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하나 더 얹으며

2008.03.13 10:16

성민희 조회 수:840 추천:87



봄볕이 나른한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오늘 뭐 잊어버린 것 없어?” “ 아니.” “오늘이 며칠이지?” “3월 6일” 정녕 이 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면, 부자(父子)간에 마땅히 있었어야 할 모종의 의논도 없었었다는 결론인데. “3월 6일! 그래도 모르겠냐?” 무표정한 녀석의 얼굴에다 내 얼굴을 갖다대고 버럭거렸다. 그제서야 눈이 휘둥그레져서 하는 말 “아하, 엄마 생일.” 일부러 고개까지 뒤로 젖혀가며 놀란 척 제스처가 가관이다. “정말 너무 했다. 어쩌면 엄마 생일을 잊어버릴 수가 있니?” “미안 미안. 엄마.” 억지로 웃음을 흘리며 나를 껴안는 녀석을 홀겨보며 냉정히 말했다. “미안할 것 없다. 아직도 오늘이 지나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그냥 미안하다는 말로만 때울려고 했던지, 깜짝 놀라 나를 쳐다 본다. “아니, 엄마. 나는 운전도 못하고, 어디 나가서 샤핑도 못하는데---” “못 나가면 할 수 없지. 현금으로 줘도 괜챦아.” 한 대 얻어 맞은 듯, 쳐다보는 눈빛이 심각하다 “하여튼 알아서 해라. 나는 오늘 밤 12시까지 기다릴테니까.” 이층으로 올라가는 뒤통수가 상당히 복잡해 보인다. 아들이 제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나니 딸 생각이 났다. 이상하게 올해는 대학 간 딸도 종무 소식이다. 그리고 친구들도. 작년에는 캐나다 친구에게서 전화선을 타고 온 해피 벌스 데이 노래로 하루를 열고, 오후에는 딸이 보낸 카드며 옷을 선물로 받고, 동네 친구가 배달 시켜준 빨갛고 눈부신 장미 다발에다, 남편이 주는 두툼한 돈 봉투와 멋진 저녁 식사에 행복했었는데. 도데체 올해는 왜 이렇게 모두들 하나같이 조용한가? (내 생일이 다른 날로 바뀌었나?)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e-mail을 열었더니 ‘오늘은 큰 날이예요~~’ 번역도 우습게 된 한국말이 딸의 이름으로 와 있다. 모니터 안에는 코끼리와 원숭이와 사슴과 곰과, 동물이란 동물은 모두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모습으로 애교를 떨며 ‘생일 축하해요. 오늘은 큰 날이예요. 사랑해요’ 등등 색깔도 호화찬란한 피킷을 하나씩 들고 서서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고 난리가 났다. 지금 한창 중간 고사 중이라고, 메일 보낼 때마다 힘若윱?잠이 모자라느니 어리광을 부리던 애가 어떻게 카드 보낼 생각을 했을까. (역시 딸이 좋아.) 저녁에 들어올 남편과 아들에게 시위할 양으로 프린터 해서 식탁 위에다 올려 놓았다. 간식을 먹은 아들이 학교에서 레슬링 연습을 해야한다기에 데려다주고 오니 집이 텅 빈 느낌이다. 혼자 창 밖을 쳐다보고 앉아 있노라니, 오늘 이 남자는 내 생일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럴게 아니라 회사로 전화를 걸어봐야지.) “오늘 일찍 나가셨는데요.” 여직원의 말이 몹시 반갑다. “그럼 다시 안 들어오신대요?” “아마 바로 퇴근 하셨을거예요.” (그러면 그렇지. 내 생일을 잊었을리가 있나. 나를 놀라게 해주려고? 그래, 꽃다발이랑 선물을 사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속으로 후후 웃으며 나는 신이 났다.

기다리는 시간이 어찌 이리도 지루한지. 드디어 뉘엿뉘엿 해 떨어지는 소리,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비발디의‘봄’을 온 집안 가득 채우고 있는데 드르륵 차고문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어제꼈는데, 기분이 썰렁하다. 표정이 전날과 똑 같고,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양복 저고리를 꺼내오는 모습이, 들고 들어올 다른 건 아무 것도 없는 듯한 분위기다. 재빠르게 차안을 살펴봐도 핑크빛으로 색깔이 튀는 그 어떤 건 전혀 없다. 몰래 트렁크까지 열어봐도 도무지 뭔가가 보이질 않는다.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니 작년 발렌타인스 데이가 떠올랐다. (아 참, 그때 차고에 있는 냉장고에 꽃을 미리 사 뒀다가 짠! 하고 꺼내 주었었지.) 나는 차고 한켠에 놓인 냉장고 문을 잽싸열었다. 찬 기운이 확 끼쳐지는 그 곳에는 김치와 허연 우유통이 무슨 일이냐는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고 있을 뿐 다른 건 아무 것도 없다. 실망스럽다. 그러나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일찍 집에 왔으니 저녁 먹으러 가자고는 하겠지. 이층으로 올라간 남편, 옷을 갈아입는지 기척이 없더니 드디어 발 씻는 물소리가 쏴아 났다. (어느 식당으로 갈까? 아무말 말고 순순히 따라가? 기분 나쁘다고 한마디 해?) 혼자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쿵쾅쿵쾅 발소리도 요란스레 내려오는 이 남자, 너무도 기가 막히게 잠옷을 터억 입고 내려왔다. “배 고파 죽겠다. 빨리 밥 먹자.” 잠옷 소매를 둥둥 걷으며 식탁에 앉는 남편. “왜 그러고 서 있어? 빨리 밥 줘!” 갑자기 당한, 전혀 밑그림으로도 그려보지 않았던 상황이라 말문을 열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꼼짝 않고 서있는 모습에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는지 집안을 한번 휙 둘러보더니 탁자 위에 놓인 딸의 카드를 발견했다. 신기해하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비치며 슬그머니 밀어놓는다. “아 참, 미안하다. 내가 그만 깜빡 했네.” “깜빡하다니, 와이프가 열이요, 스물이요, 꼴랑 하나인데 그래, 그것도 못 챙겨줘?” 이상하다. 화가 난 척은 하지만 화는 조금도 나지 않는다. “미안하다. 그냥. --- 그러면 이제부터 내 생일도 그냥 잊고 지나가버려라.” “이렇게 넘어가자고? “ “어떻게 해, 늦었는데. 나도 그냥 집으로 와 버렸고.” “그럼 할 수 없지. 현금이라도 접수해야지 뭐. 현금으로 주슈.” 전혀 뜻밖의 공격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머리를 빨리도 굴려서는 “이번은 그냥 용서해 주라, 좀 있으면 세금도 내야하고 이번 달부터는 직원들 월급도 좀 올려주기로 했고 ...... 잉잉잉” 이 무슨 얼렁뚱땅인가. “그럼 할 수 없다. 저녁이라도 먹으러 갑시다.” “지금?” “그럼, 내 생일에도 내가 밥을 해야 해?“ 이왕 엎드려 절 받기로 한 이상 완전 안면 몰수다. “지독하다. 그래 알았다. 나가자.” 남편은 옷을 갈아입으러 고픈 배를 주려 안고 이층으로 도로 올라갔다. (에구, 이런 며느리는 제발 안 봐야할텐데.) 너무했나 싶기도 하고, 이제와서 또 새삼스레 상 차리기도 싫고. 나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뒤죽박죽인데 아들이 친구 차를 타고 돌아왔다. 아들도 저녁 먹으러 간다니까 다행이다 싶은지 한숨을 쉰다. “어디로 갈까?” 남편의 음성이 몹시 피곤하다. “그냥 홈 타운 뷔페로 갑시다.” 대중 음식점으로 가자고 하니 두 사람 다 놀란다. 남편은 그나마 가깝고 손 쉬운 곳에 가자고 하니 안심한 분위기고, 아들은 미안한 표정이다. “엄마, 오늘은 간단히 거기서 먹고 다음에 좋은 집에 가서 먹자.” (그래, 그래, 다음에는 먹거나 말거나 오늘 저녁만 집에서 안해도 나는 땡큐다.) 속으로는 손뼉을 치면서도 크게 선심 쓴 척 인자한 웃음을 얼굴에 묻히고 식당에 갔다.


그럭저럭 7시가 넘고 8시가 다 됐는데, 식당 안은 모두들 먹느라 시끌벅적이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샐러드를 한 접시 갖고 와서 먹는데 컴컴한 변소 쪽 구석으로 웨이트리스들이 몰려가더니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나왔다. (웬 생일 파티를 이 늦은 시각에------ 쯧쯧쯧) 속으로 딱해하고 있는데 “해피 벌스데이 투 유~~” 노래를 다 부른 웨이트리스들이 이번에는 다른 테이블로 가더니 거기서 또 노래를 불렀다. “와, 저기도 생일이구나.” 먹던 포크를 던져두고 목을 빼며 그 쪽을 보던 남편이 “해피 벌스 데이 투 유” 노래가 끝나자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흥얼거린다. “여기도요----“ “해피 벌스 데이 투 유” “여기도요-----“ 인제는 아예 팔까지 쭈욱 뻗어 올리며 장난이다. “저 사람들 여기로도 불러올까? 당신도 생일 노래 들어야지? 이 날이 좋은 날인가보다. 생일인 사람이 많네.” 아들과 남편은 신이 났다. 허나 이럴 때일수록 짚을 건 짚고 가야지. 나는 야무지게 외쳤다. “아무도 3월 6일을 기억 못 했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이번 생일은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지만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앗~ ” “얍! 조심하겠습니다.”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때는 그냥 안 넘어갈거다앗~” “얍! 명심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내 생일 잊어버리면 그 해에는 우리 식구들 모두 생일은 없는거다?” “얍, 명심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일 저녁을 얻어 먹고 왔다는 건데. 참 웃기는 건. 엎드려 절을 받았는데도 하나도 속상하지 않다는 점이다. 옛날 같으면 무심한 식구들이 섭섭해 며칠 동안 몹시도 속을 끓였을텐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생일 선물 하나 못 받고 싸구려 음식점에 가서 저녁 한 끼로 때웠는데도 돌아오는 내 마음은 기쁘다. 남편도 죄를 탕감 받은 기분인지 예전처럼 폼 잡고, 아들도 50불 넣은 봉투 하나 주고는 엄마가 행복해하는 것 같아 저도 행복하다. 지독하니 어쩌니 하면서도 편안해 하는 식구들의 모습이 보기 좋은 나를 보며, 나도 인제는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깨끗하던 볼에 기미가 끼고 눈가에 입가에 주름이 잡히? 암만 예쁜 반지를 껴도 예뻐 보이지 않는 손을 쳐다보며, 세월이 가면서 새겨준 주름만큼 내 마음에도 주름이 잡혔나보다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주름 속에는 아팠던 상처들, 기뻤던 기억들이 자리잡고 앉아서, 내 앞에 만나지는 새로운 일상사들을 처음 만나는 낯설음 없이 받아들이고 있나보다. 가슴 아픈 일도 조금 덜 아프게, 펄펄 뛰며 분노할 일도 한번 더 생각해보게, 미워할 일도 쉽게 잊어버리게 그리고 남의 맘도 내 맘처럼 들여다 볼 줄 알게. 나이를 먹는게 마냥 슬프고 안타깝기만 하더니 인제는 그렇지가 않다. 마음의 색깔이 쉽게쉽게 변하지 않아 가슴 두근거리는 박자가 조금 더 느려져 편안하고 평온하다. 이래서 사람들은 나이 먹은 사람의 지혜를 빌린다고 하나 보다. 한 해가 또 가고, 내 삶의 언저리에 세월이 하나 더 보태졌는데. 얹어진 나이만큼 더 무겁게 사랑하고 더 넓게 향기를 내는 중후한 중년을 살고 싶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내일은 해마다 생일을 챙겨주다가 올해는 깜빡 잊고 있는 친구에게 내가 먼저 전화 해야겠다. “얘, 올해는 왜 이리 조용하냐? 내 생일 안 챙겨 줄꺼야?” 히히히 헤프게 웃으며 우리는 만나서 즐겁겠지.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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