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무자비한 노동을

2018.01.04 08:37

성민희 조회 수:8492

[미주통신]사랑, 그 무자비한 노동을

“희생과 포기 없이 가질 수 없는 용서 나를 죽여야만 실천될 수 있는 사랑그 무자비한 노동이 올해 나의 소망 ”  2018.01.04

마지막 달력을 떼어내고 산뜻한 새 달력을 벽에 걸었다. 2017년 12개월 365일. 나와 함께 살았던 희(喜), 노(怒), 애(哀), 락(樂) 네 글자에 담긴 사연이 사라져 간다.  각각의 글자에서 수없이 뿜어져 나오는 기억. 기뻤던 일도 분노하던 일도, 슬펐던 일도 즐거웠던 일도 모두 다독이며 기억 저편으로 가라앉힌다.  

묵은 달력을 떼어낸다는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지난한 일상에 스톱워치를 켜는 일이다. 무한할 것만 같은 시간의 중간에 선을 긋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고마운 일인가. 질주하던 마음을 잠시 정지시키고 내 안 깊은 곳에 고인 것을 점검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 또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달력을 바꾸는 순간은 새로운 다짐으로 ‘마음의 새 아침’을 맞이하는 호홀지간(毫忽之間)이다.  

껍질을 벗지 못하는 뱀은 결국 자기 껍질에 갇혀서 죽는다고 했던가. 잘못된 습관과 그릇된 생각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타성에 젖은 삶을 재정비하는, 내 안의 영혼을 싱싱하게 소생시키는 시간이다.

올해는 무엇으로 ‘마음의 새 아침’을 깨울까 생각해본다.  내게 주어진 이 해도 언젠가는 또 다른 새해에 밀려 사라질 안개 같은 것.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릴 순간이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내어야 할 시간이고 나를 다듬고 닦아야 할 세월의 강줄기이기에 소홀히 흘려보낼 수는 없다.  2018년 새해의 소망을 나열해보니 내 가족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친구가 떠오르고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얼굴도 떠오른다. 이 한 해도 그들과 날줄과 씨줄로 인연을 엮으며 살아갈 일. 산다는 건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 한마당이구나 싶다. 

지난 10월 필라델피아에서 일어난 사건이 생각난다.  낯선 사람에게 베푼 작은 휴머니티가 큰 사랑의 불꽃을 피운 미담이다. 스무 일곱 살의 케이트는 밤길 운전 중 기름이 떨어져서 도로에 멈춰 서야 했다. 주유소를 찾기 위해 두려움을 떨치고 차 문을 열던 그녀는 경악했다. 갑자기 도로에 앉아 구걸을 하던 더러운 차림새의 노숙자 조니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조니는 멈칫하는 그녀의 차 문을 살며시 닫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 여기는 위험하니 차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앉아 있으라고. 그는 근처 주유소로 뛰어가더니 전 재산 20달러를 털어 기름을 사왔다. 지갑에 현금이 없었던 케이트는 고맙다는 인사만 남기고 그냥 떠나와야 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친절에 감동한 그녀는 노숙자의 삶에 시선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위한 온라인 모금 사이트를 개설하여 사연을 올렸다. 1만 달러만 모을 수 있다면 아파트를 렌트하고 싼 중고차를 사서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시작했는데 웬걸 엄청난 수의 사람이 동참하여 30만 달러가 넘는 돈이 모였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에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했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힘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게로 향하려는 양심이 있기에 사랑하는 일,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찾는 일이다.  그러기에 본능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이 어떤 경우에 어떤 방식으로 발휘되는가가 다를 뿐이다. 겨우 20달러가 동원된 작은 감동의 불씨가 사람의 가슴에서 거대한 사랑의 불꽃을 피워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인간의 이야기다.  그들은 서로 사랑할 이유도 사랑할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 행동은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노숙자의 막연한 인간애가 구체적인 ‘사람사랑’을 불러일으키고 기적을 일구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의 힘은 행동이며 활동이라고 했다. 어떤 연사가 양팔을 치켜들고 날리는 ‘사랑합니다’라는 멘트나 광고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랑한다는 말은 공상적인 사랑이라고 했다.  이것은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는 그저 느낌이나 감정일 뿐 너무나 추상적인, 귀찮으면 멈추면 되는 무미건조한 단어의 남발인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책임과 의무가 바탕이 되는 사랑,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하는 실천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불굴의 용기로 견뎌야 하는 중노동이다. 인간에게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한다. 내가 존재하기를 원한다면 무조건 사랑하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참 어렵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고통을 주는 사람을 증오하지 않고 보듬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렵다. 그를 사랑하려면 먼저 용서를 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사과 없이 용서를 하기는 쉽지 않다. 자기희생이나 포기 없이는 가질 수 없는 감정- 용서. 그것 없이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고 사랑도 할 수 없으니 관대함도 자비도 부족한 내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나를 죽여야만 실천될 수 있는 사랑. 그 무자비한 노동을 올해 내 소망의 대열 가운데 으뜸으로 세워볼까 생각 중이다. 

성민희 / 재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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