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지나가는 병

2007.11.01 09:10

성민희 조회 수:864 추천:82


사춘기, 지나가는 병

 

  멸치로 국물을 낸 담백한 국물에 김치 송송 썰어 얹은 잔치국수만 보면 신나하는 남편. 이번 주말에도 잔치국수를 만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영 맛이 나지 않는다. 국물 맛이 왜 이렇지? 맥 빠져하는 남편의 말에 나는 깔깔 웃었다. 들켰구나. 다시멸치가 없어서 볶음멸치로 국물을 내었거든. 에이 참, 볶음멸치더러 국물 맛을 내라고 하면 어떻게 해? 국물을 낼 수 없는 멸치인 줄 뻔히 알면서 물에 집어놓고 훌렁훌렁 저었으니 멸치가 나를 보고 얼마나 한심해 했을까. "아줌마, 나는 볶음용이라오. 아무리 애써도 국물이 안 우러나요." 능력이 없는 멸치를 보고 억지를 부리는 지금이나, 한창 사춘기를 앓고 있는 아들에게 모범생이 되어라, 공부 열심히 해라 닦달하던 내 모습이 똑 같아 나는 혼자 픽 웃었다.

 

  그때는 정말 세월이 느리고 칙칙했다. 사근사근 재미있던 아들이 왜 벙어리가 되었을까. 깨끗하던 아들의 방이 어쩌다 발 디딜 틈 없는 고물상이 되어버렸을까. 엄마가 최고라며 품에 안겨오던 아들이 왜 나를 벌레 보듯 피할까. 내 말은 절대로, 절대로 안 듣는 걸까. 저 애가 나를 이렇게 괴롭힐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배신감과 미움으로 많이도 울었다.

 너무 답답해서 엄마들끼리 모여서 서로의 한숨을 섞기도 했고 교육전문가를 모시고 세미나도 열었다. 이런저런 나눔과 교육 세미나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저 애는 사춘기라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다. 사람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가 다 겪고 지나가야하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

  환자는 얼마나 불쌍한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답답한 사람이다. 열이 펄펄 나고 관절이 쑤시는 사람한테 일어나서 청소하고 밥 하라고 하면? 당연히 할 수 없을 터. 그래, 제 딴에는 열심히 투병하고 있는 아들한테 정상 때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는 내가 잘못이다. 인제부터 간병인의 자세로 아들의 투병을 돕자. 참자. 참자. 꾹 참자.

이후로 남편과 나는 화가 날 때마다 서로 눈을 깜빡이며 환자인데 잘 모시자,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들어오면 참 멋있다고 감탄해주고, 새벽 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친구랑 통화를 해도 모른 척 했다. 참 쉽지 않은 가면을 얼굴에 쓰고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잘 했던 것 같다. 주위에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한 엄마와 부딪히다가 부러져버린 가정이 많다. 아주 나쁜 길로 가 버린 아이도 있고, 아직도 부모와 화해를 하지 못하고 사는 아이도 있다. 방학이 되어도 집에 오지 않고 대학교 근처에서 지내는 친구가 있다는 아들의 말을 들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시간은 반드시 흘러가고 거기에 실려서 아이들의 사춘기 시절도 끝이 난다. 부모들은 아이가 변했다고 하지만 변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옛날 중학생 때에 수첩에 적어 지니고 다녔던 데미안의 말을 나는 아이들의 사춘기를 겪으면서 종종 되뇌며 참았다.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사람도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겪으며 깨뜨려야 할 것을 깨뜨리는 중이다. 다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가슴을 앓고 있을 엄마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사춘기는 절대 못 고치는 불치의 병도 아니고 영원히 계속되는 지병도 아니다. 시간과 사랑이 완치 시켜주는 아주아주 순진하고 착한 병이니 기다리라는 말을 해주고 싶고, 아이와 같은 수준이 되어 싸워서 평생 상처로 남을 일 만들지 말라는 말도 하고 싶다. 아이들이 듣든 말든 좋은 말을 자꾸만 해주면, 콩나물 사이로 물이 다 빠져나가 버렸는데도 어느 날 콩나물이 자라있듯, 아이들의 마음 밭에 뿌려진 엄마의 가르침이 싹을 틔우고 있는 걸 보게 될 거라는 희망도 주고 싶다. 부모 자식 간에 끈끈한 사랑을 쌓을 소중한 시기를 다 놓쳐버리고, 대학 보내놓고 시시때때 뒤돌아보며 후회하는 엄마는 결코 되지 말라는 말도 함께 하고 싶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한국일보 교육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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