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맥킨리산 중턱에서

2007.01.31 14:39

박봉진 조회 수:678 추천: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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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눈으로 뒤덮인 알래스카의 맥킨리산(Mt. McKinley) 중턱에 섰다. 북미대륙에서 가장 높은 6194m의 명산이라서 그럴까? 구름에 가려 연중 3할 정도만 장엄한 비경을 볼 수 있다는데 눈앞에서 보는 것은 모처럼 산이 얼굴을 펴준 은덕일 게다. 마치 활처럼 굽은 7부 능선쯤의 폭신한 눈밭이 활주로가 되어주었다. 저만치 나를 실어준 허름하기 짝이 없는 날틀(세스나 경비행기)이 물에 뜬 연잎에 붙은 나비처럼 눈 위에 앉아있다. 랜딩기어 바퀴 위에 덧붙은 눈썰매가 산 중턱이지만 눈이 많아서 이착륙을 안전하게 해주었으리라.

내려서 십오 분 동안 눈 위를 걸으며 설경도 감상하랬다.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란 말을 생각하면 이 시간은 초로인생의 세월일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나의 어디쯤일까? 갑년을 넘긴 사람의 하산 길은 예전보단 바쁠 거란 것은 짐작하지만 흘러가는 뜬 구름이 어쩜 그 대답을 들려줄는지. 어쨌든 환호성만 내뿜고 있을 겨를이 없다. 순백의 도화지 위에 내 삶의 자화상을 그려봐야 하리. 저벅저벅 발자국을 찍어놓고 보니 해수면보다 낮은 땅 ‘데스벨리(Death Valley)의 이름나있는 모래언덕과는 영 딴판이다. 거기서는 ‘어린왕자’의 별에서처럼 동이 트거나 노을이 지는 모습을 보며 발자국을 어지럽게 찍었어도 곧장 바람이 지워주었다. 여기서는 빼뚤빼뚤한 채 남은 내 삶의 추한 뒷모습이 나를 소스라치게 한다.

이곳에서는 잠시 눈을 감았는데도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자연경관의 보고인 알래스카는 오늘날 엄청난 매장량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한 지하자원은 물론, 풍부한 어자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전략적인 요충지임을 감안할 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땅이 아닌가. 알래스카의 오래지 않는 역사를 돌이켜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군상들이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날 제정 러시아와 미국도 그랬었고, 무엇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것은 지금의 나 또한 예외가 아닌 것을-.

제정 러시아는 덴마크의 탐험가 베링(Bering)이 이끄는 러시아 선원들이 1741년 알래스카 본토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이후 그 땅의 실질적인 영향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들 궁정의 사치로 재정이 궁핍해진데다가 수달피 등 모피교역도 시들해진 알래스카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헐값이라도 받고 미국에 떠넘기려 했다.

미국 또한 그때는 알래스카를 탐탁찮게 생각했기로 많은 논란 끝에 이의 매입을 주도했던 스워드(Seward) 국무장관 안이 아슬아슬한 1표차이로 인준이 됐다. 1867년 알래스카(원주민 언어, 위대한 땅)를 거저나 다름없는 단돈 720만 달러(에이커당 12센트)에 샀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의회 지도자들과 언론들은 계약서에 서명한 스워드(Seward) 국무장관을 끈질기게 곱씹었다. 얼마나 집요했으면 Seward's Folly(스워드의 어리석음)란 신조어까지 만들어 유행시켰겠는가. 미국정부는 그 땅을 그냥 오래 방치해두었다가 뒤늦게 엄청난 자원의 보고임을 알게 되자 1959년 미국의 49번째 주로 탄생되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안목이나 판단력이란 항상 그런 것. 환히 들여 보이는 물속도 그게 열 길인지 아닌지를 재보지 않고서는 잘 모를 텐데 항차 사람의 속마음을 어찌 알 것인가. 부대끼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을 남의 말만 흘려듣고 어찌 속단할 수 있으랴. 비행기 관광을 예약해놓고 앵커리지에서 렌트카를 빌려 타고 데날리 국립공원의 경 비행장에 내렸을 때만 해도 나는 호기심에 들떠있었다. 6인승 경비행기에 탈 일행이랬자 나와 아내 그리고 처제 도합 세 사람뿐이라서 우리가 비행기 한 대를 빌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환상은 물거품에 다름 아니었나보다. 기내에는 유니폼도 차려입지 않은 일상복차림의 희멀건 사내가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 기체도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색상이 바랜 좌석에다 비행기엔진소리 마저 흡사 트랙터의 덜덜거리는 소리 같았다. 에어택시이기는커녕 노후한 날틀이었다. 언젠가 같은 기종 세스나 경비행기가 관광객을 태우고 그랜드캐년 상공을 날다가 추락했다지 않았나. 명색이 비행긴데 비상시를 대비한 낙하산도 갖춰놓지 않다니. 후회막급이었다. 허나 어쩌겠는가. 이미 내 운명은 활에서 떠나버린 화살인 것을.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더니 정말 그랬다. 그제야 내 눈길이 기내에서 바깥쪽으로 갔다. 기체 아래로 펼쳐지는 파노라마의 장관. 초원과 늪지대와 산림지대 그리고 빙하의 연장선인 강물! 사람의 출입을 임의로 막아놓은 비무장지대인들 이보다 더 완벽하게 통제구역을 만들어 놓을 순 없으리라. 이런 미답지로 짠 장애물의 허리띠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준 곳이 아니면 사람의 도보 출입은 어림없을게다. 맥킨리산은 평지에서 곧바로 고도가 시작되는 산이 아니란 것을 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았겠는가.

산의 고도가 시작되고부터 나무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색깔을 달리 입고 있었다. 군데군데 긴 머리카락에 삭발 기계가 지나간 것처럼 아름드리나무들을 휩쓸어버린 빙하자국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느닷없이 샘물을 분수처럼 솟아 올리다니. 맥킨리산은 그에 속한 모든 권속들을 다 감싸며 다독거려주고 있었다. 산의 자애로운 표정에 마음이 유순해졌는지 날틀은 이륙 때 고도를 높이느라고 덜덜거렸던 기계음도 편한 단잠을 이룬 아기의 숨소리로 바꿔내면서 엄마의 젖무덤께 일 듯한 폭신한 눈밭에 살포시 멎었다.

누가 살갗에 닿기만 해도 간지러울 하얀 솜털, 민들레 씨들을 후후 하염없이 불어 내놓았을까. 눈밭에서는 동네 강아지들마저도 발 시린 줄 모르고 뛰놀지 않든가. 내 마음도 언제 풀렸는지 나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신비경에 취해 얼마만큼 눈 위를 걸었다. 발바닥에서 전해져오는 사랑하는 사람의 보드라운 감촉은 살살 녹아내린 솜 과자이었던가 보다.

그대로 서서 멕킨리산의 위와 아래를 번갈아 봐야지. 나의 걸어온 길과 가능성까지도. 여태 내가 이리저리 헤맸던 것은 평지에서만 사방을 보았기 때문일 게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에 부여받은 산봉우리 하나씩은 다 올라갔다가 내려오게 되어있지 않은가. 산봉우리까지 올라가는 정도는 저마다 달라서 어떤 이는 정상까지가, 나는 이 산의 중턱까지가 한계일 것만 같다. 왜냐면 나 같은 범부는 걸어 올라왔든, 무엇에 실려 왔던지 간에 더 이상 오를 가망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순간, 어느 명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번쩍 정신을 들게 한다. 그는 한국에서 세미나 연사로 초청을 받았다고 했다. 묵었던 숙소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세미나 장소인 그 호텔로 갔더란다. 안내원이 출입자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번들번들한 자동차를 타고 온 말쑥한 신사복차림의 사람들은 들여보내주면서 먼저 도착한 자기는 한 팔로 가로막고 입구에 서있게 했다. 거의 시작시간이 되어갈 무렵에야 안내원은 귀찮은 사람을 내쫒으려는 듯 무슨 용무로 왔냐고 묻더란다. 그제야 행사주관자가 안에서 나와 황망히 영접하더라고 했다.

본받지 말아야 할 허물은 자기도 모르게 흉보면서 닮는다더니 나도 별 수 없는 유전인자의 속물이었나 보다. 그 낡아 뵈던 날틀은 오늘날까지 나를 나 되게 감싸준 환경이었고, 그만큼의 세월로 주름잡힌 내 육신인 것을. 그리고 나는 평상복차림의 희멀건 사내에게서 나를 잘 건사해주었던 선친의 모습을 보았고, 우리 애들의 나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제 또 내 정신이 혼란해지는 날엔, 나는 다시 맥킨리산 중턱을 떠올릴게다. 거기 눈밭에 서면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과 그 가능성의 한계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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