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수필 - 빗님 오시는 날

2020.03.13 08:56

서경 조회 수:70

빗님 오시는 날.jpg

빗님 오시는 2.jpg



떠나는 겨울비인가, 돌아오는 봄비인가.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거리를 촉촉이 적신다.
차들은 서행을 하고 사람들은 느림의 미학을 배운다.
바쁘게 스치던 풍경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 온다.
91.5 FM 음악을 튼다.
광고 없이 듣는 클래식 음악이 좋다.
차 안은 나 혼자 즐기는 고즈녁한 음악 다실이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빗줄기가 굵어지고 수량도 많아졌다.
갓길로 달리던 앞차가 파도만한 물줄기를 차창에 뿌리고 달아나 깜짝 놀랐다.
조심조심.
앞차도 옆차도 다 조심해야 한다.
물이 흥건히 고인 갓길을 피해 중앙선 쪽으로 옮긴다.  
더 이상 물벼락 맞을 일은 없겠다.
잠시 놀란 가슴이 다시 평온을 찾고 무념무상으로 빠져든다.

그 평온함을 뚫고, 생각은 새장을 빠져나가는 파랑새처럼 멀리 달아났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유영하는 사념의 물고기.
잊혔던 이름도 떠오르고, 잊고 살던 얼굴도 영화 속 장면처럼 왔다가 사라진다.
젖은 거리 위로 앞 차량이 뿌리고 가는 빛줄기가 아름답다.
가로등 불빛과 빗물은 공동 수채화로 거리를 아름답게 채색한다.
차창엔 빗방울이 맺혔다가 바람에 흩어진다.
평온한 마음, 아름다운 거리.
더 바랄 게 무어람.
이런 날엔 그저 평화와 고요를 즐길 뿐.
허형만 시인의 ‘가벼운 빗방울’이 떠오른다.   
 
-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매달릴 수가 없지
  가벼워야 무거움을 뿌리치고
  무거움 속내의 처절함도 훌훌 털고
  저렇게 매달릴 수 있지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나뭇잎에 매달리고
  그래도 매달릴 곳 없으면 허공에라도 매달리지
  이 몸도 수 만리 마음 밖에서
  터지는 우레 소리에 매달렸으므로
  앉아서 매달리고 서서 매달리고
  무거운 무게만큼 쉴 수 없었던 한 생애가 아득하지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문장이 될 수 없지

  그래서 빗방울은 아득히 사무치는 문장이지 
 
빗방울처럼 우리도 가벼운 존재일까.
아니면, 생각이 들어 차 무거운 존재일까.
여기 매달리고 저기 매달리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는 사이 인생의 절반도 훌쩍 지나 버렸다.
함께 떨어지는 두 빗방울처럼, 어떤 만남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지.
또 어떤 만남은 비누방울처럼 가볍고 경쾌했었지.
바람이 수분을 말려주듯, 세월은 물기를 말려 주고 가끔은 하회탈 웃음도 되돌려 주곤 했지.
웃는 듯 우는, 우는 듯 웃는 표정 속에 세월은 또 저만치 앞서 가겠지.
빗님은 참았던 울음보를 터뜨린 아이처럼 오늘밤도 계속 오실 모양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빗님은 밤새 내 간장을 녹이시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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