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꾼 정원

2009.02.04 13:58

성민희 조회 수:991 추천:105


내가 가꾼 정원

 

 

 

  그들의 춤추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는 킥 웃었다. 부부 싸움을 하는 중인가? 허리를 굽히고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여자와 머리를 숙인 채 두 팔을 뻗어 간당간당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옆에서 보면 영락없는 소문자 h다. 앙탈 부리는 아내를 억지로 붙잡아 달래느라 얼마나 힘이 들까 싶다. 7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년의 나이에도 남편 속을 긁느라 저러는걸 보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사람 사는 모양은 똑 같구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Mrs. Fox의 제자들이 모여 제각기 갈고 닦은 춤 실력을 뽐내는 날이다. 허수아비 둘이 붙어 삐거덕거리는 것 같은 바싹 마른 백인부부. 이멜다 여사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여자와, 코가 동그랗고 작달막한 전형적인 필리핀 남자. 수박 두 개를 매달아 놓은 듯 볼록 솟은 엉덩이로 경쾌하게 리듬을 타는 히스패닉 여인과 구렛나루 수염을 잘 다듬은 남자. 큰 홀을 종횡으로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신나는 폴카곡이 끝나고 돌아다보니 h자 부부는 여태도 엉거주춤한 모습 그대로다. ‘아직도 맘이 안 풀렸나? 여자 고집이 참 세기도 하네.’ 곁눈으로 슬쩍 흉을 보니 싸운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다. 남편이 손을 아래로 뻗쳐서 돌리면 허리가 굽어진 채 손가락 끝을 겨우 잡고 원을 그리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허리가 90도로 굽은 꼬부랑 할머니다. 백인 꼬부랑 할머니는 본 적은 없는데... 혹시 사고나 병으로 등이 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들의 모습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변한다. 멋진 춤 솜씨로 홀을 누비는 구렛나루 남자보다, 탄탄한 어깨로 아내를 리더하는 젊은 남자보다 아내를 조심스레 감싸 안으며 춤을 추어주고 있는(추어주고 있다는 표현이 정말 맞다.) 하얀 머리의 이 할아버지가 더 멋있다.

 

  외국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가끔 가슴 찡한 부부애를 만날 때가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로 살수 없어 이혼을 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모든 모임이 부부 동반이고 철저히 부부 중심으로 움직이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무늬만 부부, 쇼윈도우 부부라는 단어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은 생활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다. 아니, 정말 사랑하며 살고 있다.

  몇 년 전, 남편 회사 파티에 참석했다. 리셉션에서 칵테일을 들고 밝게 웃는 여자의 허연 등판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지퍼 사이로 까만 브래지어 끈이 가로로 선을 긋고 있으니 보기에 민망했다. “당신 등 뒤에---.”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데 “하하하, 지퍼가 고장 났어요.” 오히려 그녀의 남편이 더 큰소리로 말했다. 섹시하지 않느냐며  톡톡 아내의 등을 개구쟁이처럼 두드리기까지 했다. 아내의 즐거움에 비하면 창피한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주보고 웃는 그들의 사랑이 은근히 부럽기도 하고 예쁘기도 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 대법관 샌드라데이 오코너는 스탠포드 법대에서 동갑내기로 만난 남편과 법조인 부부로 평생을 잘 살아왔는데, 칠순을 넘긴 남편이 치매에 걸렸다. 그를 양로 병원으로 보낼 때는 참으로 마음이 아팠지만, 거기에서 만난 다른 할머니와 사랑에 빠져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행복하다고 했다. ‘바람난 남편? 괜찮아!’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했다.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수고하고 희생하고 이해해주는. 그런 수고와 희생과 이해가 세월 속에 스민 부부의 사랑은 얼마나 무겁고 깊고 한편 향기로운 것인가 싶었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 여기고 굽어진 허리로 춤을 즐기는 노부부. 그들의 세월 속에 녹아있을 많은 추억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도 어느 시절 빨간 드레스에 턱시도를 입고 오늘처럼 저렇게 춤을 추었겠지.

 

  28년 전, 결혼의 의미도 모른 채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푸석푸석 먼지 이는 작은 텃밭을 둘이서 함께 들여다보며 물도 자작하게 뿌리고 햇살도 받아 부으며 도란도란 시작 했는데 어느새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커다란 과수원이 되었다. 때론 비바람에 마음 조리기도 했고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망울에 환호하기도 한 시간들. 돌아보면 한 장의 그림을 넘긴 것 같다. 긴 여정을 한결같이 성실하게 함께 살아준 남편이 새삼 고맙다.

 

  이제 나의 정원에도 노을이 질 것이고 돌아다보면 희미해진 기억이 얼핏설핏 얼굴을 내밀 것이다. 그 날에는 아픈 기억은 바람처럼 날아가고 아늑한 순간만 화려한 꽃들로 다복다복 피어나 있으면 좋겠다. 숨어있는 아픔을 톡톡 건드리는 가지들은 모두 잘려나가고, 고맙고 측은한 마음의 나무들만 정원에 가득하면 좋겠다. 가지치기가 잘 된 마음의 정원에서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손끝을 마주잡고 빙글빙글 예쁜 춤을 추는 그런 노년을 살면 좋겠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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