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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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소설 / 칼럼 예월난( 芮月欄)

2020.12.18 21:18

이산해 조회 수: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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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산해 작(作 ) "진리(眞理)를 깨달으면 하늘나라가 보인다"



 

밤 11시

LA 윌셔 블러바드(Wilshire Boulevard)선상(線上)에 위치한 JJ 그랜드 호텔 갓길에서 승용차 한대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빨강색 불이었기 때문이다.

 

어둠이 내리 깔린 주변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인지(認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승용차 뿐.

 

신호등에 제지 당한 승용차는 고급형 G80 제네시스였다.

현재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 차량은 코리아의 초정밀 산업이 최고조(最高潮)에 올랐음을 반영하는 척도(尺度)이기도 했다.

날렵하면서도 듬직한 승용차 운전석에는 잘생긴 사내가 앉았다.

 

그의 시선은 신호등에 꽂혀 있었다.

신호등의 빨강 전등은 대략 30초 가량 빛을 발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급속히 노랑색으로 바뀌었다.

오른발로 브레이크 페달을 꾹 밟고 있던 사내는 본능적으로 발을 떼고 개스 페달로 가져갔다.

순간, 엄청난 충격이 사내를 덮쳤다.

검정색 사륜구동(四輪球動)쉐보레 픽업트럭이 제네시스 조수석을 들이받은 것이다.

제네시스를 들이받은 쉐보레는 황급히 뒤로 빠졌다.

그러고는 저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4명의 괴한이 쉐보레에서 튀어나왔다.

매우 민첩한 행동이었다.

 

아스팔트에 착지(着地)한 괴한들은 재빨리 제네시스에 다가섰다.

이후 괴한들 가운데 다저스 야구모자와 존 디어 모자를 쓴 두 괴한이 운전석으로 가 거칠게 문을 잡아채고 운전석에 앉은 사내를 끄집어 냈다.

사내는 아스팔트에 널브러졌다.

사내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두 괴한은 사내의 팔과 다리를 추켜 쥐고 픽업트럭으로 옮긴 뒤 뒷좌석에 구겨 넣었다.

 

노랑색일 때부터 사건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신호등이 파란색을 발광(發光)하고 있을 즈음 사건 현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커다란 흡수 충격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엔진을 작동했던 최신 고급 승용차 제네시스도 괴한이 몰고갔다.

 

촙샵(Chop Shop)

1990년 식 쉐보레 픽업트럭은 2개의 뒷좌석을 포함 모두 6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갈색 인조가죽으로 시트를 커버한 차 안은 낡고 지저분했다.

바닥에는 담배꽁초와 먹다 버린 패스트푸드 찌꺼기가 마구 널브러져 있었다.

 

교통량이 뜸한 LA 다운타운을 향해 고속으로 달리고 있는 픽업트럭은 101 프리웨이가 나오자 거칠게 핸들을 비틀어 램프로 들어섰다.

순간, 뒷 좌석에 탄 두명의 괴한이 비명을 질렀다.

“호세! 야, 씨방새야. 운전 똑바로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른 괴한은 다저스 야구 모자였다.

키가 작고 상체가 우람한 그는 팔과 목에 다양한 문신을 했다.

그의 곁에는 공업용 덕 테이프로 입을 틀어 막힌 사내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릿한 전조등에 투영된 사내의 외모는 동양인이었다.

사내의 양팔은 뒤로 제쳐져 테이프로 묶인 상태였다.

사내의 곁에는 또다른 괴한이 앉아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트랙터 회사인 존 디어의 모자를 뒤집어 쓴 놈이었다.

놈도 역시 팔과 목 심지어는 이마와 눈가장자리에 온갖 형상의 문신을 떠 끔찍스런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놈은 우람한 체격인 다저스 모자에 비해 체구는 왜소했다.

하지만 두 눈에는 비열하고 교활한 속성(屬性)이 엿보였다.

놈의 옆구리엔 스미스 & 웨슨사가 제작한 38구경 리벌버 권총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놈은 한시도 쉬지 않고 떠벌렸다.

변성기를 그대로 지나친 듯한 가늘고 여린 음색이었다.

놈은 히스패닉계 언어로 말했다.

놈과 말을 주고 받는 차 안의 괴한들 모두는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덕 테이프로 입이 봉해진 채 숨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동양인 사내가 어깨로 다저스 모자를 밀쳤다.

자신들이 납치한 사내가 처음으로 반응하자 레미 마틴 꼬냑을 홀짝거리던 다저스 모자가 화들짝 놀라며 입술에서 술병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가늘게 치켜 뜬 시선을 사내에게 주며 말했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아서 네가 벙어리인줄 알았거든. 헌데, 아니네?”

놈이 사용한 언어는 히스패닉 억양이 가미된 영어였다.

허나, 완벽했다.

다저스 모자가 자신을 째리자 동양인 사내가 상대에게 혀로만 말했다.

“테이프를 떼어줄 수 없겠어? 너와 말을 하고 싶다.”

입 소리였으나 무슨 말인지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저스 모자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며 손사래를 치자 사내는 더욱 거칠게 몸짓을 해 보였다.

사내가 상체를 좌우로 흔들며 억지를 쓰자 조수석에 앉은 괴한이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마리오. 저 새끼 입을 가린 테이프를 떼어내.”

마리오는 다름아닌 다저스 모자였다.

그리고 방금 차분하게 지시한 괴한은 놈들의 우두머리인 아리스토텔레스 산도발 이었다.

 

우두머리의 지시를 받은 다저스 모자가 말했다.

“브라더. 정말 테이프를 제거해도 괜찮아?”

“왜? 놈이 너를 죽이기라도 할까 겁나?”

우두머리가 백미러를 통해 다저스 모자를 곁눈질하며 비아냥거렸다.

순간, 이번에는 존 디어 모자가 사내의 입을 봉한 덕 테이프를 단숨에 벗겨냈다.

테이프가 떨어지며 피부에 심한 마찰을 가하자 동양인 사내가 파열음을 내며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허나 고통은 잠시 뿐. 입을 통해 숨을 고를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덧붙여 자신을 납치한 괴한들과 말을 나눌 수 있어 더욱 그랬다.

 

사내가 자신을 바짝 밀착하고 있는 존 디어 모자에게 영어로 말했다.

“이봐. 너희들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나한테 왜 이러는거지?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혹시 뭔가를 착각하고 나에게 이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분명히 사람을 잘못 본 게 틀림없어.그러니 당장 나를 풀어줘.”

이렇게 말한 사내는 좌우로 몸을 비틀며 당장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사내가 거칠게 굴자 놈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비한 이미지를 지닌 존 디어 모자가 사내를 향해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이 새끼, 제정신이 아니네. 너는 인간이 아니라 돈 보따리야. 그러니 개소리하지 말고 조용히 해.”

존 디어 모자는 그러고는 몸을 획 틀어 사내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불시에 일타(一打)를 당한 사내의 코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피를 보자 더욱 흥분한 놈이 자리에서 들썩이며 히스패닉 말로 마구 지껄였다.

 

차 안 분위기가 충구난방으로 흐르자 우두머리가 품 안에서 글록 권총을 꺼내 차 지붕으로 총알을 먹이며 소리쳤다.

“셧더 마우스. 빡규 맨!”

우레와 같은 소음이 차안을 뒤덮자 공포에 질린 놈들이 입을 다물었다.          

놀라기는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채 수십 초가 지나기도 전에 놈들은 다시 키득거리며 마구 지껄였다.

 

존 디어 모자는 품속에서 담배로 만든 마리화나를 꺼내 지퍼 라이터로 불을 지폈다.

그가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마리화나 연기를 밖으로 뿜어 낼 때였다.

에 검은색 가죽 지갑을 움켜쥔 우두머리가 사내에게 말했다.

물론 영어였다.

“꼬레아인가?”

사내가 황급히 대답했다.

“예스.”

“네 지갑을 뒤져보니 대학생인 것 같은데, 사실인가?”

사내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두머리가 말했다.

“사는 곳이 어디지?”

사내가 말했다.

“콜드워터 캐넌.”

콜드워터 캐넌이란 지명을 듣는 순간 우두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놈들이 휘파람을 날리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브라더(산도발 지칭)오늘 봉 잡았네. 이새끼가 방금 콜드워터 캐넌이라고 했잖아. 거긴 돈많은 년 놈들만 모여 사는 곳이라구. 우리 같은 날탱이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지상 낙원이야.”

이렇게 이죽거린 놈은 다저스 모자였다.

놈은 그러고는 또 다시 주먹으로 사내의 얼굴을 가격했다.

열등감에 따른 주먹질이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은 사내의 얼굴이 반대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눈두덩이 부어 올랐다.

 

다저스 모자가 걸핏하면 주먹을 날리자 우두머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리오. 그만해라. 네 말대로 보물을 얻었는데,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되겠냐? 만약 저놈이 죽기라도 한다면 어쩔래? 내 말 알아 듣겠나?”

우두머리가 까칠한 투로 말하자 다저스 모자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오케이 오케이를 연발했다.

 

한편 시속 80마일로 프리웨이를 질주하던 픽업트럭은 라티노(Latino) 집단 거주지역이 나타나자 핸들을 틀어 진입로로 들어섰다.

진입로 입구에 세워진 빌보드 표지판엔 사우스 LA 캄튼 왓트라는 지명이 표기돼 있었다.

라티노 주민이 전체 거주자의 약 75%(흑인 25%)를 차지하는 이곳에서 괴한들은 촙숍을 운영했다.

훔친 차량을 분해한 뒤 나온 각종의 부품들을 비싼 가격으로 밀매하는 불법 차량 정비소인 것이다.

캄튼 왓트 카운티에 들어선 픽업 트럭은 지저분하고 허름한 타운하우스 거주지역을 한창 동안 선회 했다.

그러고는 멕시칸 푸드 트럭과 달라 스토어가 즐비하게 들어선 상가 지역을 가로 지른 뒤 이끼가 잔뜩 낀 낡은 블럭 건물 앞에 정차했다.

건물 벽 일부에는 분사 스프레이를 이용해 그린 그로데스크한 페인팅 벽화(?)가 을씨년스럽게 시선을 자극했다.

마약과 폭력, 그리고 섹스를 뭉뚱그린 그림이었다.

 

건물 지붕은 철재 드럼통을 잘라 겹겹이 덮었다.

시뻘겋게 녹이 슨 지붕에는 폐타이어가 즐비하게 얹혀 있었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봄직한 외관이었다.

 

픽업트럭을 세운 괴한들은 사내를 납치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차에서 내린 괴한들은 뒷좌석에서 거의 실신상태로 앉아 있는 사내를 끌어내린 뒤 질질 끌다시피하며 건물 안으로 데려갔다.

괴한들이 운전한 제네시스도 활짝 열린 입구를 통해 안으로 사라졌다.

 

건물 안으로 들어 선 괴한들은 입구 문을 잠근 뒤 저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는 다름아닌 마리화나(대마초)였다.

마리화나에서 뿜어내는 역겨운 냄새가 사내의 후각까지 전달됐다.

사내는 순간 구역질을 느꼈다.

연거푸 폐부 깊숙이 마리화나의 잿빛 연기를 빨아들인 괴한들은 충혈된 눈을 꿈벅이며 마치 실성한 놈들처럼 낄낄거렸다.

괴한들 가운데 비교적 신중한 처세를 보이고 있는 우두머리 아리스토텔레스 산도발이 존 디어 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지시였다.

이를 알아챈 존 디어 모자가 낡은 회색 캐비닛 앞에 사내를 세웠다.

존 디어 모자는 곁에선 다저스 모자에게 눈짓으로 철재 캐비닛을 함께 옮길 것을 청했다.

두 괴한은 캐비닛의 좌우를 손으로 잡고 기를 쓰며 옆으로 옮겼다.

 

캐비닛이 사라지자 가려졌던 뒷면에 플라이 우드 합판으로 만든 출입문이 나타났다.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었다.

사내를 가운데 세운 존 디어와 다저스 모자는 그를 이끌고 지하 계단을 밟았다

조도가 낮은 전구에서 발산하는 희미한 불빛 때문에 거동이 불편한 사내는 하마터면 계단에서 실족 할뻔 했다.

계단의 경사가 매우 가팔랐기 때문 였다.

힘들게 내려선 지하실은 시궁창을 방불케 했다.

부식된 시멘트 바닥에는 고인 물들이 썩어 지독한 곰팡이 냄새를 피워 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폐 타이어를 수북이 쌓아놓은 곳에서는 큼지막한 쥐들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두 괴한은 사내를 낡고 짓물러진 직물로 커버를 씌운 소파에 떠밀다시피 짐짝 처럼 찍어 눌러. 앉혔다..

소파 역시 쥐똥을 비롯한 불순물이 가득했다.

햇빛이 차단된 지하실은 한뼘 남짓한 작은 환구통을 통해 오염된 공기가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두 괴한 곁에는 어느새 내려왔는지 우두머리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내는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었다.

우두머리가 표정없는 얼굴로 사내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말했다.

“호세, 마리오. 놈의 다리를 올가미로 채워. 그리고 꼬레아(코리안)에게 담요를 갖다줘.”

여기까지 말한 우두머리는 다시 사내를 내려다본 뒤 닫았던 덧붙였다.

“목도 마를거다. 물도 갖다주고.”

지시를 받은 두 모자는 이구동성으로 “오케이 브라더.”를 외쳤다.

 

한편 촙숍에 함께 끌려온 제네시스는 곧바로 리페어 작업에 들어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또 다른 5명의 라티노들이 승용차에 달라붙어 우그러진 문짝과. 앞 범퍼 일부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몸놀림으로 보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프로들 이었다.

이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었다.

여자였다.

 

짙은 흑발(黑髮)에 젖가슴이 풍만한 여자는 Y존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청바지를 입었다.

왼쪽 팔 전체는 문신으로 가득했다.

여자는 사내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했고 사내들은 그때마다 굽실거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자는 우두머리인 아리스토텔레스 산도발의 애인이었다.

 

여자는 제네시스에 달라붙은 4명의 사내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제네시스는 꼬레아에서 만든 최고급 승용차야. 멕시코로 가져가면 두둑하게 챙길 수 있어. 해서 말인데, 네들은 이 년(제네시스)을 애인 다루듯 하면서 리페어를 해야 돼. 그것도 아주 감쪽같이. 내 말 알아들어?”

 

여자가 정색한 표정으로 말하자 사내들 모두가 목청을 높여 답했다.

“Si(Yes)!”

 

여자가 사라지자 라티노들은 떼어 낸 문짝을 능숙한 솜씨로 펴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업중 제네시스에 부착한 캘리포니아 번호판을 떼어내고. 일리노이주 번호판으로 갈아치웠다.

 

예월난(芮月欄)

여자의 이름은 예월난(영어명:엣킨슨 (Atkinson>예).

나이 37세.

직업 의사.

미혼인 여자는 LA의 부촌(富村), 콜드워터 캐넌과 베버리 그랜 블러바드(Coldwarter Canyon & Beverly Blvd)에 위치한 럭셔리 대저택에서 거주했다.

중세 이탈리아 건축물인 필라포를 본떠 지은 2층 규모의 저택은 건축 면적만 약 3백여평에 달했다.

여자는 이곳에서 하나뿐인 남동생과 살고 있었다.

부모는 서울에서 머물렀다.

대저택은 내리 6선을 한 노정객(老政客)예춘호의원이 노후를 대비해 구입한 것이다.

 

여자와 남동생은 모두 이곳 천사의 도시(LA)에서 출생했다.

따라서 이들은 독수리 여권(미 시민권자)소지자였다.

 

여자는 유년기(幼年期)때 외할머니와 생활한 탓에 자연스레 한국말을 익혔다.

때문에 여자는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남동생 역시 한국어에 능통했다.

남동생의 유창한 한국어는 친할머니의 영향이었다.

완고한 유교적 성향을 지닌 친할머니의 품에서 성장한 남동생은 대화의 상대가 오직 친할머니 뿐이어서 한국말을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남동생은  한국어만 유창한 것이 아니었다.

나이 5살 때에는 친할머니로 부터 천자문까지 배워 사자성어도 쉽게 말하고 글로 표현했다.

“네가 국적은 미국놈이지만 피는 한국 놈이다. 따라서 한국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그리고 한문은 너에게 지적 자양분이 되 줄거야. 그럼으로 이 다음에도 게을리 하지 말고 한문을 공부해야 한다.”

귀가 따갑도록 들은 친할머니의 충고였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쓸줄 아는 두 남매는 평상시 대화 때도 한국어로만 말했다.

이처럼 오누이는 다방면에서 영명(英明)했다.

 

LA 코리아 타운에서 이들 남매의 평판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거물급 정치인인 부친의 후광(後光)때문이 아니라,이들의 겸손함과 예의 바른 처신의 결과 였다.

 

이렇듯 오누이의 삶은 모든 것이 만사형통(萬事亨通)이었다.

헌데, 악마가 이들의 행복한 일상을 시기한 것일까?

전혀 예상치도 않은 동생의 행방이 묘연(杳然)해진 것이다.

 

사료 깊고 신중한 성격인 동생이 사흘이 지나도록 자신에게 단 한통의 전화도 문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하루 이틀은 동생의 전화가 없었어도 무심코 지나쳤다.

학부생(學府生)인 동생이 모처럼 학우(學友)들과 어울려 짧은 여행을 떠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 였다.

그렇다 해도 사흘이 되도록 전화 한통 없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여자는 오전 진료를 마치고 자신의 개인 병원 사무실에서 스마트 폰의 폴더를 열었다.

그러고는 전화 앱을 펼치고 터치 한번으로 연결되는 동생의 전화 번호를 눌렀다.

무미건조한 발신음이 규칙적으로 반복됐다.

그리고 발신음은 거의 1분여 동안 지속됐다.

그럼에도 동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랫동안 발신음이 울렸음에도 동생이 전화를 받질 않자 여자는 갑자기 불안해 졌다.

낯빛도 창백해 졌다.

너무도 이상했다.

평소 동생은 자신이 전화를 할 경우 단번에 반응했다.

그런데 방금 이 상황은 납득이 가질 않았다.

동생이 누나의 전화를 확인했다면 지체없이 받을 터 였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여자는 발신음이 끊기면서 ‘지금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잠시 후 다시 연결해라’는 기계음이 나오자 호흡을 고른 뒤 다시 재

발신을 했다.

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쓰나미가 밀어닥치는 것처럼 벼라 별 생각이 몰려왔다.

여자는 손에 움켜쥔 스마트 폰을 노려보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머리 속에서 온갖 상상이 떠올랐다.

특히 불길한 생각이 스칠 때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추렸다.

쓸데없는 상상이라 자책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길한 생각은 좀처럼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혹시 무슨 봉변을 당한 것은 아닐까?’

이같은 생각을 하는 순간 손에 쥔 스마트 폰에서 벨 소리가 튀어 나왔다.

여자는 재빨리 화면을 쓸어 올렸다.

화면에는 낯선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지역번호 323으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여자가 황급히 스피커 폰을 열었다.

상대는 약 1분여 가량 침묵을 유지했다.

여자도 아무 말없이 기다렸다.

이윽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히스패닉 억양이 가미된 완벽한 영어로 말했다.

“영어 할 줄 아나?”

가늘고 딱딱한 사내의 음색이었다.

스피커 폰에서 느닷없이 외국인의 음성이 들려오자 여자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자는 이내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잡은 뒤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이예요. 헌데, 댁은 누구시죠?”

가늘고 딱딱한 음색이 말했다.

“당신 남동생 이름이 수인가?”

순간 여자는 무엇이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認知)했다.

화들짝 놀란 여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요 내 남동생 이름이 수예요(동생의 이름은 예 수였다)그런데 당신이 내 동생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있는 거죠?”

가늘고 딱딱한 음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다시 침묵했다.

 

상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여자는 다급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왜, 아무 말도 없어요? 그리고 내 동생은 지금 어디 있죠?”

여자가 이성을 잃은 듯 마구 소리를 지르자 가늘고 딱딱한 음색이 말했다.

음색은 다름아닌 괴한의 우두머리 아리스토텔레스 산도발이었다.

놈이 말했다.

“이봐. 아가씨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잘들어. 지금 우리가 네 동생을 보살피고 있어. 이유는 우리가 현재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거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하겠지? 당신 동생 말로는 아가씨가 닥터라고 하던데….”

“……”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앞으로 3일 안에 2백 만 달러를 준비하라구. 우리가 요구하는 돈은 당신 동생의 몸 값이야. 당신의 꼰대(아버지)가 꼬레아에서 유명한 정치가라며? 그렇다면 2백만달러 쯤이야 껌 값일테지? 안 그런가, 아가씨! 돈은 20달러 헌 지폐로 준비해. 만약 허튼 수작을 펼 경우 동생은 이세상에 없어. 우린 프로야. 시장통 야바위가 아니라구.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럼 행운을 빈다.”

 

여기까지 말한 우두머리는 상대의 말을 듣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자가 걸려온 전화번호를 재 발신했으나 전화번호가 결번이라는 기계음만 반복할 뿐이었다

우두머리 아리스토텔레스 산도발이 사용한 전화는 1회용 프리페이 폰이었던 것이다.

(계속)

 

이산해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