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엄마의 눈물

2003.08.28 23:49

김영강 조회 수:1377 추천:110

    민자는 요즘 마음이 편치가 않다. 대학생이 된 아들을 볼 때마다 옛날 일들이 새록새록 생각나기 때문이다. 딸아이한테는 안 그런데 유독 아들아이한테만은 죄를 많이 지은 기분이다. 두 아이가 자라는 동안 별 생각 없이 세월 따라 무난히 잘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직장생활 하느라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한 것도 미안하고 아이들을 내 소유물인양 함부로 대한 것도 후회스럽다. 더구나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동생 돌보는 책임을 지운 것은 생각할수록 미안하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걸리는 일은 아들과의 채무관계다. 이자 붙여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꾸어 쓴 돈을 민자는 근 십 년 동안이나 갚을 생각을 한번도 안하고 살아온 것이다.

    데니스는 여덟 살 때부터 열쇠목걸이를 하고 네 살 밑인 동생을 돌보며 집을 지켰다.
    “학교 끝나면 모니카 픽업해서 집으로 곧장 와야 돼. 그리고 모니카 잘 봐야 돼. 숙제 바로 하고, 모니카 책도 읽어주고. 알았지?”
    항상 모니카 잘 돌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민자는 어린 아들을 늘 큰아이 대하듯했다. 그리고 동생 돌보는 값으로 일주일에 용돈을 오 달러씩 주었다. 딸아이는 제 오빠만 같이 있으면 엄마 찾지 않고 언제나 잘 놀았다. 데니스는 돈이 생기는 대로 저금통에다 쏙쏙 집어넣었다. 이백 달러가 모이면 레디오콘트롤 자동차를 사겠다고 했다. 보통 ‘알시 카(R.C. Car)’라고 부르는 장난감 자동차이다.
    “ '알시 카’ 사면 우리 같이 놀자. 이렇게 이렇게 하면 차가 앞으로 막 달리고, 또 이렇게 하면 차가 뺑 돌아가고 참 재밌다.”
    제 동생한데 신나게 설명을 하며 데니스는 ‘알시 카’ 살 생각에 들떠 있었다.
    '알시 카’라는 것을 옆집에 사는 대학생이 갖고 있어 민자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보통 전화기만한 제법 큰 리모드콘트롤을 손에 쥐고 조종을 하면 땅에 찰싹 달라붙은 자동차가 쌩쌩 잘도 달렸다. 차의 크기도 리모드콘트롤 두 배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건 어린아이 장난감이 아니다. 어른들이 취미로 가져 서로 모여 자동차경주도 하는 어른 장난감이다. 옆집 대학생은 얼마 전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내쇼날 경연대회에서 이 등을 해 트로피를 타왔다고 했다. 값도 굉장히 비싸, 제일 싼 것이 이백 달러 정도라고 한다.
    녀석이 간도 크지, 그렇게 비싼 차를 사겠다고? 그 나이에?
    더구나 길에 나가서 놀아야 된다는 것부터가 그녀의 대답은 ‘노오’이다. 물론 데니스는 엄마 없을 땐 절대로 밖에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만, 또 집 뒤뜰에서만 놀겠다고 하겠지만 어쨌든 민자는 반대다.
    그러던 어느 날, 민자는 데니스의 저금통을 탈탈 털었다. 갑자기 현금이 필요해 이자 붙여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데니스의 전재산 백오십 달러를 꾸어 쓴 것이다. 그리고는 갚을 생각도 않고 한 두어 달이 지났는데, 어느 날인가 데니스가 돈 이야기를 꺼냈다.
    그 날은 회사 일로 인해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고 가슴이 답답했다. 영어로 좔좔 설명을 할 수가 없어 아까 낮에 도리어 매니저로부터 당한 것이다. 크레딧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좀 알쏭달쏭한 문제가 발생했었다. 그는 부득부득 자기가 맞다고 우겼다. 열정과 욕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은 하나 그는 수학적인 머리는 좀 둔한 편이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는 팽팽 잘 돌아가는데 말이 마음같이 술술 나오지가 않는 것이다. 내일 아침 일찍 나가서 거기에 부수되는 서류를 다 뽑아서 다시 설명하리라 다짐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때 데니스가 ‘엄마’ 하고 부르면서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민자는 누운 채로 데니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왜 그래”
    “저... 엄마!”
    “뭔데 그래? 말해봐.”
    엄마가 저기압인 것을 알아차린 둣 데니스는 한참을 머뭇거리기만 했다.
    “엄마 불러 놓고 왜 말을 안해?  말하기 싫으면 관두고 가서 잠이나 자. 엄마 피곤해.”
    그때서야 데니스는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엄마, 나 돈 줘”
    “무슨 돈?”
    실눈을 뜨고 아이를 쳐다보는 민자의 표정은 만사가 귀찮은 듯했고 목소리도 점점 더 짜증스러워지고 있었다. 무슨 돈인지 생각도 안 나는 것 같은 말투다.
    “저 번에 엄마가 꾸어간 거. 백오십 불.”
    그 순간 민자는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침대에서 발딱 일어났다.
    “야, 이 노무 새끼야, 너 밥 맥여 주고, 옷 입혀 주고, 학교 보내주고 엄마가 다 해주는데, 뭐 돈 달라고?  니가 무슨 돈이 필요하니?  나뿐 노무 새끼. 엄마 돈 없어. 가 잠이나 자.“
    옆에 누운 남편이 한술 더 떴다.
    “저 노무 새끼 저거 내쫓아버려. 쪼그만 놈이 무슨 돈타령이야?”
    우두커니 서 있던 데니스는 힘없이 등을 돌리고 묵묵히 방을 나갔다. 그후로 데니스는 한번도 돈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으며 민자도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근 십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갑자기 그 일이 자꾸 생각 나 왜 이렇게 마음이 괴로운 것일까?
    사실 그 돈을 빌려쓸 때, 민자는 이자 붙여서 곧 갚겠다고 데니스랑 손가락까지 걸며 철석같이 약속을 했었다. 그래놓고 돈 못 준다고 퍼부어댔으니 데니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원통하고 분한 일이다.
    그날 밤, 방안의 불은 꺼진 채였고, 데니스는 응접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등뒤로 받고 서 있었기에, 그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민자는 데니스의 감정 따위에 대해서는 손톱만치도 개의치 않았었다.
    말없이 방을 나가던 그 뒷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축 쳐진 어깻죽지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엄마가 이자 붙여서 곧 갚아준다고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항의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암말도 않고 방을 나갔을까? 엄마 아빠가 막 소리를 지르니까 무서워서 그랬을까? 듣고 보니 ‘밥 맥여주고 옷 입혀주고 학교 보내주고’ 등등 엄마가 한 말이 다 옳은 것 같아서 그랬을까? 제 방으로 건너간 데니스는 무슨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을까? 녀석 성질에 아마 벼르고 벼르다가 말을 꺼냈을 것이다.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해볼까 말까 하고 머뭇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 드디어 도합 이백 달러가 모이게 됐으니 ‘알시 카’ 살 꿈에 부풀어 용기를 내서 돈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야단만 맞았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아마 밤새 울었을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녀도 눈물이 났다.
    십 년 동안이나 한번도 돈 이야기를 안한 것은 진짜로 내쫓아 버릴까봐 겁이 나서 그랬을까? 부모가 돼 가지고 어린 자식한테 그런 모진 말을 하다니...
    후회가 막심했다. 이미 뱉어버린 말이니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로 인해 입은 상처를 평생 치료하지 못해 폐인이 된 아들에 관한 어느 목사의 얘기가 생각났다. 정말 아찔하다. 지금까지 별탈 없이 자라준 아들이 대견스럽고 고맙기까지 하다. 이러한 마음을 아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겠다고 민자는 결심했다. 그리고 어린 나이 때부터 동생 돌보는 책임을 지운 것도 사과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다음 날 은행에 가서 빠닥빠닥한 백 달러짜리 석 장을 찾아서 봉투에 잘 넣었다. 미안한 마음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십 년 동안 이자를 쳐도 갑절은 갚아주어야 한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하고 생각도 미리 했다. 퇴근 후, 집에 와선 데니스 저녁도 준비를 해놓았다. 얼은 불고기 감을 녹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준비랄 것도 없다. 그런데 데니스가 들어올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녀가 직장생활을 막 시작한 다음인 것 같다. 늦둥이를 낳은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 갔었는데 데니스가 하도 아기를 예뻐해 ‘엄마도 아기 하나 낳을까?’ 하고 물었더니 데니스는 정색을 하고 ‘노오’라고 대답했다.
    ‘내 책임이야 내 책임’ 하면서 동생은 모니카 하나만으로도 족하다고 울상을 하며 손을 크게 내저었다.
    그 당시엔 별 느낌 없이 웃고 말았는데 요즘은 그 말도 자꾸 마음에 걸린다. 어린것이 동생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늘 부담을 안고 산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만일에, 만일에 말이다.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나는 동생 돌보느라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고 집에서 감옥살이만 했다. 내 어린 시절은 정말 지겨웠다. 내가 아홉 살 때 엄마가 내 전재산을 꾸어가놓고 주지도 않고 막 욕하고 야단만 치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등등 이런 말로 따지고 들면 어쩌지?
    그런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데니스의 성격에 엄마한테 따지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할 수 없다. 엄마가 분명히 잘못한 일이니 아들이 어찌 나오든 간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

    땅거미가 질 무렵 데니스가 한국유행가를 흥얼거리며 현관문을 들어섰다. 대학에 들어간 후부터 데니스는 한국 친구들을 사귀며 서서히 한국 문화권으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노래를 부지런히 배우면서 가사 뜻을 모를 땐 엄마한테 묻기도 한다. 어려운 부사 같은 것은 영어로 표현하기가 힘들어 보기를 들어가며, 또 적합한 용기들을 갖다놓고 설명을 해주면 데니스가 완전하게 그 뜻을 알아 민자는 흐뭇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데니스는 배고프다면서 부엌으로 직행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민자도 얼른 따라 들어갔다.
    “엄마가 해줄게. 뭐 먹을래?”
    “아, 배고파. 아무거나 빨리 되는 걸로, 아무거나 좋아요.”
    데니스는 노래를 부르듯 아주 기분 좋게 말했다.
    아무거나 빨리 되는 걸로 해달라는 데니스의 말에 민자는 옛날 생각이 났다.

    미국에선 아이들만 집에 두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녀의 알량한 계산 아래, 학교 끝난 후부터 그녀가 집에 올 때까지 두 아이를 학교 근처 공원에서 놀게 한 적이 있다. 며칠간뿐이었으나 생각하면 할수록 후회가 막심하다.
    아이들을 미아처럼 밖에다 버려두다니...
    퇴근하자마자 급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공원엘 가면 다른 아이들은 다 집으로 가고 텅빈 공원엔 두 남매만 쓸쓸히 남아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의 깔끔하고 반듯했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헝클어지고 꽤재재한 모습으로 긴 의자에 턱을 괴고 두 아이가 앉아 있었다. 노는데도 신물이 났는지 우두커니 벤치에 앉아 있다가 엄마의 차를 보면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기뻐하면서 달려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프리웨이에 대형사고가 나 어두워진 후에야 집엘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흔한 시대였더라면 어떻게 연락은 할 수 있었으련만, 그 땐 속절없이 차안에 갇혀 애를 태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깜깜해져 사람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공원을 지나 집엘 당도하니 불꺼진 집 앞 계단에 두 아이가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그들은 엄마의 차를 보고 용수철이 튀듯 동시에 발딱 일어나 ‘엄마’ 하고 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지나가는 차들을 헤아리며 얼마나 눈이 빠지게 엄마를 기다렸을까? 한적한 동네라 차들의 왕래도 드물었을 텐데 어린 마음에 얼마나 초조했을까?
    데니스는 차 사고라도 났나 하고 걱정을 했다면서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흙장난을 했는지 꾀질꾀질한 모니카의 얼굴엔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영락없는 고아였다. 죽은 엄마가 살아온 것처럼 기뻐 날뛰는 두 아이를 껴안는데 왈칵 눈물이 복받쳤다. 남편이 들어올 시간은 아직 멀었는데도 그가 원망스러워 화가 치솟았다. 무심한 이웃 사람들도 괘씸했다.
    아니지, 그들은 두 아이의 사정을 몰랐을 것이고 문 앞에 앉아있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수 있다. 새로 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동네라 그땐 집도 드문드문 했었고 또 이사한 바로 직후였으니까.
    미국에 와서 두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니기 전까지 민자는 한국타운에서 살았었다. 그리고 직장을 가진 그 몇 달 후 LA 근교인 이곳 밸리로 집을 사서 이사를 한 것이다.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데니스는 배고파 죽겠다면서 아무거나 아무거나 좋으니 빨리 되는 걸로 빨리 해달라고 엄마를 재촉했다. 민자는 신을 신은 채, 가방을 맨 채로 부엌으로 직행하는데 가슴이 메여왔다.

    십 년 전 그날과 똑같은 메뉴로 그녀는 데니스의 저녁을 차렸다. 녹여놓은 불고기 감을 소금, 후추, 마늘을 넣고 프라이팬에 드글드글 볶았다. 그리고 밥통에서 밥을 푸고 김치를 꺼낸 후 커다란 타원형 쟁반에 담은 다음, 계란 프라이를 밥 위에다 얹었다. 구어놓은 김은 통째로 꺼내놓았다. 오 분만에 완성된 저녁이다.
    “음 맛있겠다”
    녀석은 정말 맛있게 먹는다. 가리는 것 없이 뭐든지 다 잘 먹는다. 그리고 늘 행복해, 민자는 아들만 쳐다보면 속 상한 일도 달아나 버리고 만다. 민자는 데니스 옆에 앉아 밥 다 먹으면 이야기를 꺼내야지 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고백을 하고 용서를 빌자고 결정을 했으면 마음이 가벼워져야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데니스가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고 자꾸 생각이 엇갈려 갈팡질팡 감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남편은 타주로 출장 중이고 모니카도 친구 집에 가고 없고, 녀석 기분도 아주 좋아 보이니 분위기는 안성맞춤이다. 혀로 핥아먹은 듯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 치운 후 잘 먹었다면서 데니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요새 회사 일은 어때요? 지난번에 엄마가 미팅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고 그랬는데, 끝났어요?”
    회사 들어간 지가 벌써 십 년이나 됐는데도, 미팅이 있을 땐 늘 긴장이 되고 어떤 때는 배까지 쌀쌀 아프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언어의 장벽은 무너뜨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미팅 땐 본사에서 나온 감사팀도 끼어있어 더 신경이 쓰였다. 미팅은 잘 끝났고 일 처리가 잘되어 있어 감사팀으로부터 칭찬받았다는 말을 한 후, 민자는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데니스! 엄마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아들의 손을 잡는데 그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데니스, 미안해. 엄마가 너한테 너무너무 잘못한 거 많아. 정말 미안해.”
    몇 마디 말을 해놓고는 그냥 눈물이 쏟아져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데니스는 엄마의 갑작스런 행동에 너무나 놀라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며 무슨 큰일이 났느냐고 물었다.
    “옛날에 너 어릴 때 말야. 모니카 보느라고 수고 많이 했어. 엄마가 널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게 하고 집에서 모니카만 보라고 했으니.., 정말 미안하다. 그때 모니카를 엄마 올 때까지 계속 베이비시터한테 맡겼어야 했을걸, 왜 내가 어린 너한테 모니카를 떠맡겼는지 모르겠어. 돈 조금만 더 주었더라면 됐을 텐데 말야. 엄마가 너한테 정말로 못할 짓 많이 했다. 미안해.”
    지금은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해 ‘돈 조금만’ 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그 당시 그녀에게는 그 돈이 ‘큰돈’ 일 수도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데니스는 근처에 있는 베이비시터한테 가서 모니카를 데리고, 세 블록을 걸어서 집으로 왔었다. 그리고 열쇠목걸이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와 엄마가 퇴근하고 올 때까지 동생을 돌보았다. 민자는 데니스가 지켜야할 사항들을 매일 아침마다 되뇌며 저녁에는 항상 점검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지켜야 할 한가지 법칙은 엄마가 올 때까지는 밖에 나갈 수 없고 또 친구들을 집에 들여서도 안되는 것이었다. 데니스는 그 법칙을 철저하게 지켰고 다른 지시사항들도 잘 시행을 했었다.
    하루는 모니카가 그랬다. 자기는 문 안쪽에서 그리고 친구 비키는 문 바깥 포우치에 앉아 얘길 했다고. 집 문턱이 삼팔선이 된 것이다. 정말 그땐, 아이들이 착해 엄마 말을 잘 듣는 것을 감사한 줄도 모르고 살았다. 한데 십년이 지난 지금에야 감사함과 미안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그때는 너도 어린애였었는데 너한테는 하나도 신경 안 쓰고 맨날 모니카 잘 돌보라고만 그러고... 정말 엄마가 너한테 너무 무심했어. 엄마가 사과할게. 정말 잘못했어. 회사 다니는 핑계 대고 맨날 피곤하다고만 그러고... 너희들한테 잘해준 것도 아무 것도 없고, 신경질만 부리고 너한테 너무 함부로 했어. 정말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회사 다닌다는 핑계가 아니고 그땐 정말 피곤할 때가 많았다. 일을 한다는 자체를 즐거워하고 보람을 느끼는 성격인데도 가끔씩은 너무 피곤해 만사가 귀찮았다. 아이들도 눈에 안 들어왔다. 언어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가 가장 큰 요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연로한 시부모님이 노인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어 더 바빴다.
    민자는 자기가 어떻게 말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미안하다 잘못했다’ 라는 말을 반복했다. 조리 있게 차근차근 얘기를 해야지 하고 기껏 준비해 놓은 순서도 엉망이 되고, 그냥 감정에 복받쳐 계속 눈물이 쏟아졌다.
    데니스도 따라서 울었다. 엄마가 우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냐면서 그게 뭐가 나한테 미안하고, 또 울 일이냐고, 엄마가 우니까 속 상하다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는 우리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동생을 돌본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고, 엄마가 직장을 가진 것도,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것이니 그것도 자기하고 모니카를 위한 엄마의 희생이란다. 엄마가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동네에 집을 사서 이사올 수가 있었고 또, 자기가 좋은 환경에서 좋은 친구들과 사귀었기 때문이 비뚜로 가지 않고 이만큼 잘 컸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다 낡은 아파트에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자기가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극도의 경우에는 갱이 될 수도 있었고 마약에 손을 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대학 들어가 사귄 한국친구 중에, 어린 시절은 너무너무 지겨워 돌이켜 생각하기조차도 싫다는 애가 하나 있는데, 자기는 좋은 부모 밑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집에서 모니카와 둘이 있을 때도, 금세 시간이 지나 어느새 엄마가 들어왔단다. 모니카가 아니었더라도 밖에 나가 놀 시간이 없었을 테니까 하나도 미안하게 생각지 말라고 엄마를 위로했다.
     그리고 엄마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자꾸 잘못했다고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다. 자기가 어디 가야할 일이 있을 땐, 엄마가 회사 갔다와서 피곤해도 운전해주며 다 데리고 다녔고, 학교에서 오픈 하우스를 할 때도 안 빠지고 꼬박꼬박 참석해 예쁜 엄마가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부모가 마땅히 해주어야 할 그런 일도 잘한 일에 다 포함을 시켰다. 아주 갓난아기 때부터 베이비 시터에 간 친구들도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자기는 아주 행운아란다. 엄마가 꼭 필요한 유년기엔 엄마가 늘 자기 곁에 있어 주었으니 그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고 강조를 했다
    “또 엄마가 맨날 우리 친구들 밥 해주잖아요. 팀은 지금도 돼지 불고기 얘기해요.”
    팀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동부의 H대에 들어간 데니스의 친구다. 팀 생각을 하면 데니스한테 더 미안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유난히 둘이 친했고 공부도 잘했다. 스펠링 비 대회에 나갈 학교 대표를 뽑을 때도 둘이 나란히 끝까지 경쟁을 하다가 데니스가 뽑혔었다. 팀 엄마처럼 민자도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아들한테 정성을 쏟았더라면, 아니 팀과 같이 사립고등학교에만 다녔더라도 데니스도 동부의 일류사립대학에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두가 다 아들 뒷바라지를 잘못한 그녀 자신의 탓 같았다.

    자식이란 두루두루 섞이고 부대끼며 보통아이로 키워야 된다는 것이 그녀의 철학이었기에, 주소까지 속여가며 좀 나은 학교로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부모들을 우습게 생각한 민자다. 그것은 도리어 아이를 정직하게 자라게 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는 행위라 생각했었다. 한데 요즘 들어선 자꾸 회의가 생기면서 혼돈스럽기까지 하다. 동부의 아이비 리그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이 너무나 대견해 보이고 그 부모들이 애들 자랑을 늘어놓을 땐 부럽다 못해 질투까지 꿈틀거리며 속이 상하기도 했다. 집 근처의 주립대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을 때만 해도 좋아서 날뛴 민자였다. 정말이지 지금와서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사실이다.

    참 그러고 보니 아들은 친구들을 자주 집에 데리고 왔었다. 미국애들인데도 김치도 잘 먹고, 불고기, 만두, 김, 등등.. 주는 대로 참 잘 먹었다. 언젠가는 김을 통째로 내놨더니 그걸 다 먹어치워 놀란 적도 있다. 처음엔 김치를 씻어 주었는데 몇 번 먹더니 이제는 씻지 말고 그냥 달라고 했다.
    팀은 돼지 불고기를 특히 좋아했다. 갑자기 들이닥쳐 거리가 없을 때는 불고기에다 고추장을 넣어 맵게 만들어주곤 했다. 언젠가는 팀 엄마가 도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데 팀이 그토록 맛있다 그러냐고 양념하는 법을 묻기도 했다. 친구들이 두어 번만 왔다 가면 일주일 먹을 시장거리가 바닥이 났었다. 그래도 그녀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후딱후딱 해주었다. 요즘은 친구들이 한국아이들로 서서히 바뀌고 있어 그녀는 더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불고기를 굽는다.

    데니스는 말을 계속하면서 한 가지 좀 아쉬운 게 있다면 그것은 아빠랑 단둘이 시간을 보낸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빠가 회사 일로 출장이 잦아 시간이 없었겠지만 하고 변명까지 해주면서도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 말에 민자는 가슴이 뜨끔했다. 넷이 같이 외출하는 적은 많았으나,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만 시간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결혼해서 아들 가지면 자전거 타고 공원에도 같이 가고, 운동경기도 같이 보러 가고 또 영화관에도 같이 갈 것이라고 했다.

    한가지 잊혀지지 않는 일 중에 엄마한테 굉장히 고마워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고부터  어디서 사왔는지 엄마가 수학 연습문제집을 가지고 와, 하루에 꼭 두 장씩 하게 하고 저녁에 책엎해 주면서 잘했다고 칭찬도 많이 해주었단다. 처음에는 문제가 아주 쉬워 십분 이십분이면 해 치웠는데 엄마가 점점 어려운 책을 사 가지고 와 어떤 땐 문제 푸느라고 한 시간도 더 걸렸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것이 많이 도움이 된 것 같다면서, 그룹으로 모여 시험공부할 때, 자기는 없으면 안되는 약방 감초란다. 교수님이 강의할 때는 너무나 어려워 잘 이해가 안되던 것도 자기가 설명을 해주면 쉽게 이해가 된다고 친구들이 꼭 자기를 찾는단다.

    녀석이 어찌나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지 엄마와 아들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뀐 기분이었다. 폭풍우가 한바탕 지난 후 바다가 잔잔해지듯 민자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정말 고마워. 너처럼 착하고 좋은 아들을 두어서 엄마는 참 행복하다.”
    그녀는 드디어 돈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거 또 하나 말할 거 있어. 근데 이 건 진짜로 엄마가 너한테 너무너무 잘못한 거야”
이제는 울음 대신 계면쩍은 웃음을 띄운 얼굴이 되었다. 어린아이에게 심한 말로 퍼부어 댄 그날 밤 일을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던 엄마의 그 헝클어진 모습이 데니스의 기억에서 제발 잊혀져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왜 옛날에 엄마가 너한테 돈 꾸운 거 있지? 백오십 불..., 생각나지? 너 아홉 살 때 말야. 엄마가 그거 아직도 안 갚았잖아. 이자 붙여준다고 약속해 놓고, 돈도 안 주고, 너한테 야단만 치고, 그때 많이 속상했지? 그 동안 내가 왜 갚을 생각을 통 안했는지 나도 너무 이상해. 엄마가 미안하다. 그 동안 이자 붙여서, 이거 삼백 불이야. 자 받아.”
    봉투를 건네주니 데니스는 손을 내저으며 자기는 다 잊어버리고 생각도 안했다면서 그 돈은 안 갚아도 된다고 했다. 자동차도 엄마가 사주고 대학교 학비도 엄마가 다 내주었는데, 괜찮다고 안 받겠단다. 그럼 자기가 선물하는 것으로 하고 예쁜 옷 한 벌 사 입으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속이 깊어 그것도 민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래도 이 돈은 받아야 돼. 그래야 엄마 마음이 편해져. 너 왜 옛날에 ‘알시 카’ 사고 싶어했잖아. 그거 사. 그 장난감은 지금 네 나이에 어울리는 거야. 아니면 다른 거 네가 제일 갖고 싶은 거 사.”
    데니스는 알았다며 돈을 받으면서 굉장히 좋아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며 느릿느릿 말했다.
    “근데 엄마, 내가 제일 갖고 싶은 게 딱 하나 있긴 있어요.”
    정말로 너무너무 갖고 싶은 게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말할 수는 없단다.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자동차도 대학 입학과 동시에 샀는데, 뭐가 또 그리 갖고 싶단 말인가.
    지금 그녀는 데니스가 원한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은 심정이다. 엄마가 사줄 테니 말해보라고 해도 데니스는 엄마가 절대로 안 사줄 거라면서 말을 안했다. 말했다가는 엄마가 화가 나서 야단을 칠 것이라고 했다.
    “에이, 괜히 말했네. 절대로 내가 가질 수 없는 건데...”.  .
    민자는 점점 더 궁금해졌다. 사주고 안 사주고 간에 그것이 뭔지 꼭 알고 싶었다.
    제일 갖고 싶은 것인데, 절대로 가질 수가 없는 것이라니 도대체 그게 뭘까?
    “모토싸이클.”
    “뭐? 모토싸이클? 얘는, 정말 큰일 나겠다.”
    데니스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민자의 언성은 갑자기 높아졌고 ‘미쳤구나 미쳤어’ 하는 말이 뒤이어 나오는 걸 아차 하고 침을 꿀떡 삼키며 말도 함께 삼켰다. 데니스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무안한 듯 말했다
    “그거 봐요. 엄마 지금 화내고 있잖아요.”
    “아냐. 화 안내. 네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치밀 딱 잡아뗐으나 속으론 좀 놀랐다. 데니스가 모토싸이클을 갖고 싶어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다. 모토싸이클이란 좀 껄렁껄렁한 아이들이나 타고 다니는 줄 알았다. 얼마 전에 친구 아들이 모토싸이클을 타고 가다 사고로 변을 당한 적이 있다. 그후, 민자는 모토싸이클을 타고 다닌다는 것은 폭탄을 안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짓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음과는 정 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
    “값이 얼마나 되는데?”
    “엄마는 괜히 그러네... 안 사줄 거면서...”
    가지고는 싶으나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자기는 벌써 결론을 내렸으니까 걱정 말라면서 브라이언이 새 거 말고 쓰던 거 샀는데 사천 달러 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또 놀랐다.
    “뭐? 브라이언이 모토싸이클 샀어? 아빠가 사 줬대?“
    브라이언은 착하고 공부 잘하기로 소문 난 데니스의 친구다. 할아버지랑 고모들이 대학입학 축하선물로 준 돈으로 샀다고 한다. 부모가 반대했는데 그냥 사 버렸단다. 그녀는 브라이언이 부모의 말을 거슬렸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배짱이었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들이 대견스럽고 고마워 감격의 눈물까지 흘렸는데 금세 마음이 변했다.
    이 녀석 정말 큰일나겠네. 방심해서는 안되겠네. 이제 브라이언 모토싸이클 얻어 타고 다닐텐데 이거 참 걱정이네..
    이러한 엄마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나 한 듯 데니스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아빠한테 되게 야단 맞고 도로 갖다 줬어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브라이언 아버지가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데 데니스의 그 다음 말에 그녀는 또 놀랐다. 아들 때문에 자꾸 놀랄 일 생긴다.
    “그 대신 B.M.W 새 거 샀어요”
    대학생이 B.M.W라...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민자 생각은, 그건 안되는 말이다. 그러나 모토싸이클과 B.M.W 둘 중에서만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그녀도 역시 B.M.W를 선택했을 것이다.

    며칠 후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민자는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다. 정말 남편하고는 얘기가 안 통한다. 대뜸 하는 말이 퉁명스럽기 그지없다.
    “뭐야? 애를 붙들고 잘못했다고 울고불고 빌었어? 엄마가 돼 가지고 창피하지도 않았어?”
    “뭐가 창피해요? 엄마라도 잘못했으면 사과를 해야지. 안 그래요?”
    “당신이 뭘 그리 잘못했어? 그만함 잘한 거지.”
    민자는 지금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들이 대견스럽고 감격스러워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데 남편은 너무나 냉정했다. 남의 얘기하듯 했다. 돈 이야기를 했더니 그까짓 백오십 달러가 뭐 그리 대단하냐면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돈 액수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남편의 속알머리가 한심하다 못해 밉쌀스럽기까지 했다.
    “당신은 어떻게 돈 액수를 가지고 왈가왈부해요? 돈 액수를 따질 일이 아니잖아요? 액수를 따져도 그렇죠. 어른들한테야 백오십 불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한테는 큰돈이죠. 데니스한테는 전재산이었잖아요? 그저 생긴 돈도 아니고 자기가 노력해서 번 돈이었고요. 아빠가 돼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해요?”
    그리고 자기가 내 쫓아버린다고 아이에게 말한 것도 잊어버렸다고 한다.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상처받을 말을 해놓고, 자기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통 없단다. 잊어버렸던 일도 상대방이 일깨워주면 생각나는 법인데, 남편은 정말로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돈을 두 배로 갚아준 것은 잘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사과하는 의미로 데니스한테도 골프 좀 가르쳐주세요. 어릴 때 아빠랑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없어 아쉽다고 하던데 지금부터라도 좀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세요. 그러고 보니 골프가 제일 안성맞춤이네.”
    민자는 데니스한테 뭐라도 좀 잘해주고 싶어 골프 이야기를 꺼냈다.
    “그 녀석이 골프 치고 싶다고 그래?”
    “아니, 그냥 내 생각이에요.”
    “골프는 무슨.... 당신 말야, 괜히 애 스포일시키지 마. 골프는 대학 졸업하고 지가 돈 벌면 치라 그래. 그때 배워도 얼마든지 잘 칠 수 있어. 골프 쳐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남편이 골프 시작할 때 민자도 골프채 등등 일체를 준비하고 같이 레슨을 받다가 그만 중간에 포기하고, 또 남편 따라 좀 다니다가 포기하고 이제는 손놓은 지가 꽤 오래됐다. 회사일 집안일 등등, 일인 다역을 해야 하는 그녀에게 골프는 아직 무리였다.
    “당신 그때 또박또박 잘 쳤어. 폼도 아주 이쁘고. 지금 다시 시작하면 금방 늘 거야.”
    “난 아직 골프 칠 형편이 안 돼요. 회사 그만두면 그때 치지  뭐.”
    “언제 그만 둘 건데?”
    민자가 회사 다니는 것을 남편은 아주 좋아한다. 돈을 꼬박꼬박 잘 벌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남편의 마음을 꿰뚫어보듯 환히 알고 있다. 그만둔다는 말에 아마도 가슴이 철커덩했을 것이다.
    “왜 내가 그만둘가 봐 겁이 나요?”
    남편은 대답이 궁해지면 동문서답을 하는 습관이 있다. 아내인 민자에게만 적용하는 얼렁뚱땅 방식이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비행기 오래 타고 왔더니 굉장히 피곤한데”
    남편은 몸을 들척이면서 이제 그만 자잔다.
    어떤 때, 민자가 뭘 따지고 들면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 알았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래 놓고는 아내를 바라보며 ‘근데 내가 뭘 잘못했지?’ 하고 싱글싱글 웃는다.
    그러다 보면 민자도 그만 남편의 웃음 속에 휘말려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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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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