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영어 이름을 지어준 사연

2009.07.25 14:00

성민희 조회 수:1057 추천:95

친구에게 영어 이름을 지어준 사연



여고 동기 7명이 매달 만난다. 가까운 산에서 하이킹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늦은 점심 먹고 커피샵에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이팝나무가 하얀 눈송이를 피워 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여름의 초입. 이번 모임은 라구나 비치로 가자고 했다. 리츠칼튼 호텔에서 우아한 점심을 먹고 시원한 바다를 즐기자는 의견이다. 근데 한 친구는 직장 관계로 참석이 어렵다 하고, 성귀라는 친구도 한국에서 오는 손님 땜에 공항에 가야한다고 한다. 두 명이 참석을 못한다니 김이 빠져 버렸다. 라구나 비치는 취소하고 찜질방에 가자고 했다. 벌거벗고 서로에게 진실을 보이자는 내 의견에 모두 깔깔거렸다.


내가 변경된 사항을 연락할 요량인데 마침 전화가 왔다. 남편이랑 함께 친구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이었다.
", 성귀구나. 할 수 없지 뭐. 손님 접대나 잘 해라. 다음 달에는 꼭 보자. 정자는 올 수 있겠지?"
성귀랑 정자는 서로 가까운 동네에 사는 덕에 언제나 함께 움직이는 단짝이다. 전화를 끊고 곧 정자한테로 다이얼을 돌렸다.
"성귀는 못 오더라도 정자 너는 꼭 와야 한다."
다짐을 받고 전화를 끊었다. 좁은 차 안에서 대화 내용을 모두 들은 남편이 싱글싱글 웃음을 흘렸다.
"당신 친구들은 이름이 다 와 그렇노?"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아무렇지 않은 듯 앞만 쳐다보며 말했다. 생뚱맞게 무슨 소린가 싶다. 정자라는 이름이 촌스럽단 말인가?  대뜸 반박했다.
"? 정자가 어때서. 그게 뭐가 촌시런 이름잉교? 정자, 영자, 경자. 우리 학교 다닐 때 그런 이름이 얼마나 많았는데. "
남편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노래를 부르듯 느린 템포의 리듬까지 넣으며 말했다.
"성기에, 정자에....... 당신 친구 중에 난자는 없나? 거기에 난자만 있으면 끝내주는데. 성기가 정자하고 난자 데리고 찜질방 가면 참 환상적이겠다."
집에 오는 내내 둘이서 마주보고 웃고 또 웃었다. 옆에 오던 차들이 급히 차선을 변경하며 화를 냈다. 교통순경이 혹시 뒤에 따라올까 겁이 나는데도 차는 계속 갈지자로 흔들렸다.

친구들과 만난 토요일 오후. 찜질방에 둘러앉자마자 내가 고자질을 했다. 우리들은 팥빙수를 앞에 두고도 먼지가 펄펄 날리도록 데굴데굴 굴렀다. 찔끔 난 눈물을 닦으며 정자가 정색을 했다.
"내가 50평생을 살아도 내 이름 가지고 그렇게 연상하는 것 처음이다 아이가. 너그 남편 참말로 얄궂다. . "
"그기 문제인기라. 니가 와 하필이면 성귀 옆에 살아가지고 둘이 짝이 되었노 말이다."
혼자 있으면 아무 문제없는 이름이 난데없이 벼락 맞은 형국이라고 모두들 위로 했다. 대학 교수로 있는 친구가 마치 학생들을 나무라듯 근엄한 얼굴을 했다.
"성귀! '귀할 귀'인데 경상도 가시나들 발음이 마, 멀쩡한 아~ 이름을 성기로 바까삐린기라. 가시나 너그들 발음 좀 똑바로 몬하것나."
지엄한 꾸중이 떨어졌다. 그러나 어쩌랴. 50년 넘게 굳어버린 발음들을.
"우짜몬 좋노. 나는 죽어도 발음은 몬 고친데이. ”
"이 나이에 이름을 새로 지을 수도 없고…… 할 수 없다. 영어 이름 하나씩 만들어 주자."
모두 일어나 왁자지껄 영어 이름들을 불러댔다. 여기서 나온 이름 저기서 안 어울린다고 손을 내젓고 저기서 지은 이름 여기서 발음하기 어렵다고 퇴짜를 놓았다. 한참 싱갱이를 한 뒤  찜질방을 나올 무렵에야 겨우 세련된 영어 이름 두 개를 탄생 시켰다. 성기(?)는 스텔라로, 정자는 죠이스로.
 그런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귀는 아들한테서 그 이름을 또 퇴짜 맞았다 한다. 그렇잖아도 육중한 몸매인데 이름까지 그리 지으면 미국의 스텔스 전투기가 떠오른다며 펄쩍 뛰더란다. 우리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귀한 이름을 완전히 배반할 수는 없어 이니셜 S자만은 살리려고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었는데. 불쌍한 내 친구 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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