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09 15:01
미안해요
정말 속상하다. 지난번에도 남편의 양복바지를 망쳐 놓더니 오늘은 또 내 원피스다.
몇 달 전.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급하게 나를 불렀다. 설거지 고무장갑을 벗을 겨를도 없이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보니 바지를 든 남편의 손가락이 허리춤 아래 천을 뚫고 쑥 삐어져 나와 있었다. 세탁소에서 찾아온 바지 벨트 밑 부분 올이 숭숭 헤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너덜거릴까? 기가 막혀 허허 웃는 남편이 나가자마자 세탁소로 쫓아갔다. 구멍 난 자리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는 아침부터 볼이 부어서 들어서는 나를 본 주인. 처음 갖고 올 때부터 그랬다며 너무나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이렇게 삭아버린 바지를 맡기겠냐는 나의 정색에 인제는 또 천이 너무 얇아서 그렇다고 했다. 천이 원래부터 그랬다니 할 말이 없었다. 재질을 잘 살펴보며 거기에 맞춰 다림질이던 드라이 클리닝이던 해야 할 것 아니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와 안달했지만. 참았다. 굳이 따져서 내가 이긴들 새 것으로 물어 달라 할 것도 아니고, 월요일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속은 부글거렸지만 그냥 바지를 들고 나왔다. 돌아서는 나의 뒤통수를 껌벅껌벅 쳐다보며, 주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부터는 더 조심해야지 했을까 아님 따질 줄도 모르는 멍청한 아줌마라고 했을까.
그런데 오늘은 더 심하다. 세탁이 잘 되었나 비닐을 들춰보니 주황색 원피스 앞자락이 허옇게 벗겨져 있다. 거기다 또 다리미로 얼마나 눌렀는지 도톰한 박음질 솔기 부분이 뺀질뺀질 윤이 난다. 엉망이 된 원피스를 쳐다본 순간 남편의 양복바지 생각이 나며 울화가 치민다. 갑자기 변한 내 눈빛에 흠칫 하던 주인은, 옷을 공장으로 보내려고 부대 자루에 넣다 보니 이런 모양새라 아예 보내지도 않았다고 둘러댄다. 오늘도 또 변명인가? 숨이 턱 막힌다.
이번에는 절대로 당하지 않으리라. 다른 옷들이랑 함께 뚤뚤 뭉쳐서 가져 온 기억을 그의 눈앞에다 들이댔다. 내 기억에 자기 기억을 견주는 듯 하던 주인, 잠시 큰 숨을 훅 내받더니 자기가 다림질을 해서 주름을 없앴다며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한다. 마치 이럴 때 사용할 대사를 준비라도 해 둔 듯, 다른 세탁소에서 실수 한 것 아니냐며 한 마디 더 한다. 단골로 드나든 지 5년이 넘는 줄 뻔히 알면서 이 무슨 황당한 말인지.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할까. 신나게 한 방 먹이고 싶은데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마음의 동요가 전혀 없는 듯 눈동자를 멀뚱거리는 사람 앞에서,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찌감치 백기를 들어야 할 것 같다. 박제된 새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눈을 부릅떠본들 무슨 소용이랴.
맥없이 꼬리를 내리고 나니 생각의 물꼬가 엉뚱하게 터진다. 이 남자는 원피스를 앞에 두고 얼마나 궁리를 했을까? 무슨 변명으로 이 손님을 돌려보낼까 고민하는 저 가슴은 또 얼마나 두근거릴까? 태연한 척 하는 모습이 오히려 측은해졌다. 흰색인지 회색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선풍기가 돌긴 하는 건지 덜커덩 소리가 시끄럽다. 비닐을 뒤집어쓰고 천정에 매달려 있는 옷들이 마치 비에 젖은 수양버들 같다. 벽 한 귀퉁이의 시계는 며칠 전에도 12시 10분이더니 오늘도 그대로다. 숫자판은 또 왜 저리 얼룩덜룩한가. 암만 둘러봐도 내 속을 뻥 뚫어 줄만한 것은 없다. 할 말은 많지만, 계산대 위에 던져졌던 열쇠를 거머쥐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리고 돌아서 나왔다. 오늘도 또 멍청한 아줌마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실수 했다고 사과하세요. 암만 그렇지만 제가 새 옷으로 물어내라고 하겠어요? 미안하다 하면 끝날 것을---" 오늘은. 그나마 한마디는 하고 나왔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TV 연속극을 보고 있어도 머릿속에는 '미안하다'는 말이 꼬리를 물고 돌고 있다. 미안하다. 한마디만 했으면 좋았을 거 아니야. 빙글빙글 도는 꼬리 끝에서 희미한 단편소설 하나가 풀려 나온다. 주인공은 아버지 임종 자리에서 통곡을 했다. 아버지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해주었으면 용서해 드렸을 텐데. 미안하단 말을 듣는 게 소원이었지만 그 말을 끝내 듣지 못했다. 용서하지 못한 채로 아버지를 떠나보낸 자신이 괴로워 몸부림치는 글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야기를 퍼즐인 듯 맞추며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하는데 우연치곤 참으로 아귀가 맞는 장면이 TV에서 나온다. 음악이 흐르는 찻집. 친구 앞에서 여자가 훌쩍거리고 있다. 바람 핀 남편을 껴안아 보려고 죽을 힘을 다했건만 도무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진심으로 미안하단 말 한마디만 해주면 용서할 텐데'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는 여자의 말이 확성기를 들이댄 듯 크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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