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임말 공해

2012.03.23 02:15

김학천 조회 수:786 추천:110

  한 신사가 카이로 국제공항에 내렸다. 이민국 직원이 입국서류를 심사하고는 CIA라고 썼다. 놀란 이 신사, ‘아니 내가 중앙정보국 직원인 걸 어떻게 아셨소?’ 하자 직원 하는 말, ‘나는 모르오. 그저 카이로 국제공항(CIA)에 도착했다고 쓴 것이요.’ 했더란다. 줄임말로 빚어진 오해의 우스갯소리다.
  허긴 한때 비행사들의 잦은 연착 때문에 TWA는 언제나 내일 도착한다(Tomorrow Will Arrive)는 뜻의 이니셜로 비꼬았는데 그보다 더한 것이 NWA(Never Will Arrive)이다. 줄임말은 생활에 편리함을 줄 수도 있지만 아주 난감한 일도 겪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식당에 점심을 하려 들어갔다. 종업원이 다가와서 주문을 받는데, ‘손님,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하니 첫 번째 사람이 ‘곰탕을 주시오.’ ‘보통이요, 특별이요?’, ‘보통이요.’ 다음사람이 주문했다. ‘난, 갈비탕으로 하지요. 보통으로 주세요.’ 그러자 종업원은 주방에 대고 힘껏 외쳐댄다. ‘2호실에 갈보 하나, 곰보 하나.’ 좀 듣기에 거북하지 않은가.
  이러한 웃지 못 할 일들이 이런 경우 하나이겠는가 만은 근래에 들어 여기 저기 너나할 것 없이 줄임말을 마구 쓰는 것이 한편으로는 시대상이려니 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소외감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줄임말은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대화 단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어떠한 것들은 귀엽고 수용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이미 알다시피 ‘짱’은 몸짱 이니 얼짱 이니 해서 그나마 그럴듯해서 누구나 잘 쓰고 있는 것 중의 하나다.
  허나 젊은 세대면 누구나 아는 ‘오나전 안습’이란 말은 도저히 모를 말이다. ‘완’을 타자 칠 때 ‘오’ 다음에 ‘ㅏ'와 ’ㄴ'을 쳐야 할 것을 순서가 잘못되면 ‘오나전’이 된다. 해서 ‘완전’이 ‘오나전’으로 된 것이고 ‘안습’은 눈에 습기가 찼다는 뜻이니 ‘완전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의 일’이란 것이다.
  이젠 줄임말 신조어가 한글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돌아온 싱글 여성’을 의미하는 ‘돌싱녀’처럼 외국어까지 합쳐지니 더욱 난해해져서 그 뜻을 헤아리기가 만만치 않다.
  허긴 한문과 한글을 섞어 두 세계를 넘나들며 빼어난 글들을 남긴 사람하면 김삿갓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그 집 아낙네가 설거지물을 밖으로 뿌린다는 것이 하필 김삿갓이 뒤집어썼다. 과객의 행색이 초라해선 지 이 아낙네 사과는 커녕 홱 돌아서 그냥 들어가 버린다. 화가 난 김삿갓 그냥 ‘해. 해’하고는 갔더란다. ‘해’는 한문으로 ‘년(年)’이요 그것이 두 개, 곧 쌍이니 욕도 그런 욕이 없다. 그의 높은 경지의 해학과 재치로 가득 찬 많은 명시들이 이런 것들과 비교 될 수는 없겠으나 기발하지 않은가.  
  아무튼 이러한 것들이 문자메시지의 발달로 신속성과 편의성의 결과이긴 하지만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차이는 고사하고 신세대의 같은 또래 집단에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가 생길 정도이니 가히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어서 어떤 체계나 질서가 없는 그야말로 마구잡이 변형된 말들이 언어파괴를 야기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이에 한글학회장 허웅 선생이 ‘편하지만 인체 건강에 해로운 것이 많듯이 언어생활도 편리함만 추구하면 문제가 생긴다. 원칙을 지키는 효율성 추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을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 까 한다. 중독(중앙 독자)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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