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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기억속의 영화 만보

2019.11.22 12:16

라만섭 조회 수:54

기억속의 영화 만보

오래전에 본 대부분의 영화는 잊어버리게 된다. 비교적 근래에 본 것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거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꽤 오래전에 보았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더러 있다. 그 작품이 간직하고 있는 고전적인 가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세월의 먼지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빛을 발한다.

 

내가 생전 처음으로 본 활동사진은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인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성생님에게 들키면 징계를 받는 위험을 무릎 쓰고, 집에서 훔친 동전을 가지고 몰래 영화관에 잠입하는 모험을 일삼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무라이 영화배우들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은 두근거렸고, 개봉 영화의 선전 문구는 나의 혼을 빼놓곤 하였다. 밤잠을 설칠 때도 부지기수, 사무라이 영화는 순진한 소년의 영웅심리에 불을 붙여 놓았던 것이다.

 

영화다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6.25 사변 당시 군복무중 육군 제5사단 본부소속 장교들을 위한 시사회에서 이었다. 인근 미군부대에서 빌려온 삼손과 딜라일라(Samson and Delila), 역마차(Stage Coach)등은 당시 유행했던 영화들이다. 휴가 중에 들어가 본 부산의 한 영화관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관객들로 꽉 차있었고 전쟁 분위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크게 놀랐던 적이 생각난다.

 

당시의 영화관은,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었다. 비밀 사교춤 모임이나 캬바레 같은 데도 있었지만, 그런 곳은 경찰의 단속에 쉽게 노출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영화관은, 일반 대중이 손쉽게 갈증을 해소하는 유일한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태리나 프랑스에서 만든 유럽 특유의 문화적 감각을 풍기는 영화가 더러 들어 왔지만, 돈의 힘을 앞세운 할리우드 양키문화의 거센 물결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한국영화에 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자괴감이 있다. 그래서 요즈음 한류 붐을 탄 한국 연예 작품의 국제시장에서의 활약상을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 드린다. 한국 영화사상 초유의 쾌거라고 하는 깐느 영화제 황금 종려상에 빛나는 블랙 코메디 영화 기생충, 참으로 자랑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한국의 유망한 감독이나 연기자의 꾸준한 활약을 기대하게 된다.

 

이웃나라 일본의 전설적인 감독 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작품들은 국제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라쇼몬(羅生門),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用心棒)같은 걸작들이다. Hollwood의 서부 영화‘Mannificent Seven'’A Fistful Dollars'크로사와 아키라‘7인의 사무라이요짐보를 많이 모방했다고 평론가들이 입을 모을 정도 이다. 알려진 바로는 Francis Copla(대부) George Lucas(스타워즈)같은 거인들도 평소 그를 흠모해 왔으며, 크로사와가 자금난으로 카게무샤(影武者)의 제작에 어려움을 겪자, 둘이 발 벗고 나서서 20세기 폭스사로 하여금 지원토록 도와 줬다는 후문이다. 카게무샤는 깐느 연화제의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다.

 

영화이야기를 하면서 헐리우드를 빼놓을 수는 없다. 1930년대 챨리챠플린의 무성 영화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오갔다. 억지로 한사람을 그 중에서 고르라면, 어렵시리 나는 엘리아 카잔(Elia Kazan)을 꼽겠다. 희랍계인 그가 1909년 터키에서 태어나 2003년 미국에서 사망할 때 까지 남기고 간 작품은 상당히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On the Water Front, Zapata, Street Car Names Desire, Death of Salesman, East of Eden, Splendor of Grass, Gentleman's Agreement등이 있다. 예리한 통찰력과 명석한 예지로 인간 심리를 그려내는 그의 탁월한 능력은 영화팬의 기억 속에 기리 남아있다. 그는 말론 브란도, 제임스딘, 그레고리펙과 같은 세기의 명우를 발탁하는 혜안도 보여줬다. 그는 2개의 오스카 작품상과 9개의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배출한 기록을 그는 남기고 있다.

 

하지만 맥카시즘의 선풍이 할리우드를 휩쓸던 1950년대, 그의 전력(예일 대학 출신인 그는 한때 공산주의 운동에 몸담은 적이 있음)이 문제가 되어, 하원 조사위에 불려나간 자리에서 그는 옛 동료 8명의 이름을 공개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이일로 인해 그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죽는 날까지 따라다녔다. 89세가 되던 1999년에 그는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을 받았지만, 이를 놓고 할리우드는 찬반 두 갈레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기억속의 영화에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단 한 번의 실수로 공든 탑이 맥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냉엄한 사실이다. 이는 비단 연예계뿐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똑같이 적용 되는 경험론적 인생 철학 임을 깨우치게 해준다. 20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