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냥 그런 맛인가봐

2008.07.23 04:20

성민희 조회 수:876 추천:105

그냥 그런 맛인가봐

 

삼촌네 회사에 출근하기로 한 아들 녀석. 아침마다 부시시한 얼굴에 물이 뚝뚝 흐를 것 같은 젖은 머리로 이층에서 내려온다. 제발 좀 일찍 자라고 밤마다 사정을 해도 새벽 한 두시나 되어서 자는 모양이니, 진짜 직장에 가서도 저러면 어쩌나 싶어 버릇을 고칠 양으로 오늘 아침에는 깨우지도 않았다.

출근을 했어도 한참 되었을 시간에 넥타이를 손에 쥐고 뛰어내려온 아들. 아침 먹을 시간 없으니까 싸달라고 한다. 남편의 아침은 현미 잡곡떡과 잡곡미숫가루 한 숟가락 넣은 과일 쥬스. 그리고 사과 한 알로 간단하지만 아들의 아침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들의 출근이 시작되고 부터는 느긋이 신문을 뒤적이고 있을 이른 아침 시각이 바빠졌다.

오늘은 영양 만점, 맛 만점의 보들보들한 오물렛을 만들기 위해 달걀을 훌훌 풀고 토마토, 아보카도, 양파, 샐러리에 햄, 올리브까지 넣어서 섞었다. 조심조심 후라이팬에 부으려는 순간 블루베리가 떠올랐다. 냉장고를 뒤져 그것까지 섞으니 색깔이 빨강, 초록, 보라. 영양덩어리가 둥둥 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허둥지둥 내려온 아들 녀석. 마른 논에 물이 들어가듯이 술렁술렁 먹어주겠지 기대했는데. 후후 불어가며 맛있다를 연발하기는커녕 플라스틱 그릇에 인정머리 없이 탁 부어버린다. 오물렛 큰 덩치가 쑤욱 밀려서 프라스틱 통에 들어가니 보라색 보드랍던 블루베리가 터져서 접시에 길게 선을 그리며 흔적을 남긴다. 저 아까운 걸 어쩌나. 식어버리면 맛도 없을 텐데. 안타까운 내 맘도 같이 접시에 줄을 긋고 플라스틱 통 속으로 들어가는데. 엄마! 누가 오물렛에 블루베리를 넣는대요. 이거 넣으면 맛이 엉망 되잖아.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소리? 내가 미국 식당에서 블루베리 든 걸 먹은 게 몇 번인데? 얘가 뭐라고 하는거야. 블루베리가 들어가면 얼마나 맛있는데. 영양도 많고. 아들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얘가 나를 촌놈 취급하고 있네. 나도 미국 식당에서 먹어본 사람인데. IHOP 에 가봐라. 거기가면 블루베리 들어있는 게 얼마나 인기인데. 플라스틱 통을 확 나꿔채며 아들이 쿡 웃는다. 엄마, 그건 팬케익이잖아. 갑자기 머리가 띵하며 한 바퀴를 돌고 제자리를 찾았다. 커다란 접시 위에 앉은 노릿노릿 잘 익은 팬케익 사이에 박혀있는 블루베리가 보인다. 아하. 이런 주책. 그렇지. 그건 팬케익이었지.

 

저녁 식사 시간. 웃을 양으로 아침에 있었던 나의 실수담을 이야기 했다. 거기다 덧붙여 어제 아침에는 잘 먹더니 오늘은 트집을 잡더라고도. 같이 웃던 아들. 어제는 블루베리가 든 오물렛을 보고 한심했지만, 즉시 말하면 엄마 마음이 아플까봐 아무 말도 안 했단다. 엄마도 입이 있으니 먹어보면 스스로 알게 될 거라고. 그런데 또 넣었잖아. 오늘은 더 많이 넣었더라고. 가만히 보니 내일도 그럴 것 같더라니까. 딸이 배를 잡고 웃었다. 엄마는 원래 자기들이 잘 먹는다 싶으면 일주일 내내 내어 놓을 테니 일찌감치 바로 잘 잡았다며 서로 마주 보고 깔깔거린다. 얼굴이 벌개진 나를 보기가 딱했던지 남편이 한마디 거든다. 나는 맛있게 먹었는데? 아빠. 맛이 이상하지 않았어요? 아니. 나는 본래 그런 맛인 줄 알고 먹었지. 본래 그런 맛이라고 생각하고 먹으니 아무렇지도 않던데?

 

얼마 전에 한국 마켓 뒷마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멕시칸들이 국그릇을 들고 않아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가까이 가 보니 모두들 시뻘건 육계장을 한 사발씩 들고 앉아, 밥은 상에 그대로 두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건더기를 건져가며 먹었다. 놀라서 물었다. 짜고 맵지 않냐고. 한국의 수프는 본래 그런 거 아니냐며 그들은 도로 내게 물었다.

소금구이를 주문한 미국 사람들이 상추와 파 겉절이가 나오면 그걸 샐러드인줄 알고 마구 먹는 모습도 심심찮게 식당에서 본다. 그들도 그런 마음이었겠지. 한국 샐러드는 본래 이렇게 짠가 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거니 하고 열어두고 나면 못 담을 게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살이도 모두 원래 그런 맛인가 봐 하고 살다보면 어지러울 일도 흥분할 일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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