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여행

2010.02.15 03:32

성민희 조회 수:841 추천:111

이상한 여행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전혀 낯선 장소 커피샵에 앉았다. 목적지도 일정도 없는 자유로운 여행을 혼자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만 할 뿐 용기가 없어 엄두도 못 내던 짓을 본의 아니게 지금 하고 있다.

친구는 딸을, 나는 아들을 만나보러 뉴욕에 온 김에 빌라델비아까지 둘러보기로 했다로키 영화 촬영으로 유명한 72 계단을 밟고 신나는 ’Gonna Fly Now’ 도 흥얼거려 보고 아트 갤러리랑, 역사적인 박물관들을 둘러보자며 의기 투합. 어제 오후 빌라델비아로 왔다.
친구는 버스를 타기 전부터 초등학교 단짝에게 전화를 하더니 40년 만의 만남이라며 팔짝 팔짝 뛰는 그녀에게 도착하자말자 목덜미를 잡혀서 가 버렸다. 차에 밀려들어가며 난감해 하는 친구에게 실컷 회포를 풀고 오라고 등 떠밀어 보냈다. 머릿속이 잠깐 멍해졌지만 곧 밝힐 수 있었다. 그래도 예약해 둔 호텔이 있지 않은가.  


난생 처음 혼자 호텔에서 지내야 한다.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T.V.도 켜놓고 컴퓨터도 연결하며 밤 새울 준비를 했다. 익숙한 척 했지만 엔간히 신경을 썼는지 배가 고파 로비로 내려갔다조용한 호텔 로비건만 늦은 시각에 웬 여자가 혼자서 들락거리나 하는 시선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 빨리 밖으로 나갔다.  
거리는 온통 빌딩 숲화려한 쇼윈도우 불빛을 뒤로 하고 귀가하는 사람들의 걸음이 빠르다. 큰 유리창으로 들여다보이는 식당 안은 삼삼오오 대화로 다정해 보였다구석 자리에 앉아 따뜻한 수프와 빵을 주문하는, 쓸쓸한 영화 속 여인이 되어보고 싶은데 도무지 나랑은 어울리지도 않을 뿐 더러 용기도 없어 그만 두었다. 조금 더 걸으니 맥도널드 간판이 보였다. 반가웠다. 망설임 없이 치킨맥넛을 주문했다봉투를 품에 꼭 안으니 내 마음에서 술렁이던 바람이따뜻한 온기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치킨맥넛도 먹고 커피도 마셔 배고픔은 가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괜히 으시시해졌다. 화장실까지 불을 환하게 밝히고 T.V.를 크게 틀어놓았다괜찮냐는 친구의 걱정에 혼자서도 너무 잘 놀고 있다며 큰소리 쳤다. 커턴을 꼭꼭 둘러치고 이메일을 열어보니 반가운 이름들이 있다. 이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깜박 잠이 들었는지 눈을 뜨니 아침이다창밖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옆 건물 옥상 위를 덮은 하얀 눈이 햇빛을 받아 몹시 눈부시다. 오후에는 눈이 올 거라던데.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화창한 날씨다.
목도리를 두르고 모자를 쓰고 쌀쌀한 아침거리를 걸었다눈을 쌓아 올려 양옆으로 나지막한 눈울타리를 친 듯한 거리. 좁은 폭으로 치워둔 눈더미 사이를 걸으니 마주 오던 흑인 남자가 정중하게 옆으로 비껴 서 준다. 나도 굳모닝 하며 미소를 보내주었다. 세탁소 낡은 창문 틈으로 빨간 조끼를 입은 강아지가 유리창에 코를 비비며 내다보고 있다. 손을 흔들어 주니 캉캉 짖으며 얼른 엉덩이를 돌려 도망가 버린다인정머리 없는 녀석혼자 걷는 나그네에게 꼬리라도 한번 흔들어 줄 것이지.
조용한 커피샵에 두 여자가 마주보며 소곤소곤 속삭인다. 저 사람들도 40년 만의, 아니 아직 젊으니 그 정도는 아니겠고 10년 만의 만남인가 하고 혼자 웃는다. 괜찮니? 친구는 계속 문자를 보낸다멋진 에세이가 한편 나올 것 같으니 귀찮게 하지 말라고 답을 보냈다이상한 여행이 되어 버렸다그러나 기억에는 오래 남을  것 같다. 두고두고 써먹을 친구 원망꺼리도 하나 만들었다.  
돌아가는 길에 건너편 그로서리 마켓에 가서 물이랑 과자랑 오늘 하루치 양식을 좀 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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