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이타가

2007.10.28 02:03

성민희 조회 수:890 추천:68

 

나는 왜 어이타가

 

 

   남편은 보험과 재정전문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해마다 각 메이저 회사에서 연례 대표자 컨퍼런스에 참석하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초청장이 왔다. 플로리다 반도 동쪽 잭슨빌 (Jacksonville)에서 약 40분간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조그만 섬, 아멜리아 아일랜드 (Amelia Island)라고 한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밤 1240분이라 느지막이 공항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터미널에 앉아 커피 한 잔으로 졸음을 쫒고 있는데, 어메리칸 에어(American Air)가 연착이란다. 한 밤중인데도 더 기다려야 한다니. 사람들은 들고 있던 가방과 함께 긴장도 내려놓는다. 대합실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바닥으로 길게 다리를 뻗대고 누워 있는 사람, 팔걸이에 얼굴을 옆으로 묻고 엎드린 사람,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사람 등, 기다림에 지친 칙칙한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번쩍 우리의 졸음을 깨웠다. 돌아보니 네 명의 한국 남녀 대학생들이 바닥에 퍼질고 앉아 고스톱을 친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웃통도 다 벗어던지고 얼굴도 벌겋다. 한국 사람이라곤 그들 일행과 우리 부부 뿐인데 대합실이 다 울리도록 왁왁 대며 한국말로 점수를 따지는 모습이 무척 부끄럽다. 유학생들인 듯한데. 미국의 사려 깊은 공중 도덕심도 함께 배워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아들이 고등학교 시절에 말했다. 전체 2,300명 중 한인이 약 1,000명 정도 다니는 고등학교는 한국서 온 유학생들 때문에 부끄러울 때가 많다고 했다. 한국 아이들이 교정에서 한국말로 오빠야, 언니야하고 마구 부르고 다니면 자기가 창피하다고 했다. 너랑은 상관없잖아. 걔들은 네 친구도 아닌데 뭐. 그래도, 우리는 같은 한국 사람이잖아. 다른 나라 애들이 똑같은 한국 사람으로 보잖아. 허긴 그랬다. 속이야 어떻던 겉은 같은 한국 사람이니까. 지성인이라는 대학생들이 이 지경인가 싶어 혀를 끌끌 찼다. 외국에서 다닐 때는 한국이란 이름의 명찰을 달고 있다는 자각이 필요할 것 같다.

 

   늦게 출발한 비행기 탓에 달라스(Dallas) 공항은 갈아 탈 비행기 시간을 겨우 30분 남겨놓고 도착 되었다. 예정대로라면 조금 쉬었다가도 잭슨빌(Jacksonville) 행을 충분히 탈수 있는데, 이렇게 늦었으니 터미널을 잘못 헤매다간 큰일이다 싶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기내 방송으로 다음 행선지로 가는 터미널 번호를 불러주는데 터미널이 한 두 곳이 아니다. 이곳이 그렇게 많은 지역을 연결시켜주는 경유지인지 놀라웠다. 한참 만에 불리어진 우리의 목적지는 터미널 C35. 내리자마자 안내 팻말을 따라 C1을 거쳐서 C2, C3. 한참을 뛰어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35가 나올지 한심하다. 마구 뛴다 해도 다음 비행기를 탈 자신이 없다. 적막한 새벽의 공항 복도를 두 아시안 중년부부가 체면도 없이 쿵쿵거리며 뛴다. 밤새 시달린 꾀죄죄한 남편이 연신 뒤를 돌아보며, 화장이 다 지워진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를 휘날리는 나를 재촉한다. 부지런히 뛰어 가다보니 C12-27까지, C28-32까지 가는 방향이 전혀 달라진다. 이럴 때는 머리가 빨리 돌아 눈으로 보는 동시에 앞으로 해야 할 일도 함께 그려야 한다. 우리 번호를 찾아 달려가니 화살표가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우리가 지금 Guest lounge로 잘못 가고 있나 싶다. 그러나 달리 어찌해 볼 재간이 없다. 가라는 대로 갈 수 밖에는. 부지런히 올라가 보니 Skylink Train이라는 실내 기차가 다닌다. 비행기는 고사하고 난데없이 공항 청사 2층에 웬 기차? 갈수록 태산이다. 가슴조차도 두근거리는데 행선지별로 기차 타는 정거장도 몇 군데나 된다. 공중에서 돌며 공원 전체를 구경시켜 주기도 하고 테마별 장소 이동도 쉽게 해주던 디즈니랜드 열차가 생각난다.

2분쯤 갔을까? 내려서 화살표를 따라 가니 도로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란다. 이제는 아찔아찔 스릴마저 느껴진다. 헐떡대며 갔다. 너무나 멀리 있을 걸로 생각한 C35가 바로 나타났다. 성공! 성공!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우리를 여자 승무원 둘이서 손뼉을 치며 반가워한다. 우리가 들어가자 말자 문은 닫히고. 머리까지 올라온 심장을 갈아 앉히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공항이 얼마나 크기에 실내 기차로 이동을 시킬까 싶어 창밖을 내다봤다. 구름다리 같은 것이 공설 운동장만한 건물 두 동을 서로 연결시켜 주고, 그 다리 위로 기차가 다닌다. 두 터미널 지붕의 크기가 기차를 타지 않고는 이동이 전혀 불가능하겠다. 과연 세계로 비행기를 날리는 국제공항다웠다. 많은 곳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거대한 곳은 처음이다.

"리조트로 가는 비행기라 수준이 확실히 다르네." 남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사람들이 깔끔하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비행기도 고급스럽다. 세 시간을 달려 플로리다로 가는데, 미시시피 강을 지나간다고 했다. 뿌옇게 밝아지는 하늘 아래 희미하게 강줄기가 보인다.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강이라고 하지, 아마 땅에서 바라보면 바다라고 할 것 같다.

 

   도착하니 회사 직원이 팻말을 들고 서있다. 많이 기다렸나본데 우리 외에도 세 쌍의 부부가 늦게 도착해서 부담이 조금 덜하다. 금발머리에 멋지게 웨이브를 준 여직원이 리무진 문을 닫으며 40분만 달리면 된다고 한다. 마음 좋게 생긴 죠(Joe)가 운전대를 잡자마자 휘파람을 휙휙 날리며 콧노래를 부른다.

플로리다를 햇빛 찬란한 주 Sun Shine State라고도 부른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이 빽빽하게 서 있는 나무들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차가운 얼음물에 담구었다가 꺼내 놓은 듯 푸들푸들 살아서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은 꽃나무와 들풀. 엘에이에서는 볼 수 없는 싱그러운 풍경이다.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러간 남편이 방 열쇠도 못 받고 돌아왔다. 눈이 둥그레진 내게 묻는다. "더블베드 두 개로 하면 지금 체크 인 되는데 킹사이즈 베드는 두 시간 후에 준비 된단다. 우짜꼬?" 옛날에는 싱글 침대 두 개든, 벽이 앞을 꽉 막은 구석방이든 운명인줄 알고 묵었는데, 이제는 우리도 약아졌다. "당연히 킹사이즈 방이지. 그리고 바다 경치로 앞이 확 트인 방으로 달라고 해요오~"


   Hospitality 홀에는 접수 받는 한 편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뷔페로 준비되었다. 샌드위치를 들고 정원으로 나가니 차끈한 바다가 하늘을 가득 안고 출렁이며 잠도 못 자고 달려온 우리들의 고생을 날려 보내준다. 정원 곳곳에 오렌지 나무가 보인다. 오렌지 꽃이 플로리다 주꽃이라 그런지 정말 많이 심었다. 오렌지꽃 향기가 바람에 날려 호텔 주위를 온통 감싸고 있는 느낌이다. 이 꽃에서 네롤리 오일 향수를 추출한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티 없이 맑은 순백의 꽃이 신부의 부케와 화관을 만드는데 많이 쓰이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잘 손질된 흙더미 위로 키 작은 향나무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앙증맞게 서 있다. 선명한 노랑, 보라, 빨간색의 팬지꽃과 이름 모를 꽃들이 몽글몽글 피어 푸른 잔디를 더욱 푸르게 꾸며준다. 옛날 푸에토리코의 총독이 탐험 차 왔다가, 온 천지에 만발한 꽃을 보고 감탄하여 이 땅 이름을 꽃이 만발하다는 뜻의 La Florida라고 지었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다. 사람이 걸어 다니는 보도 외에는 모두 나지막한 꽃으로 마치 벨벳을 깔아놓은 것 같다. 덕분에 내 마음에도 예쁜 꽃들이 송송 피어난다. 인제부터 며칠간 몸과 마음을 모두 펼쳐 두고 포슬포슬 말려야지.


   방은 823. 원하는 대로 180도로 펼쳐진 바다가 보이고,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우리들의 천국이다. 발코니에 나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아까 차를 타고 오며 만났던 숲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또 다른 초록의 바다가 되어 출렁인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Ballroom으로 내려갔다. 가슴에 명찰을 단 사람들이 한 둘씩 모여드는데 낯선 사람이 많다. 올해는 두 회사가 합병되는 바람에 임원들의 얼굴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사진사도 우리들이 별명을 불러주던 히스패닉 계의 Mr. Flash가 아니고 깍쟁이처럼 생긴 백인이니. 들이미는 카메라 앞에서 미소 짓고 서있기가 몹시 쑥스럽고 거북하다. 실내 장식 주제는 무엇인지 테이블마다 놓여진 장식이 예사롭지 않다. 투명한 큰 화병에 당근이나 오이, 양배추가 물속에 잠겨 말간 얼굴로 바깥을 내다보고, 그 위로 갖가지 꽃과 야채들이 특유의 모양으로 조화를 이뤄 눈을 즐겁게 해준다. 디자이너가 보통 미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꽃병 사이사이에 피워둔 촛불도 특이하여 테이블마다 돌면서 이것 구경만 해도 컨퍼런스에 온 보람이 있을 것 같다.

   군데군데 불을 피워 고기를 굽는 냄새가 섬 전체를 가득 채운다. 배고픈 남자들이 고깃간(?) 앞에 접시를 들고 서서 껄떡거리자 순하디 순한 요리사가 큰 손으로 한 웅큼 덜어서 접시에 담아준다. 멀쩡한 신사가 고깃덩이 하나를 받고는 입이 함지박만해져서 돌아 나오는데 영락없는 개구장이다. 나이만 먹었지 마음은 스무 살인 것 같다.

   섬이라서 그런지 차려진 음식이 거의 다 해물이다. 먹기 좋게 집게 위로 소복한 살이 나오도록 잘 발라진 게와 등이 갈라진 손바닥만한 가재가 커다란 컨테이너에 수북이 쌓여있고. 숯불 지나간 자국이 선명한 왕새우와 굴이 눈길을 잡는다.

   오늘도 역시 뷔페 한 곁 제일 좋은 장소에 스시가 버티고 있다. 무늬만 스시지 미국 요리사가 만든 것이라 밥도 냉장고에서 나온 것처럼 딱딱하고 작은 생선 조각이 덮어져(발라져있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있는데, 그나마도 싱싱하지도 않다. 그래도 격식은 갖춘다고 겨자에 간장과 젓가락은 꼭 곁에 둔다. 젓가락을 엄지와 중지사이에 사이에 끼우고도 두 짝이 뭉쳐진 그대로 스시를 푹 찔러서 가져가는 사람. 아예 손바닥에 두 젓가락을 막 쥐고는 숟가락으로 퍼 듯이 퍼 올리는 사람.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젓가락 따라 고개가 막 돌아가도 스시를 입에 집어넣는 얼굴은 환하다. 맛으로 먹는지 멋으로 먹는지 하여튼 많이도 갖다 먹는다.

스시는 김밥에 비하면 훨씬 맛이 못한데도 이렇게 대접을 받고, 김밥을 설명할 때도 '코리언 스시' 하며 들먹여야 이해를 하니 어떨 땐 질투가 난다. 좋은 물건을 암만 만들어도 홍보 능력이 없으면 빛을 못 보듯, 나라 고유 음식도 상품 못지않게 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계속적인 홍보가 필요하다. 돌아보면 뭐든 일본에 뒤지는 것 같아 자존심 상할 때가 많은데 그나마 다행인 건 미국의 건강 전문지 '헬스'가 스페인의 올리브유, 일본의 낫토, 인도의 렌틸 콩, 그리스의 요구르트와 함께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김치를 뽑아 주었다는 거다. 거기다 요즘은 또 순두부가 건강뿐 아니라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꼽혀 순두부 전문 식당 손님의 20% 정도는 외국 사람들이라니, 영화나 드라마, 노래로 일어난 한류 열풍에 음식까지 가세해줄까 기대가 된다. 그때에는 이런 뷔페에 갈비 뿐 아니라 김밥과 만두, 잡채가 그득히 담겨져 나와 음식 이름을 가르쳐주며 으시댈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신난다. 미국 사람들한테 우리가 발음 교정을 해줄 수 있다니.

   사람들은 모두 맛있는 것 골라 먹느라 바쁜데 피곤한 나는 접시를 들고 이곳저곳 기웃거려도 먹고 싶은 게 없다. 올리브유에 소금과 후추를 넣어 볶은 가지나물(?)과 해물 수프, 껍질 채 구운 굴로 배를 채웠다. 마가리타와 선라이즈를 이 사람 저 사람이 반갑다며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셨더니 얼큰하니 취한다. 파도 소리도 좋고, 음악 소리도 좋고,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조차 정다운 취기다.

   와인 한잔을 들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해운대의 부서지는 파도 아래 보드라운 줄무늬를 그리던 모래톱이 생각난다.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흥얼거려지는 노래가 있다. 마산 앞바다 합포만(合浦灣)을 그리워하며 쓴 시()70여 년이 지난 지금 대서양을 바라보며 부른다. 그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도 저토록 고향이 멀고 그리웠을까. 사람들은 쟌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어깨동무하며 불러대는데 우리는 같이 부를 노래도 손잡고 흥겨워 할 친구도 없다. 반갑다며 볼을 맞대고 정다워 해도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이방인이 되어버리는 우리.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를 부르던 정서가 'Itsy bitsy spider climbing up the spout'를 부르며 자란 정서와 어떻게 취흥을 나눌 수 있을까.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파도소리를 반주 삼아 가고파를 큰 소리로 불러본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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