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가 사는 법

2009.10.25 19:44

성민희 조회 수:1057 추천:100



그 친구가 사는 법


 


   친구 중에 아주 멋쟁이가 있다. 그 친구가 나타나면 주위가 환해질 만큼 세련된 모습 뿐만 아니라 싫은 소리를 들어도 혼자서 푹푹 삭혀내고는 다시 웃는, 심성이 참 착한 친구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녀를 슬슬 피하게 되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골프 매너가 너무 없기 때문이다. 티 박스에서건 페어웨이에서 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치고 다른 사람이 티샷을 준비하고 있는데도 옆에서 휙휙 소리를 내며 연습을 한다.


   그녀를 소외시킨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친구 어머니의 팔순 잔칫집에 다녀오다가 불행(?)히도 그 부부가 우리 차를 타게 되었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남편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당신은 아무 소리 말고 골프 칠 때 미셸 엄마 치마꼬리만 잡고 다녀." 여기서 골프 이야기가 왜 나오나? 내 얼굴이 빨개졌다. 눈치 빠른 그녀, 자기가 왕따를 당한다고 어지간히 징징거린 모양이었다.


   팔순 잔치에 다녀온 후로 부쩍, 살뜰히 아내를 챙기는 그 남편을 보며 친구들 사이에 수수께끼가 생겼다. 비결이 뭘까. 예뻐서? 노오! 그 보다 더 예쁜 친구도 구박 받고 산다고 투덜거린다. 똑똑해서? 노오! 50대엔 지식의 평준화가 이루어진 지 이미 오래다. 몸이 여려서? 노오! 그녀도 갸느린 어깨에 떡 벌어진 허리다. 쉰을 넘긴 아줌마에게 여리다는 단어가 가당키나 한가. 그럼 뭐냔 말이다. 무엇이 남편으로 하여금 그토록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게 하느냔 말이다. 서로들 추측을 들이대었지만 속 시원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직접 찾아내는 수밖에는.


   공휴일이 낀 주말, 4쌍의 부부들이 골프 여행을 갔다. 와인을 한 잔씩 하던 중, 그녀가 갑자기 어지럽다며 남편의 어깨에 폭 기대었다. 그녀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나 믿을 수 없어 우리는 멍~하며 서로 쳐다보았다. "허허~ 이 사람, 와인 한 잔만 먹으면 이렇게 맥을 못 춰요. 어이구 어쩌지?" 안절부절 못하는 남편, 바로 그것이었다. 무리 없이 잘 짊어지던 골프백도 남편 앞에서는 쌕쌕거리고, 와인 한 잔에 어지럽다며 비틀대고. 한없이 연약하고 모자라는 여자로 보이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걸 내 남편은 애교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친구들이 자기를 따돌린다고 훌쩍거리면서 하소연 했을 것이고 남편은 안스러운 아내를 위히 기사도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남편의 남성(男性)을 북돋워 가며 살았다. 우리는 자존심을 흔들며 남편의 기()와 맞서서 용감히 싸우고 있을 때.


   그렇게  살면 피곤할거야, 그러는 자신은 또 얼마나 피곤하겠어? 난 그런 연극은 싫어. 뭐가 답답해서? 유치하다. 치사하다 등등... 친구들은 의견도, 뜻도 분분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들 속으로 부러워한다.


   내 남편은 아내가 골프를 치고나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랑 치는지 모른다. 어느 토요일 새벽. 친구랑 라운딩을 끝낸 뒤 클럽하우스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남편이 사촌 누나랑 함께 들어왔다. 골프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만났다며 바로 내 뒤의 좌석에 앉게 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남편의 대학 후배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아이고, 형님. 형수님 그림이 참 이상하네요. 두 분이 왜 이러십니까?" 부부가 등을 지고 앉아서, 그것도 남편은 다른 여자하고 단 둘이서 아침을 먹고 있으니 풍경이 참으로 묘하기도 했다. 후배는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갔다. "형수님. 형님이 조금이라도 수상하다 싶으면 즉각 나한테 연락 하세요."


   한 때는 수도꼭지가 꽁꽁 언 겨울 밤, 살금살금 일어나 연탄불을 갈아주던 남자. 아기 기저귀 똥을 찬 물에 훌훌 저으면서 씻어주던 남자, 덜덜 떨면서도 웃옷을 벗어 어깨에 걸쳐주던 그 근사하던 남자(男子)들는 어디로 가고. 머리를 바글바글 볶고 들어와도, 무거운 쓰레기통을 끙끙대며 들고 나가도 몸도 마음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무심한 남편(男便)들만 옆에 남아 있는가.


   나를 돌아보고 또 그 친구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남편들의 남성(男性)을 바래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월의 때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우리 탓은 아니라며, 혹은 본래 타고난 성품이라며 제각각 이론을 펼치는 친구들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내게 이상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남편을 이겨 보겠다고 눈을 부릅뜨는 여자들이 점점 어리석어 보이고, 내숭 떨고 여우짓 하는 여자가 오히려 현명해 보인다. ‘사랑하므로 행복 하노라가 아니라 사랑 받으므로 행복 하노라가 훨씬 더 진리인 것만 같다. 이제는 아들이 착한 며느리 앞에서 큰 소리 치며 살아주기를 바라는 시어머니의 마음이 되어버릴 만큼 나이 먹은 탓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여자임을 중년 고개도 훨씬 넘긴 이제야 깨달은 걸까? 내 딸에게, 자고로 여자의 아름다움이란?’ 해가며 약간의 순종(順從)을 동반한 내숭학() 내지는 애교학(愛嬌學)을 강의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딸의 입에서 터져 나올 말이 귀에 들린다. “Ew~~~disgusting!”

<사람이 고향이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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