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을 잠 재울 용기 있는 언론인을 기대한다

 

 

성민희 / 재미수필가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로 일했다. 2학년이 시작된 어느 봄 날. 화가 잔뜩 난 친구들이 내게로 몰려왔다. 교육학 리포터 제출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참고해야 할 서적 중 한 권이 잠적해 버렸다고 했다. 사서 아가씨가 대출금지 도서를 친하게 지내는 학생에게 몰래 빌려준 것이었다. ‘눈부신 봄날 책도 나들이를 갔나?’ 나는 씩씩대며 신문에 짧은 글을 올렸다. 얼마 후, 사서 아가씨가 해고를 당했다고 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시는 남을 비방하거나 상처를 줄 글은 쓰지 않겠노라 후회와 자책으로 밤을 새우던 날이 꽤 오래 갔다.

 

  어줍잖은 나의 정의감에 한 사람의 인생행로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그때의 일이 아직도 나를 괴롭힐 때가 있다. 언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잔인한지 나는 잘 안다. 그러므로 요즈음 한국이나 미국 언론의 모습을 보면 무척 혼란스럽고 두렵다.

 

한국기자협회의 실천 요강에는 ‘기자의 제1 사명이 공정보도임을 명심하고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진실 보도를 위해 최선을 다 한다.’고 되어있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공정한 보도와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여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므로 절대로 확증을 갖지 않은 내용에 대한 추측 보도는 금물이다. 또한 ‘오보가 발생했을 때는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 가능한 빨리 이를 정정 보도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언론의 사명을 지키는 것이 기자의 자긍심과 자랑일 텐데 요즘의 언론인들은 가치를 어디에 두고 활동을 하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미국의 대선에서도 언론의 활약은 대단했다. 트럼프는 천하의 망나니 괴물로, 클린턴은 최고 엘리트 정치가로 부각시켰다. 트럼프는 자신의 선거유세장에서 카메라를 든 기자들에게 독설을 마구 퍼부었다. “나는 언론이 얼마나 부정직한 집단인지 압니다. 지금 저 카메라맨들은 이곳을 찍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여주기 싫으니까요. 아마 상부에서 이 엄청난 광경을 찍어오면 해고한다고 했을 겁니다. 더럽고 구역질나는 언론인들.” 그랬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트럼프의 유세장은 썰렁했고 클린턴의 연설에는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로 열기가 넘쳤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

당시의 워싱턴 포스트 여론조사는 대선후보 지지율에서 클린턴 51%, 트럼프 39%라고 떠들고, 각종 여론조사는 개표 전까지 클린턴이 평균 80~90%의 승률을 가졌다고 했다. 막강한 미디어의 힘을 등에 업은 클린턴은 227표 획득으로 304표를 거머쥔 트럼프에게 패배했다. 이 놀라운 결과에 ‘트럼프에게 대통령 당선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 사람들은 자신이 숨 쉬고 있는 미국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라며 미국과 러시아 관계 전문학자인 스티브 코헨은 한탄했다. 이후 텔레비전(Television)을 거짓말비젼(tell lie vision)이라고 부르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미국 언론은 1991년 라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경찰이 무죄선고를 받자 분노한 흑인들이 일으킨 폭동 사건을, 때마침 한인가게 주인 두순자씨와 다투다가 희생된 흑인소녀의 죽음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흑 인종갈등으로 몰고 갔다. 백인에 대한 분노를 한국인에게 쏟게 만든 어처구니없는 행위였다. 또한 1994년과 1995년에는 부인과 부인친구까지 살해한 O.J. 심슨 사건을 본질과는 상관도 없는 사생활을 파헤치며 시청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느라 심슨이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분주했다. 선정적이고 천박한 뉴스로 사람들을 도취시키는 것이 마치 그들의 의무인양 혈안이 되어 1년 내내 지겹도록 떠들어 사람들은 뉴스가 나오면 아예 꺼 버렸다. 그러나 그때에는 텔레비전과 신문 밖에 없어서 정신이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았다. 요즈음은 페이스북, 트위트, 링크드인, 구글플러스 등, 넷 워킹 사이트까지 등장하여 컴퓨터와 핸드폰 속을 하루 종일 기웃거리게 만드는 세상이다. 미디어가 우리의 생활을 온통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언론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싶다.

 

다행히 2011년, 언론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주는 일이 발생했다. 911 테러였다. 미국의 위신과 자존심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역사상 최악의 사건에 경악한 국민들은 그 배후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온통 뉴스에 집중했다. 진실에의 갈증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에 달래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에런 브라운, 톰 브로코와 피터 제닝스 같은 유명 언론인들이었다. 그들은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해설로 흉흉한 소문을 가라앉혀 주었다. 덕분에 국민은 정부를 원망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소요도 없이 성숙하게 그 위기를 잘 넘겼다.

 

요즈음 최순실로 인하여 박근혜 대통령까지 탄핵소추 된 사건을 보며 멀리 이국땅에 살고 있는데도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 격랑의 시기에 한국에도 미국처럼 혼란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선도하는 애국심과 용기가 있는 언론인들이 많이 나서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대구일보 칼럼 20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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