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의 편지

2011.12.05 03:02

김학천 조회 수:580 추천:173

마리아님의 하루는 늘 스케줄이 꽉 차있다. 더구나 주일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 첫 미사를 드린 후 요양원 봉사까지 마치고 돌아오면 전에 몰랐던 힘에 겨움을 느낀다. 이제 고희의 반이 가까워지니 어쩔 수 없는 나이의 무게일 게다. 차고에 차를 넣고 돌아서는데 문득 어제 우체통에서 꺼내온 우편물을 갑자기 울리는 전화를 받느라고 그냥 세탁기 위에 놓았던 생각이 났다. 그걸 들고 들어오면서 대강 훑어보는데 아주 특별한 봉투가 눈에 띄었다. “아, 빌 거구나.” 이는 흔히 오가는 그런 편지가 아니다. 아주 어렵게 받아볼 수 있는 답장이고 갈급한 마음에서 보낸 소식이다.
그녀는 서른다섯 해 전 LA에 살 때 다니던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 북가주로 이사를 와 첫 번 입사한 곳이 은행이었다. 그 무렵 낳은 첫 아들을 첫돌 되기 전에 잃고 내내 슬하에 자식이 없는 터에 남편마저 십여 년 전에 사별하고 혼자이다. 그나마 일이 그를 구원해 준 셈이다. 먼저 다니던 직장을 은퇴한 후 전에 같이 일하던 매니저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제의에 다시 은행 일을 시작하면서 성당봉사일은 물론 가톨릭 병원을 돌며 입원환자나 요양환자들과의 대화나 영성체를 돕는 원목 일을 꾸준히 해오는 중인데 때로는 동생들이 사는 LA로 다시 이사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크게 마음에 걸리는 건 바로 담장을 같이한 이웃집 빌 때문이다.
일곱 해 전이다. 식구처럼 가깝게 지냈던 빌에게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그 댁엔 미국인 남편과 아이리시계 부인이 사는데 둘 다 재혼이다. 아주 점잖은 존이라는 남편과 미술교육을 전공한 마리라는 부인 사이엔 전 남편이 데리고 온 딸 하나와 현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빌이 있다. 빌은 어렸을 적부터 성격이 조용하고 총명할뿐더러 예의도 바르고 붙임성도 있어 자식이 없던 마리아님에겐 자기 아들과 같은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 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둔 어느 날 급우들과 함께 모이는 조그만 파티에 초대되었다. 처음으로 맥주도 두어 잔 마시고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집에 돌아가려는 데 여자 급우 하나가 자기는 차가 없는데 가는 길에 태워줄 수 있겠느냐고 묻자 같은 방향은 아니지만 아마도 제부모와 연락이 닿지 않아 차편이 어려운데다 임신한 몸인걸 알아 흔쾌히 승낙했다. 헌데 가다가 예기치 않은 문제가 일어났다. 그 급우의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의 차가 차선을 변경하다가 그만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빌의 차를 들이받는 바람에 연이어 앞차 뒤로 밀려들어가 그 충격으로 여자아이가 실신을 하면서 불행하게도 유산을 한 것이다. 게다가 약간이긴 하지만 음주 운전을 했다는 죄목에 뱃속의 아이가 죽었으니 살인죄까지 적용되어 꼼짝없이 수감되는 엄청난 사건이 순간에 일어난 것이다.  
부모 모두가 기절할 정도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순수한 마음에 남에게 호의를 베풀다가 당한 이 끔직한 상황에 본인으로선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게다. 재판결과 25년이 구형되었으나 여자아이의 과거 유산경력이 밝혀지면서 여자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하여 15년 형으로 감형은 되었지만 이제 갓18세 된 젊은이로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때부터 본인은 물론 두 부부의 삶이 엉망이 되었다. 지루하고 긴 재판과정도 그렇지만 아직 어린나이에 말썽 한 번 피운 적이 없는 착한 아이가 겪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생각하면 잠도 먹는 것도 편치 않았다.
두 부부는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왕복 7시간이 걸리는 형무소로 운전하고 가는 날을 달력에 아들이 쓰던 빨간 크레용으로 동그라미를 진하게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줄을 섰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날의 허탈감.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어쩌다 차례가 와서 보게 되는 날에도 짧은 체인으로 연결된 수갑 찬 두 손으로 간신히 전화기를 잡고 말을 잇는 모습을 유리벽 사이로 마주대하고 보아야하는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그래도 아들을 만난다는 그 짧은 순간엔 모든 걱정은 다 날아가고 오직 줄에 서 있어 한 발 한발 다가갈수록 아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설렘으로 그 피눈물 나는 고통을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주 정부의 사정이 바뀌어 이제 얼마 있으면 타주의 형무소로 이전하게 된다니 왕복 7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의 운전이 필요한 처지이고 보면 이것 또한 여의치 않은 일이라 그 사정이 딱하고 참담하기만 하다.
어쨌거나 마리아님에게는 이들이 친한 이웃이기도 했지만 그 빌은 태어날 때부터 보아왔기에 더 마음이 가고 부모 못지않은 아픔을 안고 있었다. 어떻게라도 돕고 싶어 매일 일과처럼 그를 위한 묵주기도와 청원기도에 노비나를 하고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 벌써 일곱 해가 되었으니 간혹 날아오는 빌의 편지가 어찌 반갑지 않으랴.
처음에는 견디기 힘든 형무소안의 일을 편지 안에 담기도 하고 어느 때는  좌절과 분노의 감정을 토해내면서 “법이 공정한가요? 정의가 무엇인가요?”라는 절규 같은 질문에 자신의 무력함에 가슴이 저렸다.
사실 법은 진리도 아니요 정의도 아닐 것이다. 단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규범으로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일 텐데 그것을 어겼다곤 하지만 그에 대한 형벌의 수치가 너무나 벅차다는 생각에 내가 그토록 잘못을 했는가? 라는 의문도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제가 법을 어긴 건 잘 알지만 이렇게 가혹해야 합니까?” 라는 반문에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장발장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기본생존권을 박탈당한 채 어쩔 수 없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이란 긴 세월의 무거운 삶을 살았던 이야기를 잘 안다. 이에 법은 정의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장발장 한사람뿐이겠는가! 거기다 대고 ‘법은 법이다. 왜냐하면 법은 가장 이상적인 사회적 합의요, 정의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약속이기 때문에 법은 권위를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만 주장 할 수 있을까?
한 동안 답장이 없어 뜸했다가 온 편지에는 자포자기한 글로 끝내기도 했다. “삶이 무엇인가요? 남을 돕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제가 그때 모른 척 했었다면요?” 그래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고 또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는가? 그러한 모든 것들이 어디까지 단죄되어야 하고 어디까지 용서되어지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이 세상에 같은 일에 대해 같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단지 포탄이 떨어지는 전투에서처럼 누구는 총탄에 맞고 누구는 피해가듯 정말로 우리의 삶도 운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변호사의 능력에 따른 것인가 당혹스러워지기 까지 한다. 어느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법정은 진실을 가리는 곳이 아닙니다. 진실을 만드는 곳입니다.” 진정 그럴까?
마리아님은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겼다. 허나 그들은 달랐다. 처음엔 정신이 없어 허둥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냉정을 되찾고 한편으론 아들을 위한 탄원서를 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각종 사회단체에 열심히 참가하기 시작하더니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모임을 갖고 사회적 책임감을 일깨우고 다른 틴에이저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미리 막기 위해서 그들은 물론 그들의 부모들에게 돌아갈 교육프로그램에 힘을 쏟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빌이 간혹 그림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엄마를 닮아선지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연필로 그린 정교한 스케치는 훌륭했다. 그 그림의 소재가 철창에서 정물로 그리고 자연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그의 마음도 차츰 안정되어가는구나 싶었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자신을 돌보는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며 지금껏 잘 견뎌준 것이 고맙기만 했다.
빌을 생각하면서 오래전에 본 ‘1급살인’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주인공 헨리 영은 배고픈 동생을 위해 가게에서 단 5불을 훔친다. 하필이면 그 곳이 우표 파는 곳이어서 연방법에 걸려 악명 높은 알카트라즈로 간다. 온갖 불법악행이 저질러지고 빛도 들어오지 않는 오물과 벌레가 들끓는 지하 독방에 갇혀 비인간적인 모진 학대에 시달린다. 고문과 공포 속에서 정신이상이 오고 3년 만에 어둠 속에서 나온 그는 자신을 밀고했다고 여겨지는 다른 죄수를 살해함으로 1급 살인범이 된다. 변호사로 선임된 신출내기 제임스는 조사과정에서 헨리가 겪은 비인간적인 처사를 알게 되고 심한 분노를 느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냉소적이고 불신적이던 헨리도 헌신적인 제임스의 진심과 열의에 차차 얼어붙었던 마음을 열고 우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제임스와의 대화과정에서 이렇게 묻는다. “제임스 너는 돈을 훔쳐본 적이 없느냐?” 그러자 “나도 5불을 훔친 적이 있지.”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헨리가 다시 묻기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풀지 못한 숙제의 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쳐다보는 헨리에게 그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로 용서 받았지” 한다. 순간 헨리의 얼굴이 이지러지면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같은 5불로 너는 지금처럼 되었는데 왜 나는 이렇게 되었지?’
사랑과 관용이 죄의식을 덮을 수도 있고 엄한 징계가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경우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기에 이것이 옳고 저것이 더 낫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그렇다고 법이 고무줄 같을 수는 없어서 이 사정 저 사정에 따라 늘리고 줄일 수도 없다.
정녕 법규란 약속이 지켜야 할 의무가 따르고 의무는 엄중한 것이어서 그에 적법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에 예외가 없다곤 하지만 때로 우리는 큰 벽 앞에 부딪치기도 한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하고 기도가 요구되는지도 모른다.
빌이 오늘 보낸 그림엔 작은 열쇠하나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쓰여 있다. ‘내 열쇠를 갖고 내손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어요.’ 마리아님의 손은 떨렸고 뜨거운 눈물이 그림 위로 떨어졌다. 멀리서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한맥, 1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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