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대한독립만세

2016.12.11 09:47

최선호 조회 수:31

 

 

대한독립만세

 

 


  나의 유년시절은 대한민국 해방을 전후한 시기였다. 도회가 아닌 농촌에서 유년을 보내면서 새로운 문화나 문명의 혜택을 별로 보지 못했다. 눈만 뜨면 하늘과 땅, 산과 들, 논과 밭, 그리고 냇물이 내 성장환경의 전부였다. 어쩌다 동네에 자전거 한 대만 들어와도 줄을 지어 따라다닌 판이니, 내가 차를 탄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무슨 음악감상 같은 것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다. 그저 여름이면 알몸으로 방죽에 나가 멱감고, 고기잡고, 뱀이나 개구리를 대상으로 돌팔매질도 하고, 겨울이면 얼음판에서 팽이 치고 썰매 타는 일이 고작이었다. 겨울철을 제외한 봄, 여름, 가을엔 거의 맨발이었다. 나와 내 친구들이 모두 그랬다. 그래도 부끄럽다거나 불편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신발 한 켤레를 사 오셨다. 당시 유행하던 나막신이나 고무신이 아닌, 보다 훨씬 비싸고 예쁜 운동화였다. 검은 고무창에 검은 헝겊으로 만들어진 운동화 발등에 이름 석자를 써넣을 만한 크기의 하얀 부분이 직사각형으로 내 눈에 들어와 박혔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운동화를 내 앞에 썩 내놓으시며 "이거, 너 신어라"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운동화를 신고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방으로 깡총깡총 뛰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촉감만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 나만이 이렇게 좋은 운동화를 가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했다. 잘 때는 꼭 내 머리맡에 놓고 잤다. 며칠을 지켜보시던 아버지는 "사다 준 운동화를 밖에 나갈 때는 신지 않고 안에서만 신느냐"고 타일러 주셨다. 나는 도저히 운동화를 신고 흙을 밟을 수가 없었다. 흙이 묻으면 금방 더러워지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운동화를 신고 나가 놀다 오렴" 하셨다. 나는 용기를 냈다. 운동화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싸리비로 쓸어놓은 아침마당에 내 운동화 발자국이 찍혔다. 신기했다. 열 번, 백 번 운동화 자국을 만들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밖으로 뛰어 나갔다. 내 발에 신겨 있는 운동화를 친구들이 보아주었으면 싶어서였다.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도 신고 나갔다. 친구들과 논두렁길을 걸었다. 보드라운 흙이 밟히면서 운동화 밑창을 통해 발바닥으로 전달돼 오는 보드라운 느낌이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내 마음속에 소근거렸다. 그러는 순간 논두렁 한 옆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그만 미끄러져 그 자리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발이 논으로 빠져들었다. 운동화는 물론, 내 몸은 말이 아닌 흙투성이 그대로였다. 순간 하늘이 캄캄했다. 나는 운동화를 눈물과 함께 어머니 앞에 받쳐들었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어머니는 즉시 비누칠을 해서 운동화를 깨끗이 빨아 부뚜막 가마솥 옆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 운동화가 언제 다 마르나 싶어 불씨가 아직 남아 있는 아궁이에 넣었다. 한참 있다 보니 고무 타는 냄새가 집안을 진동시키는 게 아닌가! 운동화가 다 타버린 것이다. 아버지의 불호령을 받을 생각을 하니 몸이 저렸다. 그날 나는 밤잠을 설쳤다. 그 밤이 8.15 해방 전야였다.

 

  1945년 8월 15일, 아버지는 나에게 "새 옷 입고 새 운동화 신고 장에 가서 만세 부르자"고 하시면서 내 손에 태극기를 쥐어 주셨다. 그러나 발이 맨발인 나는 안절부절이었다. 그런데 새 운동화를 태운 나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가슴에는 광복의 기쁨이 가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금방 짚신을 삼아 내 발에 신겨 주셨다.

 

  졸래졸래 아버지를 따라 장으로 향했다. 시오리 길을 걸으면서 아버지는 나에게 '해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셨다. 새 운동화를 잃은 아쉬움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기쁨의 감격이 어린 나를 감싸주었다. 운동화 대신 짚신을 신은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수없이 외쳤다.

 

  지금도 광복절이 오면 내 가슴속에 새 운동화의 추억과 함께 짚신을 신고 외치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들려 온다. (1995.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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