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가 다녀 간 자리

2009.09.30 18:05

성민희 조회 수:937 추천:94


코코가 다녀간 자리

 

 

얼마 전. 낯선 멀티즈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두 손으로 잡으면 손 안에 쏘옥 들어 갈만큼 작은 몸집에 보송보송 하얀 털과 선한 눈빛이 귀염을 많이 받고 자란 녀석 같았다. 열어둔 차고 안으로 쫄랑쫄랑 들어오더니 빗자루를 들고 있는 내 발등에 올라와 몸을 비벼댔다. 주인이 누구일까? 주위를 둘러봐도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털이 깨끗한 걸 보면 가까운 이웃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제 집 찾아 가겠지 싶어 길거리에 내다 놓았더니 내가 몸도 돌리기 전 우리 집 차고를 향해 자기가 먼저 뛰어 들어가 버린다. 목에는 이름표도 없으니 누군가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데 동네는 사람 한 명 다니지 않는 고요함이다. 무작정 낯선 집 대문들을 두드리며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차가 내달리는 길거리에서 헤매게 할 수도 없어 일단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해가 떨어지도록 이웃에선 아무 기척이 없어 할 수 없이 우리 집에 재워야 했다. 아들은 째깍째깍 소리를 들려주면 잘 잔다며 멀쩡한 새 시계를 강아지와 함께 바구니에 담아 내 침대 밑에 갖다 준다. 밤새 낑낑대는 녀석 땜에 잠을 설친 다음날, 온 동네에 강아지 찾아 가라는 방을 붙였다. 천방지축 뛰는 강아지를 따라 다니면서도 귀는 대문에 꽂아 두고 종일 기다렸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저녁에 대문을 들어서는 식구들은 파김치가 된 나는 본 척도 않고 강아지 갔나?" 강아지 안부부터 먼저 챙겼다. 다음 날 또 하루. 한나절이 다 가도록 전화도 없고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기다림이 이상한 안도감으로 변했다. 슬그머니 욕심까지 생겼다. 빨리 주인을 찾아야 할 텐데 하는 마음과 함께, 제발 아무도 나타나지 말게 하소서 하는 주문도 나왔다. 혹시나 하고 사 둔 조그만 개 밥 푸대는 양이 푹 줄었고 통조림은 벌써 몇 개가 비워졌다. 아들이랑 둘이서 또 pet shop에 갔다. 개밥은 물론 방석, 밥그릇, 샴푸 등도 사오고 말았다.

하루가 더 지나자 조마조마 불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전화벨이 울리면 깊은 숨을 들이키고서야 받는 처지가 되었다. 며칠을 더 기다렸지만 너무나 고맙게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강아지가 우리 식구가 되나 보다. 이렇게 예쁘고 잘 훈련된 것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우리는 큰 횡재에 서로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며 이름을 럭키로 정했다. 목욕도 시키고 털도 깎이고 신이 났다. 인제는 '강아지 갔나?' 하던 첫 마디가 '강아지 잘 있제?'로 바뀌었다.

가족이 하나 더 생기고 나니 외출 시간이 짧아졌다. 마켓에도 럭키를 데리고 가야만 했다.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는 우리 집으로 바뀌었다. 집 나서면 절대로 전화를 걸지 않던 아들은 가끔씩 전화를 걸어와 나로 하여금 사랑 받고 있나 하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저녁 식사 후면 골프 채널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남편은 럭키 운동 시킨다며 데리고 나가 동네를 한 바퀴 휙 돌고 들어온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럭키가 우리들의 마스코트로 자리를 잡은 지 일주일이 지난 날. 아들이 놀란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동네 전봇대에 럭키를 찾는 포스터가 붙었다고 했다. 아니, 일주일씩이나 버려두었다가 이제야 찾는 건 또 무슨 경우인가? 뜯어온 포스터를 펴 보니 우리 럭키 사진이 분명했다.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뻥 뚫리며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사랑하는 식구가 되었는데 돌려주어야 하나? 모른 척 그냥 있어야 하나? 돌려보내자니 그 동안 쌓은 우리들의 공이 아깝고 쏟은 정이 아프고. 모른 척 하고 있기엔 식구끼리 똘똘 뭉쳐 큰 범죄(?)를 공모하는 느낌이다. 결론은 났지만 차마 서로 속마음을 털어내지 못하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아들과 나는 개 옷이랑 밥그릇이랑 방석이랑 샴푸를 싸 들고 주소의 집으로 찾아 갔다. 문 앞에 신발이 나와 있는 걸로 봐서 한국 집인 것 같은데 벨을 몇 번이나 눌려도 사람 움직이는 기척이 없다. 문을 슬며시 밀어 보니 컴컴한 집 안에서 한국말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낯선 사람이 문을 여는 데도 놀랍지도 않은지 어둠 속에서 들어오세요 하는 태연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디미니 소파에 누운 여자가 보인다. 부스스한 잠옷 차림에, 낯선 우리를 보고도 뜨악한 느낌이 없다. 들고 간 많은 살림살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어이가 없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어디 갔다 이제 왔니? 내가 얼마나 찾았다고. 이렇게 강아지를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 당연히 해야 할 인사는 없고 전혀 놀람도 감사함도 없이, 거기 두고 가세요. 그 녀석 이번이 네 번째예요. 무심한 한마디뿐이다.

그냥 돌아서기가 아쉬워 미적대며 방 안을 살펴보니 여기 저기 옷이 던져져 있고, 먹다 남은 밥그릇도 테이블에 널브러져 퀴퀴한 냄새까지 나는 것 같다. 마지못해 여자가 상체를 일으켜 소파에 기대어 앉는다. 럭키는 어느 새 내 품에서 빠져나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다.

여자는 혼자서 살고 있었다. 병이 깊어 거동조차 불편하지만 함께 지낼 가족이 없다. 한 번씩 딸이 와서 집안 청소랑 식사 준비를 해주고 갈 뿐이었다. 누워만 있으니 코코 -럭키의 진짜 이름이 코코라고 했다- 가 밖으로 나가도 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번이 코코의 네 번째 가출이었다니, 여자가 아무런 감동 없이 우리를 맞이한 건 당연했다. 딸이 와서야 겨우 포스트를 만들고 붙일 수 있었다는데 왜 그렇게 늦게 찾아 나섰냐고 따질 일이 아니었다. 번번이 누군가가 찾아서 갖다 주는 일에 우리가 특별히 착한 일을 했다고 으스댈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말 정도는 들을 줄 알았는데. 아들과 나는 서로 멍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신발을 신었다. 집에 올 때까지, 와서도 서로 말 한마디 없었다.

다시 골프 채널에 눈을 고정한 남편. 제 방에 들어가 문틈으로 인색한 불빛만 흘려보내 주는 아들을 보며, 며칠 동안이었지만 코코가 주고 간 행복의 크기가 얼마나 컸나 싶다. 돌아보면 비록 그 여자에게서는 아무런 칭찬이나 인사를 못 받았지만 좋았던 순간들, 흥분했던 순간들. 설레었던 기억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보상을 받은 셈이다. 언제나 선한 일을 할 때는 보상 받고 싶은 마음이 깔리는데. 럭키가 허무하게 가버리고 나니 선할 일을 하는 중에 느끼는 기쁨이 바로 보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남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들여다보면 그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양심 때문이겠지. 내 양심에 충실한 것이 선행이고, 양심에 충실한 나 자신에 대한 대견함, 스스로 칭찬해 주는 마음. 나의 칭찬으로 인하여 행복해 지는 마음. 그것으로써 보답은 충분하다고 본다. 베풀었다고 해서 꼭 보상을 바랄 일도 아니고, 보상이 없다고 화낼 일도 아닌 것 같다.

 

방 한 귀퉁이에 코코가 먹다 남은 과자 통이 보인다. 자기 집에 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 의리 없는 녀석. 우리가 간다며 그렇게 불러대도 얼굴도 안 비치던 녀석. 그래도 내일은 저걸 챙겨다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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