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이숭자 (시, 시조)

하늘에 별이 뜨고

하늘에 별이 뜨고
땅에 꽃이 피고

이웃에 문소리가 나고
내 방에 불이 켜졌는데

누가 외롭다 하더냐

하늘에 별이 뜨고
땅에 꽃이 피고

오늘  

어젯밤
죽은 듯이 잠든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신 아드님이
나를 깨워주시고

금빛 날개로
함박웃음으로 내 앞에 펼쳐진
완전 공백의 두루마리 한 필
이를 이름하여 ‘오늘’이라 하셨다

오늘이 억만번 와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
시작이요 끝인 이 시간의 적축 속에
강물 같은 전설이 흐른다

오늘!
그것은 아무도 밟지 않은 망망한 백사장
희다 푸른 눈길을 홀로 가는 마음

그것은 어쩌면 애기 앞에 펼쳐진
티 없는 종이 한 장
그러면 너는 한 개 물감일레라

여기 너는
시커먼 광란의 파도를 그릴 것인가
아니면
간간이 떨어지는 눈물방울로
길섶의 푸성귀를 적실 것인가
아니면
다가올 빗바람에 떨며
전율의 고동 소리로 채울 것인가

실로 오늘만은 애기같이
동그라미 하나 아침해라 그려놓고
그 아래 다문다문 장미 포기나 심고
공작 같은 후광도 그리고
그런 웃음보 같은 화원이나 꾸며 보려므나

먼훗날 지나는 사람 있어
너의 체취 묻은 꽃잎이
마치 제 발자욱 같다고
후련히 돌아서 마음 겨운
그런 다른 이의 오늘도 있으려니

보라! 그 날 허허 궁창에
등불 하나 달으시고
밝은 쪽을 너에게 돌려
이것은 너의 것 ‘오늘’이라 하셨다.

새벽달 (시조)

새벽달 어른어른 속가슴 열고 가고
백목련 이슬 털고 여명에 물드는데
호수에 수련 잎 뜨듯 나도 함께 가는가


달팽이가 지나갔다

달팽이가
푸른 밤을 새워
화초밭을 걸어갔다는 것을 안다

아침엔 간 데 없어도
그 눍직한 찰풀 같은 진액이
질질 끌고 간 흰 여로를 남겼기에

그러나 나는
달팽이가 그 느린 신발을 끌고
밤새도록 내 꽃밭을 헤매는 의도를 모른다

전등 같은 뿔 치켜들고
달팽이야 목이 말라 밤 이슬에 왔더냐
어둠에 꽃내음이 미칠 듯 좋아서 왔더냐
아니면
왕거미 줄을 치듯
자잘한 벌레 새끼 덫을 놓으려 왔더냐
어쨌든 나는 너의 의도를 모른다

허나 하나 아는 것이 있다
나도 너처럼
밤 새워 걸어온 어제 그제가 있어
하아얀 시간 위에
하아얀 공간 위에
그 끈적끈적한 찰풀 같은 핏방울로
질질 끌고 간 오솔길이 남아있음을

나는 달팽이의 의도를 아직 모른다
사실은 나의 오솔길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노송 (시조)

태평양 굽어보는 백년 노송 언덕에
세월을 피로 긋고 굽은 등에 새 잎 돋아
비 바람 새 소리 속에 옛과 같은 솔내음

팜트리

하늘이 좋아
남국 하늘에 올렸다
가슴 타게 외치던 그 목청 뽑아 올려
가늘은 동체 끝에 아슬히 걸었다

더러는 가까이 더러는 멀리
풍선이 떴다. 악보를 그렸다
보라! 저 높은 하늘을 오선지로
승리의 왕관인 양 악보를 그렸다

나의 우주는 오직 머리 하나 몸 하나

이토록 단조함이 이토록 조화롭고
그러기에
그 수많은 지엽이랑 노랑나비 꽃향기 모두
조잡한 치장일라 아예 물리쳤다

이제 사막의 태양이 막바지에 왔다
활활 속으로 속으로 타는 이 가슴

발 아래 소음 속에 질식한 도시
저녁 노을에 보랏빛 꿈인 양 졸고 있고

봄바람 시냇물같이 내 관모를 스칠 제면
아기야 너는 4월의 간절한 기도를 올려라
나는 나의 소망의 가락을 다듬어
한 아름 금빛 햇살로 높이 부친다

낙조 앞에서 (시조)

못다 한 정념을랑 촛불 숲에 불 사르고
홍모란 송이송이 꽃 화관 쓴 서산 머리
만종아 울려라 만종아 다시 못 볼 저 하늘

빛 따라 어둠 따라 (1)

이 휘어질듯 밝은 대낮에
누가 촛불을 켜나

어둠은 빛의 생명을 부르는 모체
그 암흑의 돗자리를 펴라

빛이여
비로소 그대 육체를 뉘어라
형광등 열광의 얼굴

한 처음에
땅은 아직도 혼돈의 눅 반죽이던 날
이미 짙푸른 연잎인 양
깊은 물 위에 어둠 자락은 떠 있었다

빛만 빛이 아니라
어둠 또한 보완의 빛이려니

하늘과 땅 사이
해와 달 사이
명암의 이랑이랑
상무지개 이랑이랑
빛따라 어둠따라
허정허정 가네
바람처럼 가네

새  (시조)

꽃잎에 날개 달고 부리 끝에 비수 물려
창공이 허허롭다 돛배처럼 띄웠더니
혼일래 잽싼 혼일래 구름 베는 종달아

새벽 하늘

물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한 바다의 술렁이는 고도 같은 이 새벽 하늘 아래

찬 이슬에 젖은 풀밭을 밟고 서면
마지막 기도 같이 가슴에 와 닿는
쓰러져 가는 푸른 별빛

임이여 저에겐
정하수를 담을 그릇도 없나이다

설레이는 바다 같은
출렁이는 물결 같은 숨소리를 담을
노래도 없나이다

먼 지평으로 애틋한 유언을 실어보낼
비둘기의 두 날개도 없나이다

이 가없는 지구의 무대 위에
멀지 않아 황홀한 조명이 떠올진데
어찌하리까
마지막 설레이는
이 가슴을
어찌하리까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이 새벽 하늘 아래
푸른 별의 마지막 기도 속에
그저 산목련 한송이 이울듯
소리없이 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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