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그렇다

2016.12.17 16:08

성민희 조회 수:493

어머니는. 그렇다

 

어머니 집에 가면/ 새실 한약방에서 얻은 달력이 있지/ 그림은 없고 음력까지 크게 적힌 달력이 있지/ 그 달력에는/ ‘반나잘혹은 한나잘이라고/ 삐뚤삐뚤 힘주어 기록되어 있지/ 빨강글씨라도 좀 쉬지 그려요/ 아직 까정은 날품 팔만 형께 쓰잘데기 없는 소리 허덜 말어라/칠순 바라보는 어머니 집에 가면/ 반나절과 한나절의 일당보다도/ 더 무기력한 내가 벽에 걸릴 때가 있지./ (박성우의 반나잘 혹은 한나잘전문)

시골집 낮은 처마와 툇마루 사이의 허연 벽. 빛바랜 가족사진 액자 하나가 방문 위에 동그마니 걸려있다. 큼지막한 글씨에 군데군데 태극마크가 빨간 숫자를 안고 있는 달력도 걸려있다. 시인은 고향집에 들어서며 어머니의 삐뚤삐뚤, 연필심에 침을 묻혀가며 쓴 글씨를 달력에서 본 모양이다. 어머니는 큰 숫자 아래에다 한나잘, 반나잘 일당 받고 일할 날들을 표시해 두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이건만 아직도 날품을 팔아야하는 형편이 시인은 마음 아프다.

머리에서 수건을 벗어 옷의 먼지를 탁탁 털어내는 어머니에게 시인은 퉁명스레 말한다. 그저 휴일만이라도 좀 쉬지 그려요. 어머니는 안다. 이 나이 되도록 무기력한 시간만 굴리고 있어서 죄송혀요. 죄송혀요... 하는 아들의 마음을. ‘아직 까정은 힘이 있응께 쓰잘데기 없는 소리 허덜 말어라어머니는 그렇게 아들을 위로한다.

37년 전. 내 부모님은 중학생 막내 동생을 데리고 이민을 오셨다. 해가 어스름한 저녁에 직장에서 돌아와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를 보며, 동생이 그랬다고 한다. “엄마, 지금 내 형편으론 엄마보고 일 하지 말란 말은 못하겠는데요... 일 조금씩만 하세요.” 이제 겨우 열 네 살 아들의 말이 환한 등불이 되어 그날 밤 내내 어머니의 마음을 밝혀 주었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도 그렇게 대답하셨을 거다. “집에 있으몬 뭐하노. 고마 재미 삼아 나간다아이가.”

몇 년에 겨우 한 번씩, 멀리서 세배하러 오는 막내 등을 쓰다듬으며 내 어머니는 지금도 그 때의 그 아들 때문에 눈물 나게 행복하다. 어머니는. 그렇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0 도대체 이기 무슨 짓이고? 성민희 2016.12.14 20
69 11월은 성민희 2016.12.17 17
68 귤 한 박스 쌀 한 포대 성민희 2016.12.17 45
67 나이야 물렀거라 성민희 2016.12.17 44
66 텅 빈 선물상자 성민희 2016.12.17 8111
65 서울 일지 / 구두를 수선 받다 성민희 2016.12.17 155
64 LPGA 시합을 보다 성민희 2016.12.17 8618
» 어머니는. 그렇다 성민희 2016.12.17 493
62 한 줄기 빛으로 성민희 2016.12.17 99
61 가든 파티와 드레스 코드(Dress Code) 성민희 2016.12.17 501
60 먹튀 자식 방지법 성민희 2016.12.17 7871
59 가난한 사람들 성민희 2016.12.18 8391
58 풋낯과 너나들이 성민희 2016.12.18 8155
57 I See You 성민희 2016.12.18 7766
56 복지복(福持福)대로 성민희 2016.12.19 125
55 어머니는. 그렇다. 성민희 2016.12.29 515
54 근검화순(勤儉和順) 친구야 성민희 2017.01.11 871
53 격랑을 잠 재울 용기 있는 언론인을 기대한다 성민희 2017.01.13 8388
52 그대에게는 등대가 있는가 성민희 2017.01.19 8686
51 죽기까지 이어지는 향기로운 인연 성민희 2017.01.21 7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