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진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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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노라의 변신

2019.12.17 22:07

전희진2 조회 수:95

노라의 변신

전희진

 

 

 

노라가 집을 나간 후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의 관심에 벗어나서 사회의 통념의 희생자인 그녀가 갈 곳은 사실 마땅치 않았다. 그녀 스스로 택한 길이기에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는 다른 삶을 살기로 굳게 결심한다.

 

노라는 세상의 끝이라고 일컫는 욕망의 전차를 타고 물어물어 학창 시절의 옛 친구 블랑시를 찾아온다. 뉴올리언스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 노라를 반긴다. 그녀의 부드러운 말투와 지적인 태도는 삭막한 도시 뉴올리언스를 단번에 바꾸어 놓을 듯하다.

 

 한참 포커판을 벌이느라 눈이 붉게 충혈된 스탠리와 미치는 잘못 방을 들어선 손님, 노라를 유심히 바라본다. 포커 카드를 쥔 그들의 손이 힘없이 풀어지고 있는 것을 탁자 위 호롱불이 유심히 비춰 준다.

 

블랑시가 기억하는 노라의 집은 상당한 재력을 바탕에 둔, 그녀의 남편은 부인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므로 누추한 곳으로의 노라의 출현은 일종의 미스터리였고 의외였던 것이다. 순진한 노총각인 미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였던 블랑시에게 아름답고 이지적인 학창 시절의 친구, 노라의 급작스런 출현은 그녀에게 위기감마저 주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상냥한 그녀의 존재는 사막이나 다름없었던 뉴올리언스에게 곧 새로운 활기와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부탁이라면 하잘것없는 것이라도 마을 사람들은 당장 들어 주었다,

새로운 정착지에서 그렇게 노라는 사람들의 신의와 사랑을 쌓아갔다. 무식하고 급한 성격의 스탠리마저 술 마시는 날이 현저히 줄어들고 술을 자제하니까 아내에 대한 손찌검 버릇도 하루가 다르게 차츰 나아졌다. 하루걸러 모여서 놀던 포커 놀이 대신에 사람들은 아침부터 거리에 나와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거리에는 술에 찌든 냄새 대신에 나무의 풋풋한 냄새가 들어서고 대패 소리와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종점에 위치한 곳에 아담하고 길쭉한 벽돌의 단층집이 세워졌다. 이름을 헤븐 온 힐 탑이라고 쓰인 목조 간판을 건물 입구의 회관에 못을 박았다.

노라는 건물 초입에 여성을 위한 상담 기구와 보호 센터를 두었다. 칸을 막아서 의자 몇 개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자그마한 간이침대 둘을 두었다. 탁아용 방도 들였다. 이것이 미국 최초의 여성 보호 센터가 되었는데, 이것은 곧 뉴올리언스의 자랑 되었고 자존심이 되었다.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솔선수범이 되어 매일 시간표를 짜서 서로 돌아가면서 아기들을 돌보았다.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이후 술에 찌든 병들은 도시가 차츰 건강하게 회복이 되었다. 5개월 후에 무료 교육센터가 세워졌다. 시기를 놓쳐 까막눈이 된 백인 아주머니 흑인 남성 여성들 노인들이 회원이 되고자 줄을 섰다. 알파벳을 따라 읽는 소리가 마을 입구 멀리서부터 들렸다. 여성 회원 중 뜨개질을 잘하는 유니스가 뜨개질 교실의 강의를 맡았다.

 

시카고를 경유해 뉴올리언스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인형의 집의 링크 박사가 우연히 그곳 카페에 들렸다가 웨이트리스로부터 노라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마을에서 유명인사가 된 그녀를 찾아간 링크 박사. 노라의 수수한 모습 때문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부신 활약상을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된다.

그는 그녀의 남편 헬메르에 관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한다. 노라가 집을 떠난 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헬메르가 그녀를 못 잊어 술로 의존하고 있으며 근래에는 은행장의 자리에서도 쫓겨났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인형의 집에 두고 온 어린 자녀 둘의 소식을 듣던 노라가 잠시 허공을 쏘아 보더니, 링크 박사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깨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녀가 사기꾼이며 거짓말쟁이, 범죄자였다니...... 아이들을 키울 권리를 줄 수 없어......” 그녀가 독백하듯 지난날 자신의 집을 나오기 전 헬메르가 한 말을 되뇌고 있다. 크로그스티드와 관련된 일 또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서명 위조의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링크 박사를 여기에서 보다니.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듯 이곳까지 왔다. 그 일이 있던 밤 내내 자신을 붙잡던 헬메르를 뿌리치고 아이들을 보모에게 맡기고 왔다.

자신 속에 활활 타는 어떤 집념 하나로 무작정 이곳에 짐을 풀었던 일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각나자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서렸다.

한편 지난 9년 동안 마음 한구석에 노라를 잊어본 적이 없는 링크 박사, 그였다. 그렇기에 자신의 친구이자 노라의 남편인 헬메르의 집을 하루도 빠짐없이 들리곤 했던 링크 박사다. 카페 의자에서 약간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그가 노라에게 약속을 한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 그녀의 사업을 돕기로 한다.

 

한편 술과 선정적인 행동의 블랑시에게 묘하게 이끌렸던 날 밤. 그녀와 달콤한 하룻밤을 보낸 이후 미치는 잠깐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하지만, 노모를 생각하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둘러싼 벨 리브 고향에서의 난잡한 그녀의 사생활의 소문은 귀로 흘려버릴 일만은 아니었다.

블랑시의 집요한 구애에도 미치는 노라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노라를 따라다니며 헌신적으로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 준다.

지금까지 블랑시가 점찍은 남자가 그녀에게 안 넘어오는 법은 없었다. 근육질인 스탠리보단 못하지만 구릿빛 몸매에 탄탄한 직업을 가진 미치가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자신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그녀 친구 노라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날 저녁 블랑시는 노라를 자신의 새 아파트에 초대하였다. 자신의 여동생인 스텔라의 30세의 생일 파티였다. 6인용 식탁엔 스텔라와 스탠리가 함께 앉고 미치와 블랑시가 파트너처럼 옆에 나란히 그리고 노라가 혼자 앉았다.

블랑시의 얼굴이 식탁 조명을 받아 일그러져 보여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미치는 수줍음 때문에 얼굴을 안절부절못하고 자꾸 식탁 위로 떨어뜨렸다. 덧없이 블랑시가 약혼녀라며 미치의 팔을 자기 몸의 일부처럼 부드럽게 감았다. 동생 스텔라가 생일 촛불을 막 끄고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블랑시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미스터리하게 생각하는 노라에 관한 소문이라며, 부디 사실이 아니길 빈다는 서두와 함께 그녀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노라는 사실상 범죄자의 신분이며 이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맨몸으로 오밤중에 집에서 쫓아낸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노라는 한 마디 변명도 없이 그리고 아무 동요도 없이 천천히 마저 식사를 끝내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생일 파티치곤 예전과 같지 않게 시끌벅적하지 않은 채로 끝나서 서운한 채로 사람들은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다음 날 뉴올리언스 마을에 퍼진 소문은 노라가 아닌 블랑시의 소문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은 블랑시가 옛날 고등학교 시절에 다섯 살 위의 남자 선생님을 좋아하여 따라다니다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 파문은 일파만파로 커져 그 남자 선생은 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라가 마을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이 일이 있고 난 지 서너 달 후쯤의 일이었다.

역사상 몇 십 년 만에 뉴올리언스에 눈이 내렸다. 간밤에 20센티 넘게 온 폭설을 치우려고 어른들은 너도 나도 부산하게 움직였으며, 아이들은 눈싸움과 썰매를 타느라고 종일 바빴다. 그 틈에도 마을 사람들은 부산하게 회관을 들락거렸으며 건물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뜨개질을 배우는 사람 또 글을 배우는 사람으로 붐볐다. 뉴올리언스는 삭막하던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벗고 생기발랄한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아무도 소문 같은 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비슷한 시기에 사라진 미치의 종적 또한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아무도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만약 입센의 인형의 집의 주인공인 노라가 집을 나온 이후,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속의 삶으로 들어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미국 남부 특유의 사투리를 쓰는 흑인들이 신들린 솜씨로 재즈를 연주하는 곳, 뉴올리언스에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면 그녀는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하는 것이 나의 궁금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