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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의 녹색지수 -김 열 규  

노년의 삶을 이끄는 힘


김 열 규 -1932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했다. 

서강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와 

30여년, 산과 바다를 벗삼아 노년을 즐기다가 2014년 월에 세상을 떠났다.


노년일수록 초록이 커져야 한다. 노인일수록 파래야 한다. 푸르다 못해 짙푸르러야 한다. 20-30 대는 원래 초록이라,

일부러 초록을 말할 필요가 없다.


노년은 둘레를 초록으로 갈무리하고 일상을 초록빛으로 무늬지게 해야 한다. 그래서 ‘새파란 노년’이게 해야 한다. 

그것은 노년의 인생철학에서 금과옥조가 된다. 내게 뜰일, 채소밭일, 꽃밭일 그리고 잔디밭일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내 노년의 녹색지수는 무한대이다. 봄날의 태산처럼 높고, 가을날의 푸른 하늘처럼 드높다.


몇 해 전, 그러니까 나이 70이 되던 해 봄에 집 옆의 채소밭을 개조했다. 밭의 모양새를 제법 고쳤으니 개조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말을 개혁이라고 해야 할까?


200평은 더 되는 밭 둘레에 디귿 자로 둑을 쌓아올리고는 관상수와 유실수를 심었다. 사이사이에는 꽃나무도 옮겨 심었다. 

그리고 밭 한 복판에는 작은 동산을 쌓고는 아주 잘생긴 단풍나무 한 그루를 심은 다음 허브로 둘러쳤다. 


그렇게 정원을 겸한 밭을 만들고 보니 여간 흡족하지 않았다. 경관도 좋고, 채소로 실속도 차리고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같은 밭일을 해도 꽃밭사이에서 하니 능율이 오를 것은 뻔하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날벼락이 떨어졌다. 면사무소에서 들어닥치더니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하는게 아닌가! 죄명은 농지 훼손죄였다. 채소밭에 당치도 않게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어서 채소밭을 망가뜨린 죄라고 했다.


“당신 할머니나 어머니가 울안에 채마밭을 가꾼 것도 못 보았소?”

나는 다짜고짜 이렇게 항의했다. 장기판으로 치면 “멍군’을 크게 외친 셈이다.


“당신네 채마밭에는 봉선화도, 분꽃도 심지 않았단 말이오? 그게 울 바깥이라면 생울타리도 있었을 거 아니오?”

그래도 그는 물러나지 않고 아까보다 더 심하게 ‘농지보호법’을 휘둘러댔다. 나는 나대로 더 강한 방패로 밀어붙여야 했다.


“이런걸 영국에서는 ‘키친 가든’이라고 부른다오. 부엌에서 요리할 채소를 기르는밭에 관상수도 함께 심고, 꽃도 함께 가꾸는 것, 

그게 바로 키친 가든이오.”


면사무소 직원은 외래어를 미쳐 못 알아들었는지 표정이 뜨악해졌다. 더 이상 ‘장군’ 소리를 하지 못하는 그에게 나는 ‘장군’을 불렀다.

“그래,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는 건 농사가 아니란 말이오?”


초록은 생명의 바탕색이다. 분홍, 빨강, 노랑, 자주, 파랑 . . .어느 색깔의 꽃이든 초록을 바탕으로 비로소 피어난다. 

그래서 초록은 꽃다운 생명의 모태이다.


지구 자체도 초록이다. 그리고 순연한 파랑이다. 산과 들의 초록과 바다의 푸름으로 지구는 자연스럽게 채색되어 있다. 

물의 파랑과 초목의 초록, 이 둘은 ‘지구의 양대 생명소’가 된다. 우리에게는 활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먹을거리의 태반은 초록이다. 곡식이 그렇고 채소가 그렇다.


동시에 초록은 평화이고 안식이다. 인간 정서의 안존함, 인간 감정의 안정이다. 잠도 깊어지면 푸른 숲을 닮을 것 같다. 

묵상도 초록으로 물들 때 비로소 명상의 경지에 드는 것 같다. 뇌신경의 안정과 활기를 동시에 살려내는 것이 초록이다. 

초록은 사람들의 안력(眼力)을 지탱해주고 시계(視界)를 넓혀주는 혜택도 준다. 초록을 자주 대하는 사람은 

그 좋은 시력에 힘입어서 세상을 보는 시계도 넓어지는게 아닐지.


내친 김에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지난해에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시력 검사를 했다.

“두 눈의 시력이 1.2, 1.5 라니요?”


눈을 크게 뜬 간호사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내 시력은 순전히 산에 안긴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둥지 덕택이다. 우리 집은 동서와 북은 산의 초록을 향하고, 남은 바다의 파랑을 향한다. 

늘 초록과 파랑을 바라본 덕분에 믿을 수 없는 시력을 갖게 된 것이 틀림없다.


영어 사전도 안경 없이 보는데!”

시력 좋은 노인네가 뻐기자.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시력 덕분에 나는 세상을 보는 시계는 몰라도 

주위의 사물만은 황조롱이 부럽지 않게 보아낸다. 


그렇기에 나무, 꽃 그리고 채소를 가꾸는 가드닝은 나의 시력을 위한 가드닝, 더 나아가서는 나의 목숨을 위한 가드닝이 될 것이다. 

가드닝은 다른 노년들에게도 절실한 일이다. 가드닝은 노년 자체를 파랗게 가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라의 녹색지수, 생활공간의 녹색지수를 선진국만큼 높여야 한다. 그러러면 노년들이 앞장서야 한다. 

그들의 여가가 큰 몫을 해낼테니 말이다. 그렇게 녹색지수를 높이면 노인의 생명이며 몸도 함께 싱그러워질 것이다.


아무튼 농지 훼손죄에서 별 탈 없이 벗어난 뒤 나의 가드닝은 한결 흥을 더해간다. 나의 노년은 그렇게 진초록으로 푸르러간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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