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첫 번 째 부르심

2020.07.13 10:17

서경 조회 수:48

첫 번 째 부르심.jpg


내가 살아오는 동안 주님은 여러 번  나를 부르셨다.
사람을 통해 부르기도 했고 어떤 현상을 통해 부르기도 했다.
나는 첫번 째 부르심을 똑똑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다.
학교를 갔다 왔으니 그 날은 분명 수요일이다.
가방을 던져놓고 난 집 앞에서 친구들이랑 고무줄 뛰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행인이 걸음을 멈추고  우리랑 키를 맞춘 뒤 물어 왔다.
“너희들 나 따라 교회 가지 않을래?”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는 어깨까지 오는 진갈색 웨이브 머리카락에 눈빛도 깊은 다갈색을  띠고 있었다.
목소리가 얼마나 다정다감한지 마치 천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목소리 같았다.
그녀의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잠깐만요! 어머니께 가도 좋은지 여쭈어 볼게요!”
그냥 가 버릴까 봐, 마음이 조급해 허둥댔다.
다행히 평생 불교 신자인 어머닌 교회 가면 좋은 거 많이 배운다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나는 고무줄을 ‘버리고’ 아가씨를 따라 갔다.
그것이 내 신앙의 긴 여정에 있어 첫걸음이었고 주님을 뵈온 첫만남이었다.
베드로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처럼 나도 그 분을 따라 갔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 말을 귓등으로 흘러 버리고 고무줄 뛰기에 열중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물론, 주님은 예비하시는 분이니 ‘By His Plan, In His Time’에 나를 또다시 불러 주셨겠지.
부름에 응답하는 것도 우리의 소명이라 생각된다.
내가 아가씨라고 지칭한 그 사람은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이셨다.
예수 성심 성화를 처음 보았을 때, 따뜻한 눈빛이지만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깊은 눈매를 보고 마음에 강한 파동을 느꼈다.
연이어, 아주 오래 전 내가 만났던 한 눈빛을 떠올렸다.
바로, 나를 주님께로 인도해 주신 그 반사 선생님의 눈빛이었다.
그 분 성함은 잊었지만, 예수 성심 성화를 닮은 그 분의 모습은 가슴 속 판화처럼 깊이 새겨져 있다.
웨이브진 진갈색 머리카락이 어깨선에서 찰랑이던 모습하며 우리와 눈맞춤하던 그 따스하고 깊은 눈매를 .....
혹, 예수님이 그 분 형상으로 오신 건 아니었을까.
첫번 째 부르심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두 영상이 겹쳐 떠오른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베드로와 신마산 댓거리에서 고무줄을 버리고 반사 선생님을 따라 나선 나.
그리고 예수 성심 성화의 깊은 눈매와 키를 낮추어 우리에게 다정하게 묻던 그 반사 선생님의 다갈색 눈빛.
잊을 수 없는 두 영상이다.
장로교 고신파 교회 출신으로 주일 예배는 물론, 수요 예배도 빠진 적 없던 나는 서른 살 되던 해에 외국 신부님과 함께 일하며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믿고 따르는 주님은 오직 한 분 뿐 다를 수가 없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든, 하늘에 계신 분으로 ‘하느님’이든 내겐 무소부재하신 한 분 주님일 따름이다.
마치, 내가 희선이고 요안나이고 Sunny이듯이 내 정체성엔 변함이 없는 것과도 같다.
I am I.
그 분도 나도 똑 같이  ‘l am I’다.
나는 그 분이 앉혀주는 자리는 늘 뜻이 있어 앉혀 주신다고 믿는다.
‘... 우리 비록 유명한 인명록에 끼일 순 없으나/ 주님께서 앉혀주신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어서 선한 일을 해 보오...’
<그대 있는 모퉁이에서 불을 밝히오>에 나오는 이 싯귀를 신탁처럼 모시고 산 지 오래다.
나는 신앙적 열정을 기독교 교회에서 배웠고, 깊은 내적 신앙의 기쁨을 가톨릭 성당에서 배웠다.
미사 시작할 때마다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 뿌듯한 기분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내가 성당 안에 앉아 있는 게 그렇게 기쁘고 자랑스러울 수 없다.
신부님과 신자가 계,응으로 주고 받는 미사 통상문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 아름답고 귀하게 들린다.
성찬의 예식이 시작되면, 마치 ‘최후의 만찬’에 초대된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양 숙연해지고 2000년 전 그 자리에 내가 같이 앉아 있는 환상에 잡힌다.
이 엄숙한 예식에 어찌 잡담을 하고 덥다고 주보로 부채질할 수 있겠는가.
난 제대를 응시하며 이 시간 온전히 날 봉헌한다.
미사에 초대되고 능동적 신자로서 응답한 자가 받는 맛이요 청복이다.
첫번 째 부르심을 떠올릴 때도 나는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는 기분을 똑같이 느낀다.
별처럼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그때 그 시간에 내가 발견되어 초대 받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은총 중에 대은총이다.
살았으면 구십이 넘었을 호호 할머니지만, 반사 선생님은 언제나 내게 이십 대 초반의 아가씨 모습으로 기억된다.
60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그 분과의 아름다운 만남을 글로 남긴다.
너무 늦었고 많이 송구스럽다.
하지만,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다는 말씀처럼 모든 게 다 때가 있나 보다.
내 삶을 돌아 보면, 아름다운 사람을 참 많이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증거하고 써야할 아름다운 만남이 많이 남아 있다.
이것도 은총 중의 은총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만남의 대상으로 기억 되면 좋겠다.
어젯밤, 나의 기분은 울적하고 좀 의기소침했었다.
새벽 새소리를 듣고 맑은 정신을 되찾았다.
‘신앙이 답이다!’란 내면의 소리가 들려 왔고, 연이어 주님의 첫번 째 부르심이 떠올랐다.
글 쓰는 동안, 풍랑 일던 내 마음이 선함과 평온함으로 잔잔해졌다.  
대단한 문학적 기량을 쌓기 위해 글쓰기 보다, 요즘은 내 생활의 기록으로 글을 쓴다.
나의 분신과 가족과 정인들을 위해 담담히 쓰는 내 글이 무어 그리 대수일까마는 언젠가 ‘신앙 에세이’ 한 권은 주님께 선물로 바치고 싶다.
그동안 내가 받은 은총에 비해 돌려드린 게 너무 없다는 자각을 했다.
나의 글쓰기는 그 한 권의 증언집을 위한 습작 과정이다.
나에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붙여 주신 것도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의 배려가 아닌가 싶다.
홀로 서기에 약한 나.
이별에 터무니 없이 면역성이 약한 나.
앞으로도 얼마나 더 아름다운 만남을 예비해 두고 계실지 자못 기대된다.
물론,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내 귀도 쫑긋거리고 있어야겠지.
예수 성심 성화를 깊이 들여다 본다.
예수님도 나를 보고 나도 예수님을 본다.
두 눈빛이 합일된다.
주일 반사 선생님의 늙지 않은 눈빛도 함께 출렁인다.
세 눈빛이 만나 하나를 이루니 삼위일체를 닮아 있다.
감사!
감사 또 감사!!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고, 그 사랑 나누어 주기 위해 나 아직 여기에 살아 있다!
내 삶이 흔들릴 때마다 나를 잡아주신 첫번 째 부르심!
그 첫번 째 부르심과 예수 성심 성화를 닮은 선생님의 웨이브진 진갈색 머리카락과 깊은 눈빛을 나는 잊지 않으리.
영원히......     (2020. 예수 성심 유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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