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본 대로 느낀 대로     

                                                                                                          

                                                                                                                                                              최 선 호

 미주시문학회 역대회장과 3 인의 초대시인 그리고 회원작품까지 포함하여 120여 편의 작품에 대한 시평을 부탁 받았다. 필자의 수술 가료 중이기에 적지 않게 망설이다가 결국 한 편씩 본 대로 느낀 대로 몇 자 적기로 하였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일찍이 ‘시를 설명도 하지 말고 평도 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보고 느낀 그대로가 그 시의 전부라는 것이다. 이는 시가 지니고 있는 지고지순함을 지켜주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독자마다 생각과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느낌을 교환하는 일은 그만큼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평문은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캐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생각이 가장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내 생각의 좋은 보탬이 되면 족할 뿐이다.  


십리포마을에 가면 굽고 꼬이고

뒤틀리며 늙어가는 소사나무들 있다는데

거친 바닷바람 몸으로 막아 마을 지켜주느라

처절한 몰골 되었다는데

옹진군 영흥도 십리포로 나 오늘 물어물어 길 떠나

그 소사나무숲으로 가보고 싶네

몸부림친 격한 흔적들 그 굳은 상처를 하나하나 만지고

얽히고 헝클어져 스스로의 길을 만든 나무의 울음을

위로하고 싶네

소사나무 한 그루 저기 걸어오시네

꺾인 허리 지팡이에 기대 쓰러질 듯 걸어오시네

급류가 쓸고 간 지층처럼 얼굴 가득 패인 주름 골짜기로는

출렁, 파도 일 것도 같은데

식솔들 밥상을 차리기 위해

그 허리는 얼마나 많이 굽혔다 일어나곤 했을까

흔들바람을 헤쳐 목숨처럼 식솔들 지켰을

간난이, 막순이, 언년이, 부뜰이

그 흔한 이름조차 갖지 못해 그저 노파라 불리는

소사나무숲에서 나왔다 소사나무숲으로 들어가시는

한 그루, 거룩한, 소사나무여

나 오늘 내 이름을 말하지 못하네

                                                - 권귀순의 ‘소사나무숲으로’ 전문


 소사나무 한 그루로 비유되어진 인생! 노파의 삶이 나무에 감정이입 되어 더욱 처절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 흔한 이름조차 갖지 못해 그저 노파라고 불리는/소사나무숲에서 나왔다 소사나무숲으로 들어가시는 한 그루, 거룩한 소사나무’는 바로 시인 자신이 아닐지? “나 오늘 내 이름을 말하지 못할”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 이 시가 보이는 메타포는 인간은 한 그루의 나무이며 인간사회는 하나의 숲이다. 인간이 하는 일을 나무도 하고 나무가 하는 일을 인간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과 나무는 공통점을 이룬다. 소사나무는 소사나무숲을 떠날 수 없는 숙명적인 존재다. 인간도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 중에 무한의 외로움과 고통을 안고 사는 삶이 바로 인생이 아닌가 싶다. 이런 아픔을 낭만적 분위기 위에 한 송이 꽃으로 피워 올렸다.      


 40여 년을 영어권에 살면서도

 당신이 가르쳐준 언어로만

 시를 쓸 수밖에 없는 내가

 쑥스럽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저녁입니다


 내 시가 처음으로 눈을 뜬

 고향의 언덕, 그 위에

 당신의 언어로 내리는 눈은

 함박눈이라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싶은 것은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당신의

 착한 아들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물어보지도 않고 떡과 보리차를

 내 책상 위에 갖다놓는 당신의 넷째 며느리

 그 꽃 같던 새 색시가 나이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당신을 닮아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저녁입니다.

                                         - 이창윤의 ‘함박눈 내리는 저녁에’ 전문


 이창윤의 시에서는 차분한 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큰  사건이 아닌 듯해도 그 속에는 적지 않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현실적으로 그의 육신은 40여 년을 영어권에서 살고 있으나 그의 마음은 함박눈이 내리는 고향에 사는 부모님의 착한 아들로 남는 꿈을 꾸고 있다. 1연의 현실에서 2연의 추억의 과거로 돌아간 그는 3연에서 다시 확실하게 클로즈업 되는 현실을 만난다.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넷째 며느리의 물어보지도 않고 떡과 보리차를/내 책상 위에 갖다 놓는” 행동이 비록 돌발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 자연스러운 인생살이의 변화를 통해 무위사상(無爲思想)의 주변을 감돌고 있는 듯하다.        


신호등은 아버지 얼굴이다

밤낮으로

그 높은데서 내려다보신다           


파아란 미소의 얼굴은

옳은 일을 한 내게

내리시는 관대한 칭찬이다

때론

못마땅해 근엄한 경고의 노오란 표정은

넘어질라 조심하라는 염려의 안색이다


칭찬만

염려만 하시던 아버지가

빨갛게 노여우실 때는

분명                 

나는 그 뜻을 거스르고 있어

일단 멈추고 나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밤이 내리는 네거리에

신호등 손짓에 움직이는 나


이 내 삶의 교차로엔 신호등이 없다              

아버지의 사랑이 신호등 되어                                     

                   

오늘도

파아란 노정(路程)에 내 인생이 직진한다.

                                             - 김영교의 ‘신호등’ 전문


 현대인의 삶은 신호등 아래서 이루어진다. 빨강, 노랑, 파랑은 교차로 위에 걸려 있는 시그널만이 아니라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도록 지시해주는 명령기호이다. 윤리, 도덕, 말씀 등에 대한 메타포이다. 이를 어기는 순간 인간은 불행에 빠진다. 신호등에 절대 순종하던 시인이 “이젠/내 삶의 교차로엔  신호등이 없다/아버지의 사랑이 신호등 되어//오늘도/파아란 노정에 내 인생이 직진한다.”고 고백할 만큼 성숙한 생활을 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믿음의 성숙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신호등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하늘도 상념의 넋을 껴안고

초연히 먹구름 모자를 씌워

설음의 이별 잔을 선물한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한숨 털고 영생 찾아

새록새록 날개 달고

은하수 북두칠성 나란히

영롱한 집 지으신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번민과 고뇌에 사로잡혀

감당할 길 없던 한 많은 이승

넌지시 자리 비우고

천국행 떠나신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명철한 정신 잔잔한 미소

솔바람처럼 밀려오는데

선의 깊이가 성에 안 차 저승 향해

물빛으로 돌아앉으신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선비의 붓에 힘주어

동족 후예를 끌어안으려

자나 깨나 고심하시더니

떠오르는 태양 형상으로

큰 별 이름 곁에 안주하시려는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살아 아무도 가보지 않았다 해서

누가 마지막 길이라고 말했던가요. 편히 쉬소서.

                                            - 박송희의 ‘별이 떠난 언저리’ 전문


 5연으로 이루어진 시에서 5행이나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를 반복하고 있다. 과거에는 몰랐던 사실을 별이 떠나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별은 시인의 존경의 대상이나 사랑의 대상이다. 그가 떠난 후에 이생과 저 세상을 잇는 관계 속에 연결되는 사연들이 열거 반복을 이루면서  미지의 세계를 예시하고 있다. 특히 3연 3행 이후 “선의 깊이가 성에 안 차 저승 향해/물빛으로 돌아앉으신 뜻을/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에서 신선한 시정을 엿볼 수 있다. 세상을 떠나 편히 쉬기를 바라는 염원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강제로 열어 제긴

문 앞에

떨어져 있는

얼굴이 서로 다른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온 동전들

그 중 10환짜리 한국동전 하나

 

손 때 묻어

다 달아빠진 무궁화 가운데

구멍 뚫린 찌그러진

단기 4292년 동전

 

코리아타운을

방황하는 노인이

고향이 그리울 적마다

인정이 아쉬울 때마다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며

고향을 찾는다.

 

맴돌다간 상념 사이에

버려진 동전의 사연만큼이나

겹겹이 쌓여간 한의 그림자가

동전 위에 그림자처럼 서려있다.

                                    - 이준구의 ‘단기 4292년 동전’ 전문   


 단기 4292년의 동전과 코리아타운을 방황하는 노인을 대비시키면서 동전과 노인 사이에 “겹겹이 쌓여간 한의 그림자”로 시정을 연결하고 있다. 방황하는 노인의 생애가 구멍 뚫리고 찌그러져 버려진 동전에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강제로 고향을 떠나와 이국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노인에게는 하찮은 동전일망정 가장 소중한 위로의 대상이 되고 있음에랴! 이국에서 외롭게 사는 노인들에게 낡은 동전만한 위로의 대상도 없단 말인가? 이미 외로운 노인들의 삶을 읽고 있는  시인은 외롭게 사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싶은 간절함을 품고 있다.


꼿꼿이 서서 생을 마감한

큰 나무 하나

요세미티 공원 산정에 서있다

얼마나 고달픈 날 많았나 사는 동안

다른 나무보다 먼저 간 걸 보면

내부의 불화도 컸나보다

 

가지들은 영양 공급 부족타

뿌리를 원망하고

더 높이 솟아 세상을 호령하고픈

몸통과 가지의 무서운 집념

바위 틈 비집어 물을 긷던

뿌리 또한 힘겨운 날 셀 수 없으리

 

한 울 안에 서로를 원망타가

같은 날 세상을 떠나

이젠 모든 욕심 벗어버린

앙상한 맨몸으로

보여주는 저 허무.

                           - 강언덕의‘종점’전문


 이 시는 우리에게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손짓하고 있다. 행복하게 살았던 불행하게 살았던 결국 인생은 허무한 것이란다. 이 시에 등장된 나무를 나무 그대로 보아도 좋고, 그 나무를 인간으로 보아도 좋다. 다만 목숨을 가진 것이 자기의 삶을 살기 위해 온갖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떠난 후 “보여주는 허무”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이에서 지나지 않을 것이다. ‘허무’라는 하나의 단어가 이 시 전체를 감싸고 있음에랴! 이 시인은 인생들의 모든 앞날을 내다보고 있는 듯하다.   


말 한마디 없이 가버린 친구

슬프고 여간 섭섭합니다

송 형이 남긴 사랑과 미움의 찌꺼기를

땅속 깊이 묻고 왔습니다

글 쓴다는 것이 그렇게 우쭐해 할 것은 못되는 것

가난하게 변두리에서만 살다 가면서도

뻔뻔스러운 동료 문인들 곁을

조용히 도망치듯 가버린 친구가

왜 이렇게 차갑게만 보이는지

마지막 공식 석상에 나온 후 4개월 남짓

무서운 고독과 싸움질을 얼마나 했을까

그래도 송 형은 예리한 판단력과 추진력이

남다른 분이었기에 문인협회를 지금까지

30여 년을 이끌어 왔습니다

탄생과 죽음은 같은 선상에 있는 것

생사화복은 하늘의 뜻이라 했지만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긴긴 이국 생활에서 만난 친구

속마음 주고받으며 외로움 달래었는데

나보다 적은 나이에 먼저 떠나다니

송 형과의 우정을 오래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최석봉의 ‘송상옥 형 전에’전문


 보내온 5편이 모두 추모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시들이다. 그 중에 연초에 고인이 된 송상옥 문우에 대한 작품을 택했다. 필자가 아는 최석봉은 참으로 정이 많은 시인이다. 그의 시들에는 뜨거운 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그 뜨거운 정을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묘법을 가지고 있다. 이 시를 비롯해서 그의 시들은 거의 어려움 없이 읽히는 시들이다. 읽으면 읽는 대로 살아난 감동이 직선으로 날아와서 나비처럼 사뿐히 마음에 앉는다. “나보다 적은 나이에 먼저 떠나다니”라지만 오고 가는 일을 누가 어찌하리오.


기다리네

어제 그제 또 내일

그리움의 보자기

푸른 통치마 둘러 입었네

 

차가운 바람맞으며

살갗 터지도록 기다리네

잃어버린 우정

인간시장의 양심지수를

 

너에게 들려주려고

몰래 간직해 온 한마디

내 여린 심장

판막에 찍히면

그물에 걸린 푸른 생선처럼

튀어 오르며 달려가네

 

혹시나 못 찾을까

가슴 다독여 둘러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큰 입술로 반겨주네

세상 진풍경 다 보고 있는

그대는 귀 열린 벙어리

영원한 집시.   

                                  - 유지애의 ‘우체통’ 전문

       

 시인은 우체통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등장시키고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큰 입술로 반겨주네/세상 진풍경 다 보고 있는/그대는 귀 열린 벙어리/영원한 집시”로 한없는 기다림을 체념시키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택하여 생애의 단면을 대입시키고 있다. “그물에 걸린 생선처럼/튀어 오르며 달려가네” 라고 생동감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무생물체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서 이처럼 다양한 시정을 읊어내는 일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걸음 물러 서 바라보니

더 예쁘다

꽃 질 날 모르는 척

이슬 얹어 상큼하고

숨결은

닿을 듯 속마음을

가시 꽂아 밀치네

                        - 조옥동의‘장미’전문


 한국의 전통적 가락에 아름다운 시정을 담았다. 제한된 형식이지만 제한을 받은 느낌은 전연 없이 자유롭다. “한 걸음 물러 서 바라보니”는 장미에 대한 시인의 여유로움이다. “꽃 질 날 모르는 척”은 모든 생명체의 항념(恒念)이다. 그 예쁜 꽃 위에 “이슬 얹어 상큼하고”는 금상첨화이다. “숨결은/닿을 듯 속마음을/가시 꽂아 밀치네”에서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살던 한국의 전통적 여심(女心)이 보이는 듯하다. 장미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 냈다.  


여느 사내들에게는 수많은 별처럼

민틋한 민패로 대수롭지 않은

많은 여자 중 하나에 불과해 보이겠지만

들나귀 같은 내 삶에 방울 달아준 여자


인연의 수레바퀴를 타고

내게 오신 유일한 여인이시네

산골 진달래처럼 피어나

비바람 천둥 속 그렇게 자라온 여자


꿈속에서조차 한 번도 뵌 일이 없는

만나기 전 소식조차 들은 일이 없는

낯설고 서름하여 거북스럽던 여자

별똥별처럼 내 앞에 선 인연의 여인


지금은 아이들 엄마가 되고

뱃사람처럼 검고 주름진 얼굴에

참새가슴 할딱이며 내 곁에 잠들어

내 가슴 울컥케 하는 몸집 작은 여인이여!

                                       - 송석증의 ‘아내 1’ 전문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더듬으며 아내를 생각한 시로 우리의 가슴까지 울컥케 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누구와도 감동으로 통하는 시이다. 들나귀 같은 내 앞에 인연의 여인이 별똥별처럼 서 있다. 들나귀와 별똥별로 사뭇 엄청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무척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산골 진달래처럼 피어나”,  “뱃사람처럼 검고 주름진 얼굴”이 되기까지 나와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참새가슴 할딱이며 내 곁에 잠들어” 있는 우리의 아내들이다.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라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비이커가 나의 어머니였고

시험관이 나의 아버지였다


나의 몸에서는

사람의 냄새가 아니라

영혼의 냄새가 아니라

실험실 냄새가 났다


과학의 문지방에 걸려

영원한 삶의 현장으로

이식되지 못하고


삶의 변두리만 맴돌다 가는


생명은 있으나 영혼이 없는

초대 받지 못한 국외자였다

                          - 윤석훈의 ‘복제 인간' 전문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와는 너무도 다른 현대 과학문명의 산물로 태어난 비이커와 시험관이 키워낸 인간에게서 “실험실 냄새가 났다”, “삶의 변두리만 맴돌다 가는//생명은 있으나 영혼이 없는/초대받지 못한 국외자였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는 현대 과학문명의 방향에 대한 철저한 항변이다. 시인은 복제 인간을 원치 않는다. 순수한 인간애와 영혼이 교감하는 사랑의 인간세계를 애타게 열망하고 있다.     


현관문이 사선으로 마주 보는

우리 앞집은

늙도 젊도 않은 게이 부부가 산다


며칠 전 혼자 사는 옆집 할머니

딩동! 시시콜콜 눈빛으로 들어와선

듣는 사람도 없는데

작은 소리로 큰 소식 알려주고

짤짤 고개 흔들며 나가셨다


동네 우사라고 뒷말 간신히 삼킨

내막인즉슨

앞집 남자들이 글쎄 아기를 입양했다는 거였다

우유야 엄마가 있어도 소젖 먹이는 세상이라

그렇다 치고

아빠만 둘인 아이는 커가면서 얼마나 헷갈릴까


에라! 내 알 바 아니지 하다가

피죽도 못 먹어 애들이 죽기도 하는데

잘 키워 사람 만들면

그것 또한 좋은 일 아닌가 생각하니

독종도 머리 맞대고 있으면 순해 보인다고

삼 년 남짓 마주보고 산 그 부부가 갑자기 선한 목자 같다


저저끔 자기세상 사느라고 분망한 세상

무슨 이조시대라고 남의 삶에

감 놔라 대추 놔라 설레발 칠 건덕지가 없다

순리가, 자연이

때로는 사람 생각과 다를 수도 있으니까

                                           - 정국희의 ‘남의 말’ 전문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고발하면서 시인도 현실에 묻혀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한 단면이다. 성경은 동성애를 용납지 않는다(레18:22;20:13). 인류사회는 성경과 점점 멀어져가고 있지는 않는지. 아버지가 둘이라도 거기서 모성애가 나올 리는 만무한 일이다. 소젖을 먹고 자라는 일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모성애 없는 데서의 성장은 오죽할까! 시인은 ‘남의 말’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 이상으로 현대를 살고 있는 인류의 시급한 문제이다.       


한적한 오솔길

수북이 쌓인 낙엽 위로

자동차 한 대 지나간다

누워있던 낙엽들

일제히 일어나 달려간다

니가 나를 지날 때

내 맘도 저러 했느니

                       - 구자애의‘니 맘 다 안다’전문


 상대를 자동차로, 나를 낙엽으로 의물화(crystallization)하여 애틋하게 정서를 연결시키고 있다. 달리는 자동차의 힘에 의해 딸려나가는 낙엽이건만 낙엽 스스로 달려 나간다는 표현에는 무리가 없다. “니가 나를 지날 때/내 맘도 저러했느니” 처럼 간절한 마음이면 자동차가 누워있는 낙엽 가까이 왔을 때(지나기 전) 낙엽이 선뜻 일어났다면 어떨지?  이 시는 시인의 간절함을 간략한 표현으로 잘 내비치고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면,

허나 혹한 폭설 직격탄 맞은 엘에이 촌놈

마비 된 교통망, 외치려 모여든 전철

옛 전란에도 이런 대혼란이

몸뚱이 절로 밀려 불식 바싹 여윈 얼굴 닿자 감은 눈에 온갖 환상


옛적 오라이!

버스 타본 사람 감 잡겠지

콩나물 시루속의 급성장을

역전 우동 포장마차, 체면은 무슨,

일본이 배운다는 속결 빨리빨리

전자 패스 하나면 전철, 버스 만사형통이라

이런 맛도 있어야지


폭설경보!

불요 외출 삼가도록,

옳거니 국민 취향 일위 고스톱 판

엉기지도 뛰지도 고스란히 달포를 여인숙 눈감고 세월 보내노라니

엄청 쌓인 눈길 헤치는 전철 기적에 묻어오네,

                                                        - 김탁제의‘혹한 폭설’전문


 철저히 폭설에 갇혔던 경험이 나열되어 있다. 폭설에 갇혀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잘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도 섞여 있다. 폭설경보까지 내렸으니 외출도 할 수 없고 방안에 둘러앉아 고스톱이나 치고 있는 한국적 풍경이 그려져 있다. 폭설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닌데 시인은 되도록 많은 사건들을 표현하려고 애를 쓰고 결국은 “엄청 쌓인 눈길 헤치는 전철 기적에 묻어오네”로 자연의 변화 속에 인류문명을 대입시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엄마의 엄마,

천년의 엄마를

                      - 이 일의‘배꼽’전문 


 인간의 원초적 뿌리, 사랑을 찾는 절규이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랑덩어리이다. 이런 엄마를 찾아 헤매는 삶은 외로운 삶이다. 우리 현대인은 누구나 외롭다. 인간이 외롭다는 것은 사랑이 메마른 탓이다. 시인은 가장 뜨거운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배꼽이 있다. 배꼽은 몸의 한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중심에는 배꼽처럼 사랑이 있어야 한다. ‘천년의 엄마’는 인류의 조상일 수도 있겠지만 인류에게 바른 길을 예시하는 태초의 Logos라면 어떨지?  Logos는 말씀이다. 이 말씀(Word)의 원어는 여성명사임에 무관치는 않다.


잠시 몸뚱이와 이별한 바지 두 가랭이는 기회를 타

하늘에라도 오르려는지 빨랫줄에 매달려 발버둥 치며 나폴거리는데 


속절없는 나비는 재미라도 붙인 듯이 가느다란 줄에 올라가

흔들거리는 그네를 즐긴다


빼앵 두른 묵직한 병풍 같은 웅장한 산봉우리들

서서히 푸른빛을 발휘하며 산기슭에 눈 녹인 물 졸졸 흘려보낸다


아무리 세차게 봄바람이 불어 부친다 해도

꼼짝도 없이 낯이 간지러운지 어린 이파리만 살랑이고

아래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재미라도 있듯이

지켜만 보고 있는 산등성이

넓은 평야에는 흙먼지를 일으키고 멋쟁이들 곱게 빗은 머리도 뒤집어보고

혹여나 게을러질까 봐 농부들의 졸음을 깨우고


싹 틔울 준비하라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부지런한 봄바람

                                                                  - 李恩子의‘봄바람’전문  


 봄 풍경이 여실하게 그려져 있다. ‘바지 두 가랑이’, ‘빨랫줄’, ‘속절없는 나비’, ‘산봉우리’, ‘산기슭’, ‘눈 녹인 물’, ‘어린 이파리’, ‘넓은 평야’ 등, 열거된 풍경에서 봄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런 사이를  “농부들의 졸음을 깨우고//싹 틔울 준비하라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부지런한 봄바람”은 상쾌한 기분을 안겨준다. 이런 사실성 위에 정겨운 봄바람을 보는 치밀한 시각과 함께 따뜻한 시정이 곁들일 날을 기대해 본다.


*마르첼리노를 

나직이 묵상하는

곱디고운 그녀의 가슴으로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봄이 물결치며 밀려오고


마른 가지마다

매화 봉우리들

높은 곳을 향해

그의 미소처럼 피어나네


마르첼리노를

열병 돋도록 생각하는

그녀의 몸 안으로

분홍 매화꽃잎

모나크 나비되어 훨훨 날아,


밀가의 봄은

파란 오존의 왕국이리

말리부 산등성

붉은 장미원에서

파도처럼 일어서네


*마르첼리노, <밀가의 아리아>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며 가톨릭 신부이다.

*밀가, <밀가의 아리아>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말리부, 남가주 서해안에 있는 도시이름.

*모나크 나비(monarch butterfly) 왕나비과의 나비.

                                                          - 리사 리의‘봄’전문


 <<밀가의 아리아>>에 바치는 헌시 안에 소제목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 ‘우주’, ‘영혼’ 등 7편의 관념시들이 있다. 그 중에 처음의 ‘봄’을 택했다. 이 시의 중심소재는 ‘밀가의 봄’이다. 이 봄은 “마르첼리노를/나직이 묵상하는” 밀가의 가슴에서 피어난다. “마르첼리노를/열병 돋도록 생각하는/그녀의 몸 안으로/분홍 매화꽃잎/모나크 나비되어 훨훨 날아” 살아난다. 그런가 하면 “말리부 산등성/장미원에서/파도처럼 일어서네” 처럼 ‘마르첼리노’를 연모하는 ‘밀가’를 매개로 하여 봄기운을 산으로 불어 올려 가슴으로부터 말리부 산등성에 피워내는 시인의 압축력이 대단하다.

                       

블라우스가 누워 있지

한 주름살에서 다른 주름살까지

먼 길

너도 내 옆으로 와서 누워

배 안은 춥지만 따뜻해

팔을 내민다

이 팔뚝에 누이가 있다

블라우스에 연결된 관으로 복수가 흐르네

흐르는 시간


시간을 졸라매죠

한 번 주사로 10 년은 젊어져요

머리 위에 TV 화면

활짝 웃는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

주전자 다리미, 다리미 TV, TV 주전자

여자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져

다리미가 단추에 걸리지

단추 구멍 같은 눈도 크게 만들 수 있다고 의사가 말한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눈이 동그란 누이가 빳빳하게 풀 먹인 교복을 입고 달려가네

달려가는 시간


시간을 풀어보아요

블라우스가 반듯하게 일어나요

옷걸이에 태그를 붙이지

깃이 선다

칼바람 임진강 송어 잡아 올리던 개울 찬물만큼

날카로운

손가락에 핏자국이 선명해져요

그 시간 누이의 입술이 푸르다 찬물색 만큼

오늘 저녁 식은 밥도 없어서 배가 고픈데

손을 멈추면 정지하는 시간

                                             - 이 경의‘세탁소에서' 전문


 세탁소 안에 있는  세탁물들을 대상으로 시상을 펼치고 있다. 의류가 누워 있는데 마치 사람이 누워 있는 모습이 전개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사건들이 펼쳐진다. 이것은 시인의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모습들이다. 독자가 공감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에 대한 관심이 전연 없다. 이것이 작가의 바른 태도이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쓰는 태도가 좋은 글쓰기의 태도이다. 그러나 독자가 공감할 여지는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연 중간 이하는 상당한 비약을 보이는 듯싶다.       


바람은 늘 45도 각도로만 불어오는 것을

알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심히 바라보던 눈에 잔상으로 남아있던

고목나무는 중후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바람마저도 눈치를 살피는 건

차라리 그저 바람에

기분을 맡기는 것이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기에

충분했기 때문일 게다

45도쯤 기운 시침과 분침은 늘 만나야만 하는 운명

조금 삐딱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

그들이 뱉어낸 배설물에도 파리는 꼬이는 법

신혼여행을 떠나는 차에 매달린 오색 테이프가 시야에서

멀어지기 전에 누구도 그들의 행복을 장담할 수 없듯이

엄지족의 좌판으로도 그들의 언어를 표출하기엔 시간이라는

경직된 상자에 자신의 상념마저도 꿈이 되어버리는 것은

가버린 시간의 후회 보다는 다가올 미래의 강박감이었을 게다

산자와 죽은 자의 대화는 45도의 마음을 비워야 가능한 이야기

누구도 그들의 이야기는 관 뚜껑이 닫히기 전까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사람들에겐


바람은 늘 45도로 불어오고

손수레를 끌고 있는 기초수급생활자

굽은 허리를 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게다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현실은

그들을 늘 45도쯤 내려 보고 있었다

                                          - 최광운의 ‘45도의 비밀’전문


 인생을 시계의 시침, 초침으로 45도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시인, 그리고 45도의 각도를 통해서 알아내는 여러 가지 삶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45도를 분별하기 위하여 바람과 중후한 고목나무를 등장시키는 시인의 시상 전개가 예사롭지 않다. 신혼여행을 떠나거나 엄지족의 좌판, 손수레를 끌고 있는 기초생활수급자 등을 통해서 인생을 바라보는 45도의 위치는 극적일 만큼 감동을 부추기고 있다.   

                                                         

막내딸 약혼식이 있던 날

양가가 모여

꽃들을 예쁘게 꽃아 놓고

잔들이 부딪치는 음악이 흘렀다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

연실 웃음을 흘리며

품을 떠나가려는 막내를 본다


한사코 바라보던

그 곳에

껍질만 소복하게 쌓여있다

                             - 서외자의‘누에고치’전문


 시상에서 오는 느낌이 신선하다. 딸의 약혼식 날, 어머니 품을 떠나는 딸은 문득 나비가 되어 날아가고 그 자리에는 나비가 되기 전의 딸이 담겨 있던 고치 껍질만 소복하게 남았다는 모정(母情)이 그려져 있다. 이런 경우 약혼식 날보다는 오히려 결혼식 날이 더 실감나지 않을까 싶다. 딸이 훌쩍 떠나버린 후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누에고치로, 즐거움과 기쁨, 아쉬움까지 몽땅 쏙 빼내어 간 껍질로 보면 더욱 선명하지 않을까?      


내 집은 쉬운 만큼 큰 길 멀어 자랑스러운

도심 속의 섬


차 타려고 분분히 발걸음 옮기는 것은 싫지만

바람에 볼 부비며 섰는 가로수 아래

씩씩하게 걷는 길이 좋다


넓은 땅 한 없이 커가는

휘늘어진 보랏빛 자카란다 그늘

사시사철 미소 짓는 핑크빛 꽃이

콧노래 부르며 걷게 하는 낭만의 거리다


사막을 걷다

권총 든 사나이에 쫓겨

매운 그 길 벗어나 찾아든 동네

십자가 지붕만 다섯 개라서

시린 마음 다독여주는 곳이다


네온 가득한 쇼핑몰 없어 왁자하지 않은

초록 집 나의 골방

이따금 창공을 나는 갈매기 소음 따라

허공에 기대서서

빨갛게 익어가는 단감나무 아래

눈길 끌려던 고운 나뭇잎 주우며

세상냄새 차단시키고

밥내 가득 퍼져가는 곳

                                       - 엄경춘의 ‘나의 골방’ 전문


 평화스러운 환경에 안주하고 싶은 간절함이 역력하다. 그래서 찾아온 이곳이 마음에 든다. 이 환경이야말로 나 혼자 들어앉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골방’ 구실을 한다. 권총 든 사나이에게 쫒길 일도 없다. 십자가가 다섯 개나 있는 동네이니 얼마나 안심이 되랴! 무리 없이 내가 안주하고 있는 주위환경에는 세상냄새가 스미지 않고 고소한 밥내 가득 퍼져나는 곳이다. 그러기에 이곳은 ‘나의 골방’이다.


그대 오시는 날은

아침 해가 산 뒤에서

왜 그리 꾸물대는가?


그대가 내 곁에 머물 때는

어찌 그 해가

저렇게 서두는가?


너무도

짓궂은 해여!

                         - 정진업의‘해’전문

 

 그대를 중심으로 해를 원망하고 있다. 그대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수천수만 년을 떴다지는 해이지만 한 번도 시간을 어겨본 일이 없건만 시인은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과 얼른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해를 매체로 하여 강조하면서 심지어 “너무도/짓궂은 해여!”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짓궂은 것은 해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의 짓궂음을 오히려 해에게 전가시키는 시인의 그대에 대한 애착을 짐작할 만하다.

            

묻고 싶네

바람타고 날아가는 잎새에게

어디로 가는지


동서남북 기로에 서서

차마 선뜻 가지 못하는 발길

몇 십 년 때 묻은 짐을 비워 내기엔

깊고도 깊게 묻혀 있다


구석구석 쏟아져 나오는 기억들

이 박스 저 박스 구겨 넣어도

손끝으로 미끄러지는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아침마다 날 반겨주던

작은 가지의 내 사랑 꽃향기

나와 함께 늙어 고목이 되었다


떠나는 주인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오렌지는 저 혼자 잘도 익는다

                            - 김선자의‘이삿짐을 꾸리며’전문


 이삿짐을 꾸리며, 떠나는 이의 마음을 고목에 감정을 이입시켜 시정을 읊고 있다. 이 고목은 나와 함께 늙어온 나무인데, 나무가 떠나는 이의 심정을 알기나 할까마는 “떠나는 주인 마음/아는지 모르는지/오렌지는 저 혼자 잘도 익는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사를 가면서 짐을 나르는 일도 어렵지만 그 동안 쌓이고 쌓인 정을 나르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던 일까지 짐을 싸면서 새록새록 느껴짐을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                                  

 

갈라진 여자의 뒤꿈치를 갈아 줍니다

각진 계곡 사이로 서걱거리는 바람소리를 내며

야성의 지층을 갈아 냅니다

산맥을 씻어 내린 가난한 땟국으로

깡마른 뒤꿈치에 퇴적된

나와 우리의 요약이 풍화된다고요


그녀 인생처럼 발도 작아서 손아귀에 꽉 잡히는 군요

저렇게 잡혀버린 더럽고 치사한 날들이

발가락 새에 까맣게 쌓여 있군요


살 가루에 일간지에

소복이 쌓인 지난했던 세월의 유골에

머뭇거리던 눈물방울이 푹 파묻힙니다


유골을

그녀가 유린했던 광야로부터 수습하면서

나는 비로소 소복을 벗고 말합니다

저쪽 발도 갈아 줄까?

                                           - 문만규의‘아킬레스 산맥을 내려 보다’전문


 아킬레스의 산맥을 내려 보다가 갈라진 여자의 뒤꿈치로 이어진다. 이것은 시정을 이어내는 연상 작용이다. 깡마른 뒤꿈치로부터 발가락 사이까지의 상황을 통해 인생의 단면을 그리고 있다. 사용된 시어들이 새것들은 아닐지라도 표현이 고루하지 않아서 좋다. 끝부분으로 이어지는 비약적인 상징이 결국 “저쪽 발도 갈아 줄까?”에 이르게 된다. 여자의 한쪽 뒤꿈치를 갈아 주었으니 마저 저쪽 발도 갈아주는 일은 당연지사가 아닐까?     

  

세월은 가도

그리움은 사금파리 조각처럼

반짝이는 아픔을 주는 것


당신을 향한 남빛 그리움은

오래도록 앓아 온 지병이던가

이제는 잊어도 될 만치 세월이 흘렀건만

난 아직도 당신의 이름 앞에 서성이고 있다오


햇무명천 맑은 가슴으로

가만히 날 부르던 당신의 웃음은

지워지지 않는 치자꽃물이었고

수줍은 오디 내음으로

입맞춤 해 주던 당신의 입술은

사르비아 꽃잎만 같았는데


이렇게 날 홀로 두고서

서쪽 하늘로 서쪽 하늘로

모질게 가버린 당신


당신이 가고 없는 이 도시는

자카란다 쓸쓸히 흩날리는데

어찌 내게 용서를 바라시나요


허허......

                             - 채영식의‘용서’전문


 나를 세상에 두고 떠난 당신을 아무래도 잊을 수 없다(용서 못한다)는 임에 대한 그리움의 간절한 표현이다. “자카란다 쓸쓸히 흩날리는데” 당신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도저히 잊을 수 없음을 “어찌 내게 용서를 바라시나요” 라며 설의적으로 반문, 강조하고 있다. “햇무명천 맑은 가슴으로/가만히 날 부르던 당신의 웃음은” 용서 받지 못한 그리움의 표상일 뿐,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것이다. 떠난 당신을 용서의 대상으로 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영원한 그리움으로 멍들었기 때문이다.      

                              

살다가 헤어질 때

그냥, 이별하는 게 좋습니다

남은 정 때문에 붙잡고

씨름하기 보다는

갈 길을 가도록 그대로

놓아두는 게 좋습니다

그리움이 쌓이면 병이 깊고

그날 흘린 눈물

보내는 일 방해가 됩니다

그저

강물이 흐르듯

겨울 나뭇잎 버리듯

그렇게 보내주는 것이

남아있는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 최찬기의‘이별의 노래’전문


 사람의 일이 이토록 마음대로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그저/강물이 흐르듯/겨울 나뭇잎 버리듯/그렇게 보내주는 것이” 인생이라면 어려울 게 없는 일이지만, 시인은 인생을 달관한 자리에 올라있는 마음으로 용감한 외침을 통해 인생들을 위로하고 있다. 평범한 시어들을 모아 어렵지 않게 아픈 가슴들을 향해 따뜻한 권면을 하고 있다. “남은 정 때문에 붙잡고/씨름하기 보다는/갈 길을 가도록 그대로/놓아두는 게 좋습니다”가 이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내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아이를 낳아 키운 집


평생,

살 집처럼 토닥거리며 일군 조그만 꽃밭

목련화도 심고 천리향도 심었지 

나팔꽃 넝쿨에 야무진 꿈 하나 매달았지만

닿을 듯 닿지 않아, 이상을 맘에 그리며 찾아 온

집 밖의 낯 설은 이국 땅


헛다리짚어 이끼만 무성한 세월

고장 난 몸뚱이 나이테만 쌓이고

성냥갑 같은 아파트,


꿈은 빗물처럼 흘러 요원한데

고인 눈물 비집고 들어 온

백열등 깜박이는 집 한 채 손짓하고 있네

가서, 아랫목에 한번 누워보았으면


아, 보물섬 같았던

그 집

                                      - 안선혜의 ‘그 집’ 전문


이민생활을 하면서 지난 날 본국에서의 삶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때 살던 그 집 아랫목에 한번 누워보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시인만이 아니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다 같은 심정이 아닐까! 이상을 따라 이국에 온 삶이 헛다리짚어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음에, 시인은 이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솔직한 고백이야말로 바른 문학정신이다. 누구에게나 현실은 고통으로 다가오지만 과거는 그리움으로 남아 보물섬이 되어 아른거리기도 하는 것이 이민자의 삶이 아닐까?

  

주님 

저녁 하늘은 이제

맑게 텅 비어있습니다

이 편지의 시작과 끝에

당신의 이름을 써 넣습니다

                        - 장윤녕의‘그리스도’전문


상당한 압축과 생략으로, 주님과 맑게 텅 비어있는 저녁 하늘을 대비하면서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담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리스도를 따라 텅 비운 하늘처럼 맑게 살아온 생애의 저녁때,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그리스도로 채워진 생애를 감사하는 마음이 아닐까. “이 편지의 시작과 끝에/당신의 이름을 써 넣습니다”에서 편지의 내용이 분명하고 절실했으면 더욱 뜨거운 감동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리스도는 헬라어, 메시야는 히브리어이다. 제목을 ‘주님께’로 하면 편지글로서 더 어울릴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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