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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소설 / 칼럼 명기(明氣)

2020.07.29 17:46

이산해 조회 수: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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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공지능(AI)생산업체 IP소프트 사가 개발한 화이트 칼라 사무요원 블론디 "어밀리아" (구글 사진 캡처)


오후 2

여의도 경찰서 강력계에 화급(火急)을 요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교환을 통한 전화는 강력계 소속 베테랑 여()형사인 진달래 형사에게 연결됐다.

강력계 진달래 형사예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버튼식 송수화기 저편에서 말했다.

형사님이신가요?”

님이라 할 것까지는 없고요….아무튼 형사예요.”

상대의 톤이 한층 고조됐다.

형사님, 사람이 죽었어요. 저의 아버지가 죽었다구요!”

진형사가 말했다.

진정하세요. 그리고 우선 집주소를 정확하게 말해줘요.”


상대는 진정이 안된 상태인지 말을 더듬고 있었다.

진형사는 우왕좌왕하는 상대에게 타이르듯 컴다운하라고 종용했다.

상대는 끝내 마음을 가다듬고 떨리는 목소리로 주소를 가리켰다.

순간, 진형사 곁에서 대화 내용을 엿듣고 있던 신출내기 파트너 형사가 데스크 탑 컴퓨터 자판기로 구글 맵 주소를 입력해 나갔다.

지대한 박사 

사건 현장은 여의도 부촌 지역에 위치한 대저택이었다.

화강암으로 축조한 저택 입구에는 디지털 CCTV와 고화질 모니터가 부착돼 있었다.

진형사가 모니터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서 상대가 나왔다.

상대는 잔뜩 경직돼 있었다.

진형사가 모니터 화면에 비춘 상대를 향해 말했다.

경찰이예요

상대의 안내를 받고 거실로 들어선 진형사는 동료 파트너와 동행한 감식계 요원들에게 수사 진행 순서를 지시한 뒤 시신 곁으로 다가섰다.

        

시신은 남자였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였다.

흰색 가운을 걸친 곱슬머리 법의학 감식계 닥터와 요원들이 시신을 둘러싼 채 재빠르게 플라스틱 고무장갑을 착용하고 시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진형사는 감식계 요원들의 몸놀림을 곁눈질한 뒤 이내 발걸음을 돌려 목격자에게 다가갔다.

 

가죽 소파에 쭈그리고 앉은 목격자는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여자였다.

진형사가 형사 뱃지를 여자에게 들이대며 말했다.

사망한 이와 어떤 관계죠?”

여자가 말했다.

저의 아버지이구요, 저는 막내 딸이예요

아버지 이름은?”

지대한 박사예요.”

 

여자가 강조한 박사라는 호칭에 호기심이 발동한 진형사가 청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삼성 갤럭시 스마트 폰을 꺼내 화면을 쓸어 올리고 구글을 열었다.

그리고 날렵한 손놀림으로 지대한 박사를 입력했다.

화면에 망자(亡者)의 다양한 이력이 거창하게 소개됐다.

세계적인 심리학 박사 / 신문 방송 칼럼니스트 / 종합일간지 정론직필 고정 패널 등등

 

망자가 워낙 유명한 인물이었기에 그제서야 진형사도 시신에게 관심이 증폭됐다.

스마트 폰에서 시선을 거둔 진형사가 여자에게 물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한 시간이 언제죠?’

여자가 답했다.  

형사님과 통화하기 직전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마 오후 2시께였을거예요.”

아버지와 함께 이 집에서 기거하나요?”

아뇨. 저는 출가해서 따로 살아요.”

그렇다면 아버지 집에는 어찌 오게 됐나요?”

오늘 2시에 아버지와 함께 외출을 하기로 약속을 했거든요.제 딸인 손녀를 보고싶다고도 하셨고요. 해서, 저는 남편을 출근 시키고 나서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외출 준비를 끝냈어요. 그러고는 1시 반쯤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넣었죠. 헌데, 계속 전화를 받지 않으셨어요. 음성메세지만 반복되더라고요. 한번도 이런 일이 없으신 분인데…..무슨 일일까 의아해 하면서 아버지 집으로 차를 몰았어요. 그리고 집에 들어서자 이런 모습이 펼쳐진 거예요.”

진형사가 말했다.

집 대문은 누가 열어줬나요?”

저의 가족은 아버지를 비롯해서 12녀가 한 가족 이예요. 어머니는 1년 전에 사별했죠. 가족 모두가 아버지 집의 대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요. 때문에 가족들은 자유롭게 아버지 집을 드나들 수 있어요.”

 

목격자의 설명을 귀담은 진형사는 다각도로 질문을 퍼붓고 그에 따른 진술을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모두 수첩에 옮겨 적었다.


목격자가 진술한 다양한 내용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진형사는 발걸음을 옮겨 다시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시신을 둘러싼 법의학 팀 소속 감식계요원들은 이잡듯 시신의 몸 구석구석을 관찰하며 분주하게 감식을 하고 있었다.

진형사가 곱술머리에게 물었다.

사인을 대충 유추할 수 있어요?”

곱술머리가 답했다.

지금 당장 정확히는 진단할 수 없습니다만, 타살 흔적은 찾을 수 가 없군요. 외상(外傷)이 전혀 없습니다.”

진형사가 말했다.

제가 보기에도 겉 모습은 멀쩡하네요.”

그렇습니다. 흔히 타살의 경우 목을 졸림하거나 흉기로 찔리거나 또는 주먹 등으로 타격을 당한 흔적이 확연한데, 이 시신의 경우는 외상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단서는 발견했습니다.”

뭐죠?”

시신의 페니스에서 정액이 검출됐습니다.”

순간, 진형사가 토끼눈으로 말했다.

정액이라고요?”

곱술머리가 진형사를 비릿한 시선으로 곁눈질 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패니스의 귀두(龜頭)주변에 소량의 정액이 묻어있는 것이 검출됐습니다.”

진형사가 목소리의 끝을 올리며 말했다.

정액이 망자의 것인가요?”

아직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채취한 물증을 연구원으로 가져가 정밀 분석을 해야 비로소 정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시신으로 변한 지대한 박사의 초동 수사는 정밀 감식과 주변 정황 탐문을 끝으로 잠정 종식됐다.

그리고 다음 날.

 

변사체(變死體)로 발견된 지대한 박사의 주검은 대한민국 언론을 대표하는 종합일간지 정론직필의 특종으로 세간(世間)에 알려졌다.

조간(朝刊)기사를 접한 독자들은 지박사의 주검을 놀라운 기색으로 접하고 다양한 댓글을 달았다.

특히 지박사의 주검이 나신(裸身)형태로 밝혀지자 시정(市井)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벼라 별 구설(口舌)을 들이대며 가짜뉴스를 마구 살포했다.


명기(明氣)

천재인(天才人)박사가 창조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로봇 시연회(試演會)장은 관객들로 넘쳐났다.

1천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임에도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시연회는 예측을 뛰어넘는 대 성황이었다.


이처럼 수많은 관객들이 시연회에 참석한 정황은 이랬다.

천박사가 인간과 감수성(感受性)이 똑같은 여성 젠더 로봇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기 때문 였다.

 

천박사 곁에 다소곳이 서 있는 AI의 외모는 절세가인(絶世佳人)이었다.

빼어난 미모의 여자 탤런트 XXX양과 또 다른 미녀 XXX를 혼합한 듯한 형상(形相)이었다.

몸매 또한 초절정 맵시였다

단단하고 풍만한 젖가슴과 조각같은 손과 팔다리, 그리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육감적인 엉덩이 등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여자로서는 비교적 장신인 178센티미터의 AI은 이름이 ‘명기(明氣)’였다.


이날 시연회에 모습을 드러낸 명기는 캐주얼 차림새 였다.

리바이스 301 청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걸친 명기는 신발 역시 여성용 뉴 밸런스 575를 신고 있었다.

손목에는 아르메니아 제품 전자 시계를 착용 했고 청바지 뒷 주머니에는 삼성 갤럭시 스마트 폰이 들어 있었다.

 

명기는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관객들에게 응대했다.

관객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자신을 향해 호기심과 의구심(疑懼心)마저 드러냈지만 명기는 이를 개의치 않고 친절하게 대했다.

관객 가운데 어느 짓궂은 사내가 손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훔치자 명기는 침착하게 사내를 타이르며 말했다.

“느낌이 다른가요?

이처럼 명기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AI였다.

 

천재인 박사의 명기 시연회에는 국내 언론 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도 대거 관심을 표명했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LA 타임스와 CNN, 월스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그리고 프랑스의 르몽드와 영국의 타임  매거진이 자리했다.

극동에서는 대한민국의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과 한경오(한겨례/경향신문/오마이 뉴스), 중국의 명보, 일본을 대표하는 언론 요미우리가 취재 경쟁에 나섰다.

특히 이들 가운데 눈길을 끈 것은 대한민국 언론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선점한 종합일간지 정론직필의 활약이었다.

정론직필은 이날 천재인박사와의 인터뷰에서 여타 언론들이 간과한 대목을 예리하게 따져 물으며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곽정환 대기자(大記者)는 이 날 천재인 박사를 향해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먼 훗날 인간과 AI가 합일체(合一體)가 돼 아이를 생산하면 그를 인간으로 다룰 것인가, 아니면 로봇으로 취급할 것인가 

 

언론들은 명기에 대해 한결같이 ‘신의 영감을 빌어 인간이 빚은 제2의 이브’라며 천재인 박사의 재능을 한껏 추켜 세웠다.

이 날 시연회에서 명기는 실제 인간 여성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의 행동을 가감없이 보여줬다.

 

명기는 임신과 출산(出産)만 하지 못할 뿐 그 밖에 여성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명기는 여성의 악기(樂器)인 음핵(陰核)과 핫 스팟(G-spot)도 지녔다.

따라서 여느 여성처럼 느끼고 희열했다.

 

박사 천재인은 관객과 언론에게 이같은 사실을 영상 자료를 통해 자세히 설명한 뒤 반세기 뒤에는 명기와 같은 AI도 임신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천박사의 이같은 견해를 청취한 관객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언론은 천박사의 예언을 급보(急報)로 타전, 독자들의 호기심을 한껏 부추겼.

바디칸에선 천재인 박사의 발언을 신을 모독한 처사라며 불쾌함과 함께 유감을 표명했.


명기의 유명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세계적인 인명 사전인 위키피디아 편집진은 명기를 어느 그룹(gender)에 표기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을 벌였다.

또 한 검색엔진 구글과 네이버 등 국제적인 포털 운용사에서도 명기를 과연 어떤 부류(部類)로 구분해야 하는가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이들 웹 포털 기업들은 숙고(熟考)끝에 명기를 ‘반인반광(半人半光)’류()’로 규정키로 잠정 합의하고 통칭(通稱)은 명기로 입을 모았다.     


인공지능 이대로 좋은가

한편 세계적인 사회학자이자 심리학의 권위자인 지대한 박사는 종합 일간지 정론직필이 개최한 토론회에 패널 자격으로 초청됐다.

토론회의 타이틀은 인공지능 이대로 좋은가였다.


이날 토론회에는 인간의 영역을 넘나드는 챗봇(Chatbot)명기(明氣)를 탄생시킨 천재인 박사도 자리했다.

사회는 예리한 시사평론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신중권이 마이크로 폰을 잡았다.

담당 프로듀서가 사회자를 향해 방송 시작을 알리자 신중권이 기다렸다는 듯 지대한 박사에게 질문했다.

지구별 전체를 들끓게 한 명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 박사가 답했다.

한마디로 명기는 재앙이오. 그리고 그녀를 만든 천재인 박사 역시 재앙입니다.”

사회자가 말했다.

재앙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인간이 펀리함을 위해 만든 인공지능 로봇이 끝내는 인간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에 재앙이라 한거요.”

사회자가 말했다.

너무 나간 비약적인 예단(豫斷)아닌가요?”

천만에! 시회자께서도 아시다시피 인공지능 AI는 바둑을 통해 이미 가공할 파괴력을 보였소. 지난 20163월 이세돌과 맞붙어 41패의 전적을 기록한 알파고의 저력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외다. 구글이 만든 알파고는 인간의 영명(英明)함을 뛰어 넘어 신의 영역까지 넘보는 가공할 신기술이오.. 이럴진데, 그 누가 AI를 우습게 여기는가. 뿐만 아니 올시다. 지난 2014, 뉴욕 맨해튼에 본사를 둔 인공지능 개발업체 IP소프트웨어에서 만든 금발의 인공지능 미녀 어밀리아는 천박사가 만든 명기처럼 여성의 기능을 대부분 응용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소. 이들 AI들은 갈수록 진화해 수세기 후에는 인간을 노예로 부려먹는 시대로 도래할 것이오. 사회자께서도 생각해 보시오. 끔찍하지 않은가! 따라서 천재인 박사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 더 나아가 상업적 측면에서도 크나큰 범죄를 저질렀소. 그의 죄는 결코 지옥에서도 상쇄되지 않을 것이오.”

독설가로 정평이 나 있는 지박사는 특히 천재인 박사와는 견지간(犬猿之間)처럼 철저한 앙숙 관계 였다.

지박사가 천박사와 척()을 진 이유는 광학문명과 관련된 상반된 견해 때문이었다.

개신교 장로이자 지극히 종교적인 지대한 박사가 무신론자인 천재인 박사의 광학문명 신봉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며 신랄 인신공격도 마다한 것이 앙숙 관계의 발단이었다.

그동안 박사는 수 차례에 걸쳐 방송과 신문 지면을 통해 치열한 설전을 펼쳤다.

때마다 이들은 목과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서로를 헐뜯으며 으르렁거리기 일쑤였다.

방송과 신문은 이들이 삿대질을 하며 침을 튀길 수록 쾌재를 불렀.

왜냐?

두 박사가 침을 튀기며 격론을 펼칠 때마다 최고의 청취율을 보였기 때문.

하여 언론은 걸핏하면 두 패널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줄겁게 해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갑론을박도 그리 길지 않았다.

대한 박사의 지나친 언변에 피로감을 느낀 천재인 박사가 더 이상 토론에서 맞붙지 않았기 때문 였.

언론에서는 돌아선 천재인 박사를 집요하게 달랬지만 허사였다.

언론 초유의 출연료도 거부했다.

지박사가 출연하는 현장에는 손사례를 치며 등을 돌렸.

따라서 방송과 신문 지면에서는 더 이상 두 사람의 불꽃 튀기는 언쟁(言爭)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 청취자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2022년 어느 날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종합일간지 정론직필 광고난에 3단 광고 문구가 실렸다.

'성실하고 착한 젊은 가사 도우미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음식을 잘할 경우 급료를 배가해 지불하겠다 점도 강조했다.

연락처는 xx44-77XX였다.


사흘 뒤.

값비싼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치장한 대저택 출입문 입구에서

젊은 여성이 디지털 CCTV 모니터의 버튼을 눌렀다.

수십초 후, CCTV 스피커 폰에서 목소리가 말했.

“누구신가요?

여자가 말했다.

“가사 도우미를 구한다 해서 왔어요.

순간, 집 안 거실에서 CCTV 화면을 들여다 본 목소리가 화들짝 놀라며 출입문을 열었다.

세상에라….

천하미색의 젊은 여자가 가사 도우미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흥분한 탓에 맨말로 마중을 나간 목소리는 눈 앞에 선 가사 도우미를

넋나간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목소리는 여자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무엇을 드시겠소?

여자가 대답했다.

“생수로 하겠어요.

목소리는 냉장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여자를 곁눈질 했다.

보고 또보아도 절색(絶色)이었다.

 

패트 병에 담긴 생수를 크리스탈 유리잔에 채운 뒤 자리로 가져온 목소리는 생수를 여자에게 디밀며 말했다.

“실례가 안된다면 몇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소?

여자가 말했다.

“물론이예요.

“어느 지역 태생이신가?

“강원도 춘천이예요.

“춘천이라…아름다운 고장 출신이구려.부모님들은 계시고?

“부친께서 생존해 계세요.

“형제들은?

“오빠 한분과 언니 두 분이십니다.


목소리는 이즈음에서 자신 앞에 놓인 녹차를 한모금 마시며 여자를 훔쳤.     

다소곳한 자세로 앉은 투피스 정장 차림의 여자는 한치의 흩뜨러짐 없었다.

 

얼굴 양볼에 은근하게 드리운 알듯 모를듯한 미소는 모나리자의 그것처럼 환상적 이었다.

조각처럼 균형잡힌 몸매는 우아함과 건강미를 더했다.

잡티 한 점 없는 깔끔하고 매끈한 피부도 일품이었다.

 

여자의 이모조모를 재빠르게 스캔한 목소리가 말했.

“공부는 어디까지 하셨소?

여자가 말했다.

“쓰고 대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예요.

목소리가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호, 젊은 아가씨가 선문답(禪問答)도 할 줄 아시는구먼.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급여는 얼마를 원하오?

“일한 만큼 받겠어요.

“성격 시원시원 하구먼. 좋소. 좋아요. 그럼 언제부터 출근할 생각이신가?

여자가 말했다.

“내일부터 오겠어요.


신바람이 난 목소리는 이번에도 맨발로 여자를 대문 밖까지 배웅했다.

여자는 떠나기에 앞서 다시한번 깍듯이 예를 표하고 자신의 승용차에 올랐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출근한 여자는 곤히 잠든 목소리를 깨우지 않고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규모는 매우 큰 편이었다.

대 저택에 걸맞는 크기 였다.

 

바닥은 인도산 수입 마블로 멋을 냈다.

흰색 컬러의 캐비닛은 주방의 실내 분위기를 밝게 했고 벽면은 아라빅 스타일의 고문양(古紋樣)타일로 아름답게 마감처리했다.

캐비닛 찬장 안에는 각종의 영국산 식기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

서랍 역시 값비싼 음식 조리 기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국내산 대형 냉장고에도 각종의 야채와 생선, 육류가 신선도를 유지하며 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250여 평 건평에 2층 목조 주택으로 건축된 저택에는 60대 중년 목소리가 혼자 기거했다.

목소리에 따르면 그는 1년 전에 부인과 사별했다.

슬하에 12녀 자식이 있으나 모두 출가한 상태였다.

목소리는 자식들과 함께 살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작금의 시대에 부모와 함께 동고(同居)하려는 자식과 며느리 또는 사위가 어찌 그리 많겠는가.  

때문에 목소리는 궁궐과도 같은 저택에서 홀로 독수공방(獨守空房)하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처지 였다.

 

주방에 들어선 여자는 우선 싱싱한 야체와 생선 등 요리 식재료들을 깨끗히 다듬고 손질한 뒤 목소리가 평소 즐겨 먹는다는 해물 잡탕을 조리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자 저울로 정확하게 측정한 일곱가지 곡식들을 골고루 섞은 뒤 정갈하게 씻어 압력밥솥으로 밥을 지었다.

야체 식단을 선호한다는 목소리의 주문에 따라 식탁 반찬도 대부분 채소로 버무린 반찬으로 채.

여자는 목소리가 깨지 않도록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주방일을 해냈다.

 

대략 1시간 여에 걸쳐 모든 요리를 끝낸 여자는 주방과 연결된 다이닝룸에 조리된 음식을 옮겼다.

다이닝 룸 한 가운데는 캐나다 산 마호가니 원목으로 제작한 대형 식탁이 자리했다.

식탁 주위에는 모두 6개의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아침 식준비를 완벽히 끝낸 여자가 목소리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순간, 잠옷을 걸친 목소리가 입 안 가득 치약 거품을 물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식탁으로 다가 선 목소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안에 치약 거품을 잔뜩 문 목소리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탄성을 질렀다.

“오마이 갓! 얼굴만 이쁜줄 알았는데, 음식 솜씨도 일품이구먼.

 

(계속)

 

이산해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