리에 앉았다.

검사가 여명에게 다그쳤다.

어여 말하시오.”

여명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대한민국 서울출신 이예요. 10여 년간 강력계 형사로 근무했고요. 10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고 송라이터예요.덧붙여 프로 여자 당구 선수 고요.”

피고인이 자신의 이력을 밝히자 방청석에서 일제히 놀랍다는 반응이 일었다.

 

피고의 백그라운드를 귀 담고 있던 배심원 석에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어마무시한 살인범이 강력계 형사 출신인데다 유명 시인이고 현재 일본에서열풍인 한류 음악의 노랫말을 지었 다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법정이 술렁이자 판사가 재빨리 진행 봉을 집어 들고 신경질적으로 내리쳤다.

못마땅한 표정의 판사가 진행 봉을 손에 움켜쥔 채 말했다.

방청인 여러분. 원활한 재판을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협조가 절실 하오.따라서 방청석은 시종일관 침묵하시고 오로지 듣기만 해주시오.방청인들이 만약 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무조건 퇴장 조치를 하겠소!”

판사가 짜증을 부리자 방청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 모드로 가라앉았다.

판사가 검사를 향해 말했다.

계속 하시오.”

주걱턱이 여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검찰은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할 거요.그리 알고 자리로 돌아가시오.’

검사가 이렇게 겁박 하자 변호사 석에서 이시가미 구니코 변호사가 판사를 향해 소리쳤다.

존경하는 판사님! 지금 검사가 월권행위를 했습니다. 의뢰인은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아직은 피고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검찰측이 벌써부터 사형 운운하며 예단하고 있습니다. 검찰측의 이같은 겁 박이 자칫 배심원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배심원 단은 방금 검사가 우격다짐한 표현을 배제해 주실 것을 정중히 요청 드립니다.”

여 변호사가 까칠한 표정으로 반론을 제기하자 판사가 이마에 내 천자를 드러내며 말했다.

변호인 측은 설마 이 재판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지금 변호사가 지적한 검찰측의 월권 발언은 받아들일 수 없소.왜냐? 변호 석에 앉아있는 피고인은 명백한 범죄자 요. 안 그렇소? 따라서 검찰측의 언사가 다소 거칠다 해도 그것이 재판에 하등 문제가 되지 않소.다만 검찰측도 질문의 본질을 벗어난 인신공격은 자제해 주시오.”

판사님의 중재를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이같이 답한 주걱턱은 바닥에 놓인 브리프 케이스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A4용지 크기만 한 투명 비닐 봉투를 꺼내 들었다.

비닐 봉투 속에는 여러 개의 쇠붙이가 들어있었다.

비닐 겉봉에는 붉은색 매직 펜으로 갈겨 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비닐봉투를 손에 든 주걱턱이 자리를 벗어나 내용물을 판사에게 보여준 뒤 배심원 석으로 다가갔다.

주걱턱이 배심원들의 호기심을 부추기며 비닐봉투를 가져갔다.

비닐봉투 속 쇠붙이는 다름아닌 브라우닝 하이파워 자동 권총을 분해한 것이었다.

 

검사가 두 눈을 치켜 뜬 배심원들을 향해 의기양양한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배심원 여러분. 보시다시피 비닐봉투 속의 내용물은 권총을 분해한 것입니다.원래 조각들은 모두 7개가 있어야 했으나 자동 권총의 한 부품인 스프링은 사라졌습니다. 이유는 피고가 권총을 분해한 뒤 버렸기 때문입니다. 피고의 교활하고 치밀한 계산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지요. 덧붙여 피고인은 이 자동 권총으로 고인을 저격해 살해했습니다.”

이때였다.

판사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피고가 자신이 살해했다고 자백을 했소?”

주걱턱이 큰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검찰에서 뿐만 아니라, 피고인을 서울에서 연행한 삿포로 경찰서 야마가미 히데아키 강력계 형사 에게도 같은 사실을 밝혔습니다.”

알겠소. 검사는 계속 하시오.”

자신의 말을 자르고 불쑥 끼어든 판사를 불쾌한 표정으로 곁눈질 한 주걱턱이 배심원들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이 총의 이름은 부라우닝 하이파워입니다. 모두 17발의 총알을 탄창에 장착할 수 있는데, 성능이 뛰어난 흉기입니다. 피고는 이 총으로 이와무라 미치토씨 선생을 살해했습니다.단 한방으로 말입니다.현장 감식결과 탄환이 선생의 뒷머리를 관통한 뒤 뇌 속의 신경조직을 갈가리 헤집고는 순식간에 생명을 끊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탄환의 충격으로 얼굴 앞면이 형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 졌고요…”

주걱턱이 피살자의 주검을 끔찍스레 떠벌리자 방청석에서 일제히 신음을 터뜨리며 변호인 석에 앉은 여명을 바라보았다.

방청인들이 웅성거리자 판사가 날렵한 몸짓으로 진행 봉을 집어 들어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며 외쳤다.

조용히 하세요!”

(계속)

이산해 / 추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