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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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소설 / 칼럼 (1) 삿포로 殺人事件

2022.03.22 12:21

이산해 조회 수: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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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일본내 유력 일간지(구글 사진)

 

 

1

2022년 3월 20일 일요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 위치한 오도리 공원(大通公園).

때는 오후 2시였다.

7.8헥타르 면적의 크기를 지닌 오도리 공원은 모처럼 쾌청한 날씨 속에 휩싸여 있었다.

기온은 영상 20.

예년에 비해 무려 15도 이상 고온이었다.

삿포로 로컬 TV의 일기예보 스페셜리스트는 ‘35년 만에 찾아온 고온현상은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푸근한 날씨 탓인가.

느릅나무와 라일락 등 5천여그루의 자생 목()이 깔끔한 잔디밭과 어우러진 공원에는 행락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행락객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몰려다니며 기념사진을 찍거나 파안대소하며 행복한 표정들이었다.

활기에 찬 오도리 공원에는 외모가 두드러진 노인의 모습도 보였다.

8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노인은 머리 숱이 풍성한 백발(白髮)이었고 얼굴에는 무수한 검버섯이 퍼져있었다.

두툼한 검은색 뿔 테 안경을 착용한 그의 눈은 날카로웠다.

복장은 옅은 핑크색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했으며 양()모직의 정장을 걸쳤다.

신고 있는 신발은 가죽제품인 흰색 나이키 캐주얼 슈즈였다.

노인은 고령(高齡)이었음에도 정정한 모습이었다.

꼿꼿한 자세로 자박자박 걷는 일정한 보폭이 그의 건강상태가 양호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노인은 20대 초반의 여성과 함께 걷고 있었다.

노인은 공원 한켠에 위치한  분수대를 느릿느릿 선회한 뒤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 한 흉상 앞에 도착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반신(半身)의 브론즈 흉상을 올려다 본 노인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손녀를 향해 엄지 척을 해 보였다.

손녀 역시 엄지 척을 한 뒤 노인을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 등을 쓰다듬으며 귀엣말로 무엇인가를 소근거리는 순간이었다. 고막을 찢는 듯한 천둥 같은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

동시에 노인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흉상을 향해 널브러졌다.

뒤통수에서는 보랏빛 선혈이 물컹물컹 쏟아지고 있었다.

노인이 구겨지 듯 널브러지자 화들짝 놀란 손녀가 무릎을 끓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행락 객들도 두려움에 떨며 우왕좌왕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행락 객들은 흉상 주변을 맴돌며 스마트 폰으로 사체를 영상에 담고 있었다.

손녀가 두려움에 떨며 울부짖자 누군가가경찰에 신고하라고 소리쳤다.

10여 분 후

삿포로 경찰서 소속 순찰차가 경광 등을 번쩍이며 사고 현장으로 접근했다.

널브러진 주검을 향해 다가간 경찰은 숨진 인물이 지역 유지인 것을 확인했다.

신경질적인 외모의 주걱턱 정복 경찰이 재빠른 동작으로 순찰차에 장착된 무전 송 수신기를 집

어 들었다.

그러고는 삿포로 경찰서 교환과 접속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여자가 말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주걱턱이 말했다.”강력계!”

전화가 연결되자 주걱턱은 들뜬 목소리로 사건 현장의 긴급함을 알렸다.

강력계 당직 형사가 말했다.”피해자는 누군가?”

주걱턱은 널브러진 시체를 곁눈질 하며 주검의 신분을 또박또박 밝혔다..

2

여명(黎明)

42.

처녀.

여자는 다량의 베스트 셀러 시집을 출간한 유명 시인(詩人)이었다.

뿐만 아니라 포크 록 송라이터(Songwriter)였고 프로 당구 선수였다..

우아한 영혼을 지닌 여자는 외모도 빼어났다.

178센티미터의 훤칠한 키. 포탄처럼 솟구친 단단한 가슴과 날렵한 허리, 터질듯한 엉덩이와 쭉 뻗은 다리는 완벽한 체형(體型)의 조화였다.

반듯한 이마와 초승달 눈썹, 조각처럼 날렵한 코,앵두 같은 입술, 지성미가 내재된 우수의 찬 눈 등 이목구비도 인간이 빚은 신의 선물이었다.

여자는 뛰어난 외모와 지혜 뿐만 아니라 격투(激鬪)도 일당백이었다.

그는 무예 고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무술을 연마했다. 

태생적으로 운동신경이 발달한 그는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는 이소룡의 스승 호연(중국 쓰촨 출신)에게 무기와 무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를 전수 받았다.

그리고 20대 초반에는 미 중남부에 위치한 테네시 내시빌로 건너가 러시아 계 미국인 알렉세이 나발리에게 총술(銃術)과 위장, 분장술을 익혔다.

알렉세이 나발리는 과거 일본 극동지부에서 CIA 요원으로 활동한 인물로써 여명의 오빠와 절친이었다. 

이렇듯 무술과 총술 등 다양한 기술을 터득한 그는 여의도 경찰서가 선발한 형사 특채에 응시, 합격한 뒤 10여 년 간 강력계 형사로 활약했다.

하지만 불의를 결코 용납 치 않는 강직한 성품의 그가 새 정부 들어서 눈엣가시로 찍히자 스스로 배지를 내던지고 칩거하며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었다.

한편 여명은 부모님이 물려 준 고택(古宅)을 대 청소했다.

대략 1년 여 만이었다.

집 안 청소는 인부들을 고용했다.

혼자서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 였다.

인부들은 청소대행업체 빛나에서 파견된 4명의 전문 클리너들이었다.

고택은 한옥 보전 지역인 종로구 팔판동에 위치했다.

서까래와 대들보 위에 기와를 얹힌 전통방식의 한옥인 고택은 80평 대지에 건축 면적이 50여 평에 달했다.

실내는 화장실과 욕실을 곁들인 침실 3개와 서재를 겸한 거실, 그리고 주방이 차지하고 있었다.

외동딸인 여명은 고택에서 홀로 기거했다.

함께 생활했던 아버지는 2년전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는 미국에 거주하는 외동아들 오빠(미 시민권자)의 초청으로 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클리너들은 청소 기기인 베큠과 다양한 장비를 동원해 고택 구석구석을 빛냈다.

여명은 서적이 빼곡하게 들어 찬 거실 내 책꽂이를 가리키며 먼지털이를 주문했다.

미송(美松)으로 제작한 책꽂이 한 켠에는 상당수의 고서(古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클리너들은 등에 짊어진 코너베큠을 이용해 책꽂이에 내려 앉은 먼지를 조심스레 빨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년의 남자가 조심스런 몸짓으로 신중을 기하며 고서에 쌓인 먼지를 제거하고 있었다.

한창을 그렇게 청소에 집중하고 있을 즈음  코너베큠에 연결된 흡입 노즐에 고서(古書) 한권이 빨려 나왔다.

노즐 끝에 달라붙은 고서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끝내 거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서가 바닥에 부딪히자 책갈피 속에서 여러 장의 속지가 밖으로 밀려 나왔다.

누렇게 변색된 속지는 철필(鐵筆)글씨로 빼곡했다.

한글과 한자를 혼용한 것이었다.

여명은 바닥에 흐트러진 고서와 속지를 집어 들고 거실 중앙에 자리한 대형 탁자로 옮겨갔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속지를 찬찬히 살폈다.

헌데 속지를 읽어 내리는 그의 동공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속지는 놀랍게도 할아버지의 일기였다.

담담한 구어체(口語體)로 써내 린 일기는 행간마다 섬뜩한 내용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와무라 미치토시.

일본의 조선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내 사법부(司法府)형사과에서 악명을 떨친 인물.

좀 더 구체적인 그의 전력(前歷)은 이랬다.

세계 2차대전 패망 직전 제36대 일본 총리를 지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9대 조선총독 자리에 있을 때 일본에 비협조적인 조선인을 무참히 탄압한 일본판 요제프 맹겔레였다.

이와무라 미치토시는, 일본이 해외 전쟁 수행에 따른 물자와 인력을 수탈할 때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팔도를 이 잡듯 뒤져 조선인 출신 젊은 남녀들을 강제 징집하거나 동원했다.

그러고는 조선인들을 필리핀과 미얀마 등 인도차이나 지역으로 내모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와무라 미치토시는 특히 위안부로 동원한 조선인 여성들이 도주를 시도하거나 극렬히 반항할 경우 초주검이 될 정도로 폭력을 휘둘렀다.

놈에게 린치를 당한 여성들 상당수는 불구가 되거나 끝내 사망했다.

어디 그 뿐인가.

외모가 수려한 젊은 여성들을 골라 강제로 겁탈하고 한편으론 조선총독부 고위 간부들에게 성상납(性納)도 마다하지 않았다.

놈의 잔인함과 교활 함은 조선총독부 내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인두겁의 거죽을 뒤집어 썼을 뿐 놈은 악마였다.

이와무치 미치토시는 서울에서 활동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강원도와 경상북도 함경남도 등지에 분포한 광물채집광산을 감시하는 역할도 맡겼다.

놈은 자신의 직무를 이용해 조선총독부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금과 동()을 비롯한 주요 광물들을 외부로 빼돌렸다.

놈은 입막음을 위해 빼돌린 비자금 일부를 정기적으로 총독에게 상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상납에는 비단 뇌물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인 출신 가운데 미모가 빼어난 10대 후반에서 20 초반 젊은 여성들을 선발해 성상납(性納)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듯 이와무라 미치토시는 일본이 패망한 1945815일 직전까지 수탈과 겁탈에 혈안이 돼 있었다.

놈은 194592,일본제국의 포츠담 항복 선언 서명으로 조선총독부가 해체되자 같은 해 119대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 일행과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와무라 미치토시는 자신의 고향인 홋카이도 삿포로에 안착한 뒤 경력을 내세워 홋카이도 경찰(北海道警察)간부로 채용됐다.

그러고는 대략 15년 간 경찰 고위직을 역임한 뒤 사표를 내고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교활한 그는 삿포로 시의 번화가인 타누키코지(狸小路商店街)에 파칭코를 비롯한 야쿠니쿠 고기집, 볼링장,게임센터 등 다양한 업종을 빠른 시일에 잠식해 갔다.

이와무라 미치토시는 부와 명성이 축적되자 타누키코지에서 지역 유지로 대접을 받았다.

놈은 이같은 백그라운드를 발판 삼아 다선(多選)시의원으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일기 속에 할아버지도 놈에게 잊을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서울 종로구 방산시장에서 포목점과 어물전(魚物)을 운영하며 부자로 소문난 할아버지를 놈이 겁박, 전 재산을 강탈했다.

놈이 내세운 명분은 할아버지가 부정축재 자라는 것이었다.

졸지에 재산을 강탈당한 할아버지는 일제 경성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하며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일본 출신 법관들 역시 눈만 끔벅이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인 출신의 형식적인 국선 변호인이 변론을 펼쳤지만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국선 변호인도 한통속이었던 것이다.

기고만장한 놈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종로에서 제일 가는 미녀로 손꼽힌 할아버지의 막내 여동생을 강제로 차에 태워 데려가 수차례 겁탈한 뒤 총독에게 바쳤다.

치욕적인 성폭력을 당한 막내 여동생은 이후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됐다.

막내 여동생은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고 일본인 산부인과를 찾았다.

허나,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할아버지께서 임신중절을 적극 만류하셨다.

비록 치욕적인 임신 이지만 그 역시 생명체임으로 죽일 수는 없다“ 고 했다.

여동생은 결국 만삭을 기다렸고 아이가 태어나자 갓난이를 데리고 자취를 감췄다.

할아버지는 졸지에 전 재산을 빼앗기고 여동생마저 모습을 감추자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리고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생을 마감하셨다.

할아버지가 별세 하시자 할머니 마저 신경쇠약으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별세 직전 아버지에게 몰래 감춰놓은 상당수 금괴와 팔판동 고택을 물려주셨다.

일기의 마지막 행간은 이렇게 기록했다.

아들아.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 하라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 하련다. 모르긴 해도 내가 하는 일을 예수님도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네가 나와 누이의 복수를 해다오. 그래야만 비로소 구천에서 맴돌고 계실 어르신들의 영혼이 편히 쉴 것이다. 너는 지나칠 정도로 선하고 나약 하지만 모든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때문에 아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너는 놈을 절대 잊지 말아라.놈은 비단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조선 8도를 수탈하며 악행을 저질렀다.따라서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해도 기어코 놈을 응징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일기를 여기까지 읽어 내린 여명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명이 정신을 되돌린 것은 클리너가 탁자 밑에 깔린 양탄자를 베큠으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3

삿포로 순찰의 급보(急報)를 접수한 강력계 형사들이 현장에 들이닥쳤다.

형사들은 흉상 앞에 널브러진 사체의 상태를 확인한 뒤 곧바로 현장검증에 착수했다.

정복 경찰들 역시 황급히 현장 주변을 파란색 폴리스 라인을 두른 뒤 사체 곁에서 웅성거리는 행락객들을 멀찌감치 몰아냈다.

사건현장 주변이 대충 정리될 무렵이었다.

각종 장비를 동원한 감식반원들이 헐레벌떡 이며 사건현장에 뛰어들었다.

흰색 가운을 걸친 감식반원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사체 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단서가 될만한 족()족과 지문,그리고 총격 후에 남아 있을 탄피 수거에 집중했다.

감식 요원들이 흉상 주변을 돌며 증거 채집에 골몰할 때였다.

임산부처럼 배가 튀어나 온 형사가 눈물을 떨구고 있는 손녀에게 다가섰다.

노타이에 감색 정장을 한 형사는 대략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형사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경찰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피해자와는 어떤 관계인가?”

손녀가 널브러진 사체를 시선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의 친할아버지예요.”

배불뚝이가 말했다.

그러니까손녀구먼?”

여자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배불뚝이가 덧붙였다.

신분증은 소지하고 있나?”

손녀가 그제서야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내 보였다.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신분증을 확인 한 배불뚝이가 말했다.

직업은?”

와세다 대학 국문과 학생이예요.”

이곳에는 몇 시에 왔나?”

오후 130분 쯤 일 거예요.”

현재 시각이 220분이니까 약 1시간 전 이구먼.”

그래요.”

배불뚝이가 턱으로 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비명횡사를 했는데,혹시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짐작이라도 가는 것이 있나?”

손녀가 정색한 어투로 대답했다.

짐작이라니요? 전혀 그런 것 없어요.할아버지가 괴한의 총을 맞고 숨졌다는 사실만 알 뿐 이예요.”

배불뚝이가 채근했다.

할아버지가 평소 누구와 원한관계에 있었다는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고…?”

손녀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누구에게 원한을 살 그런 인물이 아니라 구요. 형사님도 잘 아시겠지만 저분은 홋카이도에서 명망이 두터운 유명인 이었어요.삿포로 시 주민들도 모두가 칭송했고요.그런 데 원한이라뇨? 그건 말도 안되는 억측 이예요.”

배불뚝이가 뜨 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 내 말뜻은 그렇다는 거지….”

손녀가 말했다.

형사 님.할아버지가 인파가 넘치는 대낮에 괴한의 총을 맞고 돌아가셨어요. 너무나 황당하고 잊을 수 없는 일이 예요. 경찰은 물샐틈없이 철저하게 수사를 펼쳐 총을 쏜 괴한을 색출해야 합니다.아주 빠른 시간에 검거하세요.삿포로 시민의 이름으로 지켜 보겠어요.”

손녀가 윽박지르듯이 말하자 배불뚝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상대를 노려 보았다.

한편 노인을 저격하고 사라진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범인은 공권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유유자적 현장을 벗어났다.

일본내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삿포로과학수사연구소 내 감식 계 요원들이 이 날 현장에서 확보한 증거는 탄피 하나였다.

현장 감식의 1차 수순인 족적 감식과 지문 채취는 실패했다.

사건현장에 너무나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기 때문 였다.  

격발 후 총신에서 튀어 나온 탄피를 확보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대략 3시간 여에 걸쳐 현장 검증을 실시한 경찰과 감식 계 요원들은 허탈한 심정으로 장비를 거두고 사건 현장을 빠져나갔다.

현장 검증 때 벌떼처럼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던 삿포로 현지 로컬 언론과 홋카이도 주재 외국 언론들은 과학수사팀의 현장 검증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해 침을 튀기며 공론화했다.

언론은 또 사건 현장을 지휘한 삿포로 경찰 소속 형사 과장과 반장에게 노인의 의문의 주검을 끈질기게 캐물었다..

하지만 초동 수사부터 난관에 봉착한 경찰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노코멘트로 버텼다.

기자들은 경찰 간부들이 눈만 끔뻑거리며 아무런 해명도 내놓지 않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기자들도 발 품삯은 건져야 된다는 투정이었다.

그러나 수사 간부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보다 못한 기자들이 평소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말단 형사들에게 접근해 넌지시 사건 개요를 캐물었으나 상부로부터 함구령을 숙지한 이들 역시 손사래만 칠 뿐이었다.

한편 노인의 피살 사건은 순식간에 일본 전역을 강타하며 핫 이슈로 떠 올랐다.

언론을 통해 사건을 접한 일본 내각(內閣)도 노인의 주검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사건으로 해석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본 언론을 대표하는 요미우리와 마이니치 신문도 삿포로 주재 기자가 타전한 속보를 인용해 일본의 큰 별이 스러졌다는 헤드라인을 곁들이며 사법당국의 조속한 범인 색출을 닥달했다.

대한민국 언론도 피살자의 살해사건을 연일 톱 헤드라인으로 다뤘다.

국내 최대 종합일간지인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비롯한 조중동(朝中東)은 피살자가 역사적 인물임을 주시, 다각적인 편집으로 기사를 펼쳤다.

국내 언론이 여러 지면을 할애해 노인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이유는 피살자의 특이한 경력 때문 였다.

따라서 노인의 갑작스런 죽음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과거의 망령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4

여명은 할아버지의 일기를 읽고 난 뒤 서재로 갔다.

그러고는 컴퓨터의 화면을 열고 구글에 접속했다.

 

검색 창에 이와무라 미치토시를 입력하자 5개의 이름이 떴다.

모두가 현존하는 이름이었다.

►이와무라 미치토시:54/ 도쿄 거주 / 건축가

►이와무라 미치토시:36/ 도쿄 거주 / 영화 감독

►이와무라 미치토시:48/ 오사카 거주 / 참의원(參議院)

►이와무라 미치토시:98 / 삿포로 거주 / 전 삿포로 시의원

여명은 이 가운데 98세로 기록된 이와무라 미치토시의 이력과 사진을 캡처 했다.

이와무라 미치토시의 자료 사진은 초로(初老)의 모습이었다.

여명은 다시 구글을 통해 일본 국립문서보관서 웹사이트 주소를 알아냈다.

웹사이트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로그인이 필요했다.

여명은 여의도 경찰서 강력계 형사로 활약할 당시 전문 해커로부터 전수(?)받은 실력을 발휘했다. 소지한 플레시 드라이브를 컴퓨터에 연결한 뒤 9자리 숫자를 입력했다.

그러고는 다양한 문자와 키 등을 반복해서 조합한 뒤 10여 분만에 문서보관서웹사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여명은 파일 메뉴에서 인물 검색을 택한 뒤 이와무라 미치토시의 이름을 입력했다.

물론 일본어였다.

 

1초후.

이력서 용지를 카피한 문서가 화면에 클로즈업됐다.

이력서 오른편 상단에 붙어 있는 명함의 반절 크기만 한 흑백 사진은 20대로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여명은 사진의 픽셀이 퍼지지 않을 만큼 크기를 확대했다.

사진 속 이목구비가 구글에서 캡처한 모습과 동일했다.

단지 시간을 뛰어넘은 나이 차 뿐이었다.

컴퓨터 모니터에 펼쳐있는 이력서에는 할아버지의 일기장 속 내용과 합치하는 전력(前歷)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여명은 이력서의 내용도 화면으로 캡처해 자신의 스마트 폰으로 옮겨 담았다.

5

컨트리 뮤직의 본 고장인 내슈빌 국제공항에 동양계 여성이 국제선 여객 터미널 입국 심사 대에 들어섰다.

입국 심사 대는 코로나 19 여파로 인해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여성은 별다른 지체 없이 빠르게 심사 대를 빠져 나갔다.

여성은 다름아닌 여명이었다.

여명은 자신을 마중 나온 오빠와 함께 거주지인 프랭클린으로 향했다.

오빠의 저택에서 어머니와 해후한 여명은 다음 날 스승을 만났다.

다름아닌 자신에게 총 술과 변장술 등을 전수한 알렉세이 나발리였다.

오랜만에 제자와 함께한 스승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안부를 물었다.

여명이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허니.부탁이 있어요.”

스승이 말했다.

애니 타임.”

이틀 후 일본 오사카에 갈거에요.그곳에서 권총이 필요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느닷없이 권총이라니어디에 쓰려고?”

악당을 손보려고요.”

악당?”

그래요. 천하의 악당 이예요. 저의 조부모님을 괴롭힌 놈이죠.”

스승이 잠시 입을 다물고 여명을 바라보았다.

여명은 매우 사료 깊은 여자다. 허투루 예단하거나 절대 나서는 법이 없다. 따라서 그가 총기 구입을 말하는 것은 필시 말못할 내막이 있기 때문이다 

스승이 말했다.

총은 일본에서 구입을 해야겠군.”

물론이 예요.”

스승이 말했다.

어떤 종류가 필요한가?”

여명이 답했다.

브라우닝 하이파워가 필요해요. 가볍고 명중률이 뛰어나니까요.”

여명의 말대로 브라우닝 하이파워 자동 권총은 살상 무기로 최적화 된 흉기였다.

10센티미터에 불과한 총신을 비롯해서 작고 가볍다.

총에는 모두 열여덟 발의 9밀리 파라블럼 실탄이 장전된다.

탄창에 열일곱 발, 약실에 한발.권총에는 수동안전장치가 없다.

눈치가 빠른 스승이 말했다.

오사카에 간다고 했지?”

그래요.”

내가 CIA에 몸담고 있던 시절 그곳에서도 잠시 활동 했었지.오사카에 도착하는 대로 내가 알려주는 연락처에 전화를 하라구. 상대는 재일교포 2세야.한약방을 하는 친구지. 그대가 원하는 장난감을 건네 줄거야.”

여명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니. 고마워요. 그런데 아직도 독신인가요?”

스승이 정색한 어투로 답했다.

, 나한테 시집오려고….”

6

노인이 피살된 지 어느 덧 사흘이 지났다.

하지만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사건 담당 관할인 삿포로 경찰서는 시간이 지날 수록 살인사건이 깊은 수렁에 빠지자 한 숨만 내쉬며 노심초사할 뿐이었다.

주검은 명백한데 단서는 미미했다. 말 그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현장에서 수거한 탄피와 공원에 설치한 CCTV 뿐이었다.

홋카이도 전역을 커버하는 로컬 언론도 공권력의 수사가 겉돌자 경찰을 질타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일본경찰력의 수사력이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언론은 사설을 통해서도 공권력의 조속한 범인 검거를 촉구하는 한편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어 시민들의 제보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피력했다.

언론의 보도가 나가자 삿포로 시의회에서도 임시회의를 소집했다.

이들 시의회 의원들은 조속한 범인 검거를 위해서는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어야 한다며 경찰책임자를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경찰은 당장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수사에 박차를 가하라고 채근거렸다.

한편 일본 내각 부 소속 국가공안위원회는 이례적으로 노인 살해사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공안위 고위 간부인 가네코 겐지로()는 성명을 통해 삿포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라고 전제한 뒤 이 사건은 여타 사건과는 달리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피살된 고인은 일본을 위해 살신성인한 인물이라고 추켜세우고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사법당국은 혼신을 다해 범인을 검거할 것을 촉구했다.

또 한 범인의 조속한 검거를 위해 1억엔의 현상금을 내건다고 덧붙였다.

한편 자동 권총으로 노인을 저격한 괴한은 공원내 여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흉상에서 화장실까지 거리는 대략 5백여미터였다.

괴한이 소비한 시간은 3분여 정도였다.

여자 화장실로 들어선 괴한은 칸막이를 열고 안으로 들어선 뒤 걸치고 있던 옷과 모자 신발 안경 등 모든 것을 벗었다.

침착하고 재빠른 행동이었다.

괴한은 걸치고 있던 모든 것을 벗고 난 뒤 테니스 숄더백에서 청바지와 노스 페이스 다운 파커를 꺼내 입고 신발도 가죽신 단화로 갈아 신었다.

바짝 말아서 뒤로 묶었던 생머리도 자연스럽게 풀어 내렸다.

추리닝을 비롯한 모든 것은 숄더백에 구겨 넣었다.

탄창에 남아있던 총알은 모두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려 보냈다.

권총도 모두 분해했다.

모두 일곱 조각이었다.

화장실에서 소비한 시간은 약 10.

괴한은 더 이상 지체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상기했다.

따라서 몸놀림이 더욱 민첩해 졌다.

모든 것이 마무리될 즈음 밖에서 신경질적으로 노크를 했다.

괴한은 헛기침으로 응대했다.

테니스 숄더백의 지퍼가 단단히 잠긴 것을 확인한 괴한은 변기의 물을 내리고 태연스레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5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입술을 비틀고 두 손으로 바짓단 앞을 움켜쥐고 있었다.

괴한은 여자를 향해 눈인사를 건네고는 화장실 구석에 놓인 플라스틱 쓰레기 통 안에 테니스 숄더백을 쑤셔 넣었다.

분해한 권총은 검은색 비닐봉투에 넣어 질끈 묶은 뒤 두루마리 종이핸드타올이 걸린 스테인리스 휴지통에 버렸다.

역시 침착하고 신속한 손놀림이었다.

화장실에서 일을 처리한 괴한은 재빠른 걸음으로 공원 입구를 벗어났다.

괴한이 공원을 벗어날 즈음 삿포로 경찰 소속 순찰차가 경광들을 번쩍이며 공원으로 들어섰다.

괴한은 순찰차의 뒷모습을 곁눈질 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몸을 실었다.

갈색 뿔테 안경을 착용한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괴한을 훔치며 말했다.

“어디로 뫼 실까요?”

일본어였다.

괴한이 영어로 말했다.

퍼시픽 호텔로 가주세요.”

운전기사가 다시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어눌한 영어로 말했다.

언더스투드!”

(계속)

이산해 / 추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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