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비앙의 탈주병

2014.07.04 04:15

김학천 조회 수:350 추천:33

   오래전에 한국의 전직 대통령 한분이‘군대 가면 썩는 거 맞죠’라는 민망한 발언을 해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모독한다는 비난으로 고역을 치른 적이 있었다. 군대가 젊은이들에게는 잊고 싶은 억울한 희생의 공백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게다가 군대 가서도 제 볼일 다 보는 비범한 부류들의 소위‘귀족군복무’는 그들 마음의 상처를 더 깊게 하고 참담한 심정을 갖게 한다. 군 복무 기간 중 대학원에 다니고, 학위 따고, 고시도 보고 하는 가하면 휴가일수는 왜 또 그리 많은지 그런 특혜 같은 것들 말이다. 군복을 벗어버리고 싶을 것이고 병영에서 나와 버리고 싶을 때가 어디 한 두 번일까. 더구나 정신적 인격적 폭력을 당하는 경우라면 더 극에 달할 것이다. 그러니 병역이 남자들의 숙명이자 트라우마로 남는다고 하지 않는가.  
   근자에 한국에서 일어난 육군 병장의 탈주와 총기난사 사고를 보며 프랑스 보리스 비앙의 ‘탈주병’이 떠올랐다. 비앙은 소설가이자 엔지니어이며, 평론가, 번역가, 배우 외에도 트럼펫을 연주하는 재즈 음악가이기도 했던 실로 만능 연예인이자 프랑스 문학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19살 나던 해에 징병 소집을 당했으나 허약한 체질로 인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랬던 그가 남긴 400여 개가 넘는 샹송 중 가장 유명하면서도 사랑을 많이 받는 곡이 바로‘탈주병’이다. 프랑스의 대표반전가요인 이 노래가 쓰인 1954년은 전쟁으로 프랑스가 무척 어수선하던 때였다. 7년 넘게 끌던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날 줄 알았던 젊은이들은 새로 발발한 알제리전쟁이 징병제로 치러지면서 이미 군복무를 마쳤는데도 다시 징집영장을 받게 되었다.
  전쟁의 허구성을 느낀 비앙은 전쟁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가 대통령에게 보냈던 편지의 노래‘탈주병’은 바로 2차 대전에도 참가했던 사람이 주인공이다.  
  ‘대통령 각하, 편지 한 통을 드립니다. 꼭 읽어 주십시오. 수요일 저녁까지 전쟁터로 나가라는 징집영장을 받았습니다. 전 전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죽이려고 이 세상에 있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 각하, 화내지 마십시오. 전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탈영할 겁니다. 저는 아버지가 죽고 형제들이 전쟁터로 떠나고 아이들이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고통을 당하고 무덤에 누워계신 제 어머니는 모든 것을 비웃습니다.
   제가 포로였을 때, 전쟁은 제 아내를 훔쳐갔고, 제 영혼마저 도둑질해 갔습니다. 저의 모든 소중한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문을 닫아버리고 사라진 시간들과 헤어지렵니다. 그리곤 프랑스 모든 거리 위에서 구걸이라도 하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할 겁니다. 복종하지 말라고.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징집을 거부하라고. 누군가가 피를 흘려야 한다면 당신 피나 흘리시지요.
   대통령 각하, 만약 저를 쫓겠다면 헌병들에게 알려주세요. 전 무기를 갖고 간다고. 그리고 쏠 줄도 안다고.’그러나 검열 과정에서 마지막 부분은‘저는 무기가 없으니 쏘려면 쏘아보시라고 말입니다.’로 바뀌었다.
   이 노래는 대갈채를 받았지만 방송 금지를 당했다. 그러나 그 후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비앙이 노래했듯 전쟁은 삶을 파괴하고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헌데 이를 막기 위한 군대가 보이지 않는 내부전쟁으로 사람을 망가뜨린다면 참으로 고약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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