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선물상자

2016.12.17 09:31

성민희 조회 수:8111

텅 빈 선물상자

 

 

  전화기에서 캐롤이 울려 나온다. 색색의 털옷을 입은  아이들이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서 메리크리스마스! 하며 손을 흔든다. 핸드폰으로 배달되어 크리스마스 카드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당신과 만나는 그 날을 기억할게요./ 헤어져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도/ 나에겐 아무 상관없어요./ 아직도 내 맘은 항상 그대 곁에/ 항상 언제까지라도 영원히/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당신과 만나는 그 날 기억할게요./

루돌프 사슴이 끄는 스키를 타고 하늘을 나르는 산타할아버지에게 손을 흔들며 부르는 아이들의 노래다. ‘내 맘은 항상 그대 곁이라는 표정에서 애틋한 마음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예수란 말이나, 아기 탄생이란 말은 한 번도 없다. 몇 번을 다시 돌려 보아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아기예수라고 생각했던 그대는 산타할아버지다. 아이들의 크리스마스는 우는 아이에게는 주지 않고 착한 아이에게만 주는 선물을 받는 날일뿐이다. 산타와의 만남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아이들의 노래를 듣자니 속이 텅 비어 휑한 선물 상자를 풀어보는 기분이 든다.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듣기 시작한 지가 꽤 오래되었다. 크리스마스 대신 헐리데이라는 말을 써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도 벌써 15년이 되었다. 아들의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PTSA(Parent Teacher Student Association)에서 활동을 했다. 내가 맡은 것은 학교 신문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크리스마스의 덜 뜬 분위기를 내고 싶어 산타가 트리 앞에서 HoHoHo. 하며 손을 흔드는 삽화 밑에다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라는 멘트를 예쁘게 넣었다. 며칠이 지나 교직원을 위해 베푼 식사 자리에서 학부모회장이 나를 보자마자 반색을 했다. 그리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인, 너가 만든 신문, 모두 참 좋아하는데... 다음에는 메리크리스마스 대신 해피할러데이라고 해 주면 좋겠어.” 나는 그 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순히 종교가 다른 몇 사람이 불평을 했나보다 했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학부모들의 항의에 교장과 회장이 곤욕을 치른 모양이었다. 타종교의 사람들 뿐 아니라 종교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긴 연휴를 예수탄생의 의미와 연결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후로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들어간 카드는 찾기 힘들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졌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타고 가던 낙타와 아기 예수가 누운 구유의 호롱불 대신 선물 상자와 크리스마스트리, 눈 덮힌 설경의 해피할러데이 카드일 뿐이었다.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생각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지만 사랑의 학교가 유독 기억난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베를린 교외의 한 가정에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미군들이 몰려들어왔다고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비록 적군이지만 그들을 위해 따뜻한 음식을 만들었다. 상을 차리기가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이번에는 독일군 패잔병들이었다. 두 무리의 군인들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주인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온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에 무기는 모두 내려졌다. 따뜻한 음식과 함께 얼어붙었던 마음도 녹아 캐럴을 함께 부르고, 가족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병사들은 집을 나서며 서로 아쉬운 포옹도 나누었다고 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 죄를 씻어주실 그 분이 평강의 왕으로 오신 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은 날이다. 온 인류를 축복하려고 주신 그 선물 보따리만 풀면 증오와 미움의 벽은 허물어지고 평화와 평강은 넘쳐날 텐데. 이 엄청난 하나님 선물의 의미가 세월이 가면서 잊혀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휘황찬란한 불을 밝힌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서 우리들은 아기예수가 빠진 텅 빈 선물 상자만 주고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핸드폰에서 아이들은 즐겁게 노래 부르는데.  모습이 오히려 공허하다. 어릴 적 교회에서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뜨겁게 부르던 아기 잘도 잔다아아... 노래가 그리워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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