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거꾸로 본 루이스호수

2007.01.31 14:35

박봉진 조회 수:733 추천: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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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대 절경 중의 하나, 캐나디언 록키의 눈동자는 루이스호수(Lake Louise)일게다. 그것은 대하소설 사랑 주제의 어느 장면일 듯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한 경전의 절구일 듯도 하다. 한번도 녹아보지 않았을 만년설의 록키 영봉과 파란 하늘의 조화로움 그리고 금방 옷에 진액이 배일 듯한 녹색 숲을 에둘러서 그럴까. 물 속에 산이 있고, 산 위에 물이 있는 명경지수(明鏡止水)에 자기 그림자를 거꾸로 세워보지 않고서야 누가 루이스호수에 대한 것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라스베가스의 야경을 보려고 시가를 걷고 있다가 느닷없이 머리 위에 펼쳐지던 전자쑈의 파노라마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때 도로 위와 널따란 광장 위까지 온통 딴 세상이 펼쳐지고 있지 않았던가. 내가 땅을 딛고 서 있는 건지,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지 혼돈스러웠다. 투어차는 루이스호수로 들어오면서 밴푸에서 재스퍼 사이의 절경지대를 거쳤다. 관광객의 필수 코스라고 소문나있는 일명 아이스필드 하이웨이를 말함이다. 그 길에 들어서고부터 나는 줄곧 사물을 거꾸로 보는 것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깎아지른 통 바위들이 기기묘묘한 모양새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틈새마다에는 희귀 분재들로 과감하게 여백 처리한 일필휘지의 병풍, 저 세한도는 누구의 걸작품일까? 정말이지 이곳에선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도 않겠다. 게다가 천길 벼랑 위에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인 듯, 아스라하게 펴져있는 너럭바위는 또 어느 분이 만들어놓았을까? 그 위에서 누가 무얼 하라고. 고공의 필드에서 한번 티샷을 날리면 내 마음속의 백구는 주피터의 화살처럼 먼 시공을 날아서 사랑하는 이의 더운 심장에 그대로 홀인원 될 성싶었다. 그 절경들은 캐나디언 록키가 아니라 어느 깊은 해구에 숨겨놓았던 경치일 것만 같았다. 그래 나는 투어차를 타고 고산지대의 산간을 거쳐 온 것이 아니라 잠수 선을 타고 해저 탐사에 들어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루이스호수는 거꾸로 본 록키산맥 연봉의 한 개활지라고 해도 되겠다. 마치 창세 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이 있었다고 했듯이. 펑퍼짐한 고원지대에서 순수 무공해 햇빛만이 그려낼 수 있을 굴절 없는 자기 그림자를 밟고 서듯, 한번은 루이스호수에 자화상의 그림자를 거꾸로 세워보아야 하리라. 살갗까지 온통 옥색 물감이 들어보지 않고서야 평생 익히지 못한 삶의 이치들과, 마음과 몸이 다 바스러져도 아깝지 않을 애틋한 사랑의 전설을 어찌 엮어내어 말할 수 있을 건가.

루이스호수는 캐나디언 록키의 보석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여태 손에 보물지도를 들고 보석을 찾아 헤맸던 것이었을까? 정말 그랬던 것만 같다. 북미대륙의 척추 록키산맥은 서쪽의 태평양과 나란히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그 산맥은 미국과 캐나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캐나다 쪽의 것을 캐나디언 록키라고 부른다. 먼저 미국 쪽의 록키는 LA와 씨애틀간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았다. 가시권(可視圈)은 태평양 연안과 콜로라도강의 중간지대쯤일 것이다. 근년의 화산폭발로 유명해진 세인트 헬렌스산을 비롯하여 거봉들의 웅장한 산세는 대체로 그 발치마다 광활한 벌판이나 불모의 사막 땅을 거느려 펼쳐놓고 있었다. 그러나 캐나디언 록키는 해발 삼천미터가 넘는 영봉들과 점점의 그림 같은 수려한 호수들, 그리고 거대 빙하들이 연중무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에 어디서나 대자연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어 숙연한 외경심을 자아내게 한다.

루이스호수는 원래 원주민들 언어로는 ‘작은 물고기호수’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또 백인들은 ‘에멜라드호수’라고 불렸다 한다. 그리고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딸 루이스 캐롤라인 엘버타 공주가 방문했던 이후,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루이스호수의 진수에 근접해 보려면 아무래도 한 여름철이 제일 적기일 듯싶다. 그 때가 아니면 꾸밈없는 아름다운 그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특성을 살린 사계절 색깔을 한 화폭에 다 담아내놓을 수가 있겠는가.

루이스호수는 약 일만 년 전의 빙하와 그 침식활동에 의해 땅이 움푹 패면서 퇴적물의 둑이 쌓였고, 그 안에 얼음 녹은 물이 괴여서 만들어진 호수라고 한다. 호수의 물이 에멜라드빛, 옥색인 것 역시 자연현상이란다. 가까이는 짙은 녹색의 침엽수림이 빽빽이 주변을 뒤덮고 있다. 맞은편에는 거대한 빙하가 흐르고 있는 빅토리아산 중턱 만년설이 주변의 빛을 반사하고 있다. 또한 수심 칠십 미터의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빙하의 부유물, 석회성분이 햇빛을 받아 수중 반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단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더불어 사는 것이어야 하는데, 나는 어떤 빛을 반사하며 살아왔는고. 누구의 퇴적물 둑이거나 하다못해 밑바닥에 가라않은 부유물이라도 되어본 적이 있는가.

호변에는 1890년에 지었다는 사또레이크호텔이 중세의 고성처럼 우뚝 서있다. 로비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마신 한 잔의 차 맛을 어느 곳에서 재음미해 볼 수 있으랴. 그런데도 나는 그 호텔이 몹시 거슬렸다. 루이스호수의 경관 안에서는 인위적인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어울릴 수 없을 성싶었다. 약삭빠른 상혼이 호재를 놓칠세라 파고 들어와서 버티고 있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범접할 수 없을 성역, 대자연의 경관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정말 그런 것일까?

발걸음을 내리면서 문득 에펠탑을 떠올렸다. 그것은 프랑스혁명 백주년과 세계박람회를 위해 만들었던 철탑이다. 얼핏 보면 거무칙칙한 강철사다리꼴의 흉물에 지나지 않는다. 빠리시내는 유서 깊은 석조 고딕 건물들과 도로와 광장까지도 온통 예술품 아닌 것이 없는데, 그것을 센강 언덕에 세우다니. 도시의 미관과 조화가 뒤죽박죽이 된다는 것 때문에 문호 ‘모파상’을 비롯하여 많은 빠리지앙들은 그것을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나그네의 눈에도 그리 보였다. 그러나 에펠탑에 올라가서 빠리시내를 둘러보고, 또 모든 불빛은 탑 안으로만 흡입한다는 황홀한 조명의 에펠탑 야경을 센강의 선상에서 본 후, 벌려졌던 입이 딱 붙어버렸다. 부조화로 보였던 것이 상호보완을 이룬 듯, 지금은 빠리의 상징물이 되어있지 않은가. 사또레이크호텔도 주변의 산수와 함께 고색창연한 자연의 일부처럼 동화되어서 루이스호수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는 듯 하다. 누구와의 인간관계에서 나 또한 처음은 안 어울리는 것 같다가도 점차 더불어 사는 것의 한쪽이 되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는데-.

호수 둑에 섰다. 그윽한 실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위아래를 오를락 내릴락 해보았다. 나의 잘 보이지 않는 행간보기 방법은 늘 그랬다. 원래 루이스호수는 록키 정상에 안주하고 있었던 한 덩어리 만연설의 커풀이었다. 고체 빙설로 굳혔던 심령일지라도, 풍설의 과중과 한온의 격변에서 균형 지키기란 유한한 인간들의 한계처럼 감내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러기에 빙하로 떠밀렸다가 마침내 액체로 풀려버린 호수. 한 여름날 록키 영봉은 그 호수에 내려와 거꾸로 누웠고, 호수는 영봉을 품고 앉아있기를 즐기나보다. “옥색치마 치렁치렁 맨 바닥에 퍼져 앉아/ 한 여름에 서리는 입김 소록소록 불어내고/ 거꾸로 뉘인 록키 꼭두머리 하얀 베개로 돋운 여인아(졸시 일부).” 이렇듯 너와 나를 비롯한 사람들 간에 순애의 마음을 놓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루이스호수는 빛으로 사는 호수이고 그림자로 말하는 호수다. 만약 빛과 그림자와 무관하다면 어찌될까? 저 경주 무영탑(석가탑)에 얽힌 설화는 영지(影池)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서 생겼던 비련이었던 것을. 아사여와 아사달의 애달픈 사랑은 끝내 그들을 영지에 몸을 던지게 하지 않았는가. 루이스호수에 들어앉은 그림자를 살피다보면 무심히 흘려버렸던 보석들이 눈앞에서 빛을 낸다. 높은 곳의 원경과 낮은 곳의 근경도 호수 안에서는 지위를 따지지 않는 정다운 이웃이다. 빽빽한 나무들도 저네들끼리 키 재기는 하지 말자한다. 우리들 삶의 대도(大道)란 것도 결국 정상과 바닥이 스스럼없이 자리를 함께 나누고, 위 아래 그리고 옆 옆의 교류가 유연하게 돌고 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지 않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내 몸같이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될게다. 더불어 사는 것의 실증은 주인이 종의 발을 씻긴 것처럼 주종관계를 거꾸로 뒤집어도 거북하지 않아야 할게다. 남녀, 특히 부부간의 위치가 바뀌어도 불편은커녕 이해의 마음이 더 깊어져야 할게다.

오후 해의 기울기 따라서 내 그림자도 호수에 거꾸로 서있었다. 화성(畵聖)은 붓끝으로 대자연의 색깔과 그 숨소리까지 다 그려내 놓았는데, 그 도화지 여백에 거무칙칙하게 번진 먹물 한점이라니. 비경 속에 들어있다고 영혼이 맑아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왜 나는 바티칸 대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미켈란젤로처럼 의젓한 자화상이 그려지지 않는가. 거꾸로 보았던 그 화면에선 자기의 일탈을 감시하며 괴롭혔던 사람의 화상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자화상은 선망의 영역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 않았나. 오래 머물러있기가 민망했다. 한 뼘도 채 안되는 뜬 구름의 얼룩은 한 순간을 스치듯 지나갈 수밖에 없는데, 루이스호수는 그 흔적을 밑바닥의 부유물처럼 가라앉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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