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편 / 풍선 속 남자

2008.12.31 10:56

김영강 조회 수:868 추천:161


  <풍선 속 남자>는 <숙제>의 수정본입니다. (2011년 9월)


  “네가 준 숙제 말이야. 내가 그 해답을 갖고 왔어.”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주미의 음성이 들떠 있었다.
  “그래? 동창회를 통해 알아봤어?”
  주미는 서울에서 열린 남편의 A 대학 동창회에 다녀왔다. 떠나기 전 날, 그녀는 이번 가는 길에 이철민의 근황을 알아보겠노라고 하면서 혜리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그때, 주미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혜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있었다.
  “강성재….”
  그는 한때, 혜리가 저린 가슴을 안고 애절하게 사랑했던 남자다. 벌써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아득한 옛 이야기가 돼버렸지만.
  “물론이지. 네가 말 안 해도 내가 알아보려고 했어.”
  “그래. 숙제야 숙제. 꼭 알아봐야 돼.”
  주미의 남편보다는 훨씬 후배들이지만 성재와 철민이도 A 대학 출신이다. 혜리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호들갑을 떨었고 주미 역시 농담처럼 호호거렸다. 죽었나, 살았나, 살았으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그 정도의 해답에서 그칠 줄 알았는데 주미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또 만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혜리 같음 어림도 없는 일인데 그녀는 용감했다. 대학 때도 혜리보다는 용감한 편이었지만 일찍 유학 와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그녀는 더 씩씩해져 있었다. 또한 매사에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
  갑자기 주미가 “남편 옆에 없지?” 하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에 골프 치러 나갔으니까 들어오려면 아직 멀었어. 맘 놓고 떠들어도 괜찮아.”
“그래도 조심해야 돼. 불쑥 들어오는 수가 있으니 말이야. 문소리에 신경 써.”
“걱정 말고 얘기나 계속해.”
호기심이 잔뜩 동해 혜리는 주미를 재촉했다.
“동창회 간부가 하는 말이 성재는 재계에서 아주 유명 인사로 통한다지 뭐냐. 너도 이름 들어봤지? 영진건설이라고. 그 회사 사장이래. 꼭 비서실을 통해야 되고, 아무나 만날 수가 없는 그런 사람이랬어.”
“영진건설이라면 굉장하지. 예전엔 태극물산에 다녔는데 옮겼네.”
“얘는,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다. 난 말야, 성재가 그리 될 줄 옛날에 미리 알았어. 아주 능력 있는 애였거든.”
“아깝다 아까워. 그랬는데 왜 안 붙잡았니?”
“그래, 네 말이 맞아. 후회가 막심하다. 붙잡아야 했었는데 말야.”
혜리는 주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깔깔거렸다.
  그때, 혜리는 성재를 간절하게 붙잡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등을 보이고 떠나는 남자, 그대로 놓아주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성재가 원하는 대로 해준 것이 혜리의 참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참사랑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큰 슬픔으로 다가왔었다. 그 슬픈 기억들이 지금은 모두 다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었지만.
“먼저 철민이랑 통화를 했어. 아주 반가워하더라. 철민이 말이 자기는 자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는데 강 사장이 많이 도와준대.”
  강 사장이라는 호칭이 혜리에게는 생소했다.
  “애가 몇이냐는 이야기에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성재 핸드폰 번호를 받았는데, 성재는 스키 타러 갔다면서 며칠 후에 온다고 그랬어.”
  “바쁘신 몸이 스키 타러 갈 시간도 있다니?”
  얘기는 점점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저, 미국서 온 사람인데요. 유혜리 아시죠? 대뜸 이렇게 말이 나와버렸어. 그랬더니,  잠깐 동안 잠잠하더라. 그런데 성재 가슴 뛰는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어.”
  “얘, 그건 아니다. 우리가 어찌 헤어졌는지를 네가 잘 알면서. 왜 그래? 도대체 유혜리가 누군가? 하고 생각을 더듬어봤겠지.”
  “아냐. 내 얘기를 들어봐. 난 만날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성재가 만나자고 했어. 숙제를 가져왔으면 그 답을 가져가야 되지 않겠냐면서 꼭 만나자고 해서 만난 거야. 철민이는 만나자고 안 했는데 성재가 만나자고 그랬다니까. 스키장에서 그 다음날로 바로 달려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좀 늦게 이철민이가 헐레벌떡 나타났고. 정말 반가워하더라. 그게 눈에 보였어. 나도 굉장히 반가웠어.”
  혜리는 그들이 어찌 변했냐는 질문부터 했다.
  “철민이는 살이 많이 쪘더라. 길에서 마주쳤다면 못 알아봤을 거야. 성재는 옛날 얼굴이 그대로 있었어. 스키 타서 그런지 얼굴이 거무스름하고 많이 말랐더라. 주름살도 많고. 철민이한테 비하니 아주 늙어 보였어.”
  “그렇게 성공을 하려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머리를 써야 했을 테니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겠니? 그래서 확 늙어버렸나 보다. 옛날에도 걘 학생 같지가 않고 아저씨 같았잖아?”

  “이철민이가 자꾸 학교엘 오겠다는데 어떡하니? 우리는 카니발에 참석 안 한다고 했는데도 그냥 학교 구경만 시켜달라는 거야. 친구 하나 데리고 올 테니 너도 같이 만나자고 해.”
  그때, 이철민이랑 같이 온 남학생이 성재였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아주 어른스러운 남학생이었다. 외모가 세련되어 학생 같지가 않고 사회인 같았다.
  ‘복학생인가?’
  대학입학 후 한창 미팅이 성행하던 그 당시, 주미의 파트너였던 이철민은 가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언젠가는 그가 학교 앞 찻집에서 기다린다고 해, 혜리도 따라나가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A 대 경영학과라면 최고의 엘리트들이고, 또 수학과와는 서로 잘 어울린다면서 다들 호기심을 가지고 참가를 했는데 무슨 인연이었는지 성재도 혜리도 그 미팅에는 참석을 못했다.
  주미와 혜리는 그들을 데리고 한창 축제에 젖어 있는 학교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었다. 대학 2학년 때였다. 그들도 즐거워했으며 혜리와 주미도 좋은 시간을 보낸 하루였다.
  한 번은 넷이 안양 포도밭에 간 적이 있었다. 해 질 무렵, 집엘 가려고 정류장에 도달하니 버스 주위에 많은 사람이 웅성웅성 모여 서 있었다. 거의 다가 그들 또래의 대학생이었다. 서울까지 서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재가 어느 틈에 이철민을 끌고 열린 창문을 통해 버스 안으로 몸을 들이밀어 그들은 편안히 앉아서 올 수가 있었다.
  나란히 앉은 성재가 혜리에게 물었다. “전화해도 되것십니꺼?” 하고.
성재는 부산이 고향으로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가 쓰는 경상도 사투리가 귀에 설지 않고 오히려 정겨웠다. 사투리로 말하는 그의 얘기가 더 재미있게 들렸다. 목소리가 부드러운 탓인지 억센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그동안 주위를 맴돌던 남학생들이 더러 있었으나, 혜리는 그때마다 차가운 겨울바람으로 싹싹 쓸어버렸는데 그는 달랐다. 그의 전화를 기다렸고. 또 약속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 만나면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헤어지기 아쉬워 집 근처를 몇 번씩이나 왔다 갔다 반복했다.
그리고 그 후, 주미와 철민은 사이가 뜸해졌지만, 혜리와 성재는 거의 4년 동안을 자타가 공인하는 애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여러 방면에 아는 것이 많았다. 문학, 음악, 미술,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시도 줄줄 외우고 유행가도 아주 멋들어지게 불렀다. 혜리 역시 그에 못지않았으나 이상하게도 성재 앞에서는 항상 움츠러드는 느낌으로 자신이 자꾸자꾸 작아졌었다.
  
자주 가는 찻집에 나란히 앉아, 그들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남자가 애절하게 릴리즈 미(Release Me)를 반복했다. 멜로디도 슬펐지만 가사는 더 슬펐다. 성재가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가수 이상으로 애절하게 노래를 불렀다.
  ‘이제 그만 나를 놔 줘. 제발 나를 떠나게 해줘…….’
  그 노래를 듣고 있는 혜리의 마음은 더 슬펐다.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한 남자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면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혜리가 붙들고 있던 인연의 끈을 슬슬 늦추더니 결국에는 그 끈을 스르르 놓아버린 성재였다. 그리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멀리멀리 사라져버렸다. 만나기로 한 날,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혜리의 심장은 머리를 비웃으며 수없이 덜컥거렸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소리의 주인공이 “여보세요.” 하기까지의 벨소리는 고통이 시작되는 신호였다. 침묵하는 수화기가 가슴 속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수화기를 수없이 귀에다 갖다대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신호음은 정확히 떨어졌다.
  너무 슬퍼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안고 혜리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이 르네상스에 앉아 즐겨 듣던 곡이 길가 스피커에서 울려퍼질 땐 그 선율에 휘말려 저린 가슴이 발끝까지 내려와 걸음을 떼놓을 수조차 없었다. 키 큰 남자의 뒷모습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충격을 느꼈다. 그가 즐겨 입던 국방색 바지자락만 보아도 눈물이 났다. 그러나 혜리는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혼자 쥐고 있던 인연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인연은 끊어졌다. 한마디 끝맺음의 말도 없이 그들의 인연은 끝나버린 것이었다. 그의 마음을 이미 다 읽었는데 끝맺음의 말이 뭐가 필요했을까마는.
  ‘침묵의 암시를 받았음이었을까?’
  그날, 혜리는 그가 준 책 한 권과 만년필을 돌려주려고 갖고 나갔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겨울밤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천릿길인 양 아득했다. 몸과 마음이 다 무너져내려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겨웠다.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침에 눈을 뜨기조차도 힘이 들었다. 아니, 눈을 뜨기가 싫었다.
  엷어져 갈 줄 알았던 추억들이 날이 갈수록 더 뚜렷하게 다가오며 혜리의 가슴을 조였다. 의욕이 완전히 상실되어 손가락 하나도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힘을 주어도 주먹이 제대로 쥐어지지 않았다. 가슴에 송송 구멍이 뚫려 전신의 힘이 다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아버지는 울산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하고 계셔 어머니는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서울에 올라오시곤 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고학으로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평생을 회사원으로 일을 하셨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해 윗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나 승진은 다른 사람보다 늦은 편이었다. 학연도 없고 인맥도 없을 뿐더러 고지식한 성격도 그 이유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혜리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울산 건축사무소 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일종의 영전이었다.
  아버지의 사는 보람은 오직 자식들의 교육에 있었다. 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일체 아르바이트를 못하게 했으며, 그 뒷바라지를 다 해주었다. 그 대신 자식들의 성적표는 전부 A 로 도배를 해야만 했다.
  두 남동생은 방과 후, 도서관으로 또 과외공부로, 공부에만 혼신을 다했다. 눈물로 시간을 죽이던 혜리가 근 한 달 동안을 호되게 앓자 동생들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어머니가 올라오셨다.
  병원엘 갔더니 병명은 몸살 감기였다. 푹 쉬면 낳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곧 내려가셨으나 혜리는 계속 시름시름 아팠다. 또 다시 올라오신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을 들랑거리다가, 하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너 아픈 이유를 알았다. 그 녀석 때문이지? 그 녀석이 너를 발길로 찼지? 내 이 녀석을 가만 두나 봐라.”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혜리는 큰 소리로 “아녜요 엄마, 그런 거 아녜요.” 하고는 강력히 부인했다.
  “내가 이 녀석을 한 번 만나야 되겠다. 전화번호 줘봐. 네가 전화번호 안 주면 내가 회사로 찾아갈 수밖에 없다.”
  혜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걔는 이제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걔 때문에 아픈 거 절대로 아녜요.”
  한없이 여리고 착한 딸이지만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어머니는 잘 안다. 어릴 적부터 자존심이 강하고 책임감도 지나치게 강해, 그런 딸이 어린아이 같지 않아 안쓰러울 때가 있었다. 딸의 고통이 고스란히 자신의 고통이 되어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그 고통이 눈물이 되어 두 뺨에 주르르 흘러내렸다.
  “알았다, 안 만날게 걱정 마.”
  어머니는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혜리를 따듯하게 돌보았다. 그녀 역시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어머니 앞에서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친구를 만난다는 거짓말을 하고 서서히 바깥출입을 시도해 보았지만 슬픔과 고통은 계속 그녀에게 머물면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러나 혜리는 제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가 왜 이러지? 늘 생각하고 있던 이별이 현실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어머니 말씀대로 죽을 것만 같은 마음의 상처도 세월이 지나면 다 아물어지는 법이다. 사랑이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간에 그것은 좋은 경험이다. 잊어버리자. 지금 내겐 몰두할 일이 필요해. 차라리 취직을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졸업 후, 취직할 생각도 않고 1년 동안이나 허송세월을 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고 부모님이 취직을 말렸기 때문이다. 막냇동생이 아직 중학생인 것도 그 중의 한 이유였다. 혜리 자신이 좀 강력하게 밀고 나갈 걸, 그냥 치일피일 아무런 목적 없이 굴러온 것이 한심했다.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이끄는 대로 명동에 있는 백화점엘 들렀다. 한사코 마다했으나 어머니의 주장은 강했다. 며칠 후에 맞선을 보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 준비를 위한 것임을 혜리는 잘 안다. 다시는 누구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고 남자라면 그 ‘ㄴ’ 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그냥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것뿐이었다. 백화점을 막 나서는 참이었다. 누가 뒤에서 혜리를 불렀다. 남자 목소리였다. 순간, 가슴이 철커덩하고 내려앉았다.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맞구나 혜리구나.”
  이 교수님이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미국 유학을 권유한 적이 있는 교수님이었다.
  “혜리는 졸업 후에 미국 유학 가서 공부를 더 했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학교 관계는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지금부터 준비를 했으면 좋겠어.”
  그때 혜리는 미국 유학이란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교수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 교수님에게도 동행이 있었다. 그의 아들이었다. 네 사람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
  “이 교수님이 한 번 학교에 들르라 그러셨잖아. 찾아가서 네 진로를 상의해 봐도 될 것 같구나. 왠지 이 교수님은 믿을 만한 분이고, 또 너를 도와줄 수 있는 분 같아.”
  첫 선이 깨지고 난 후 어머니가 한 말씀이다. 맞선이라는 것이 아직은 딸에게 용납이 안 되는 것을 이해하셨음인지 어머니의 마음에 변화가 인 듯했다. 그러나 혜리는 이 교수님을 찾아갈 용기가 없었다.
  ‘이 교수님의 말씀대로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떠나고 싶다. 정말 떠나고 싶다. 그와의 모든 기억을 한국 땅에 묻어버리고 그가 없는 먼 땅으로 떠나고 싶다.’
이 교수님 생각이 자꾸 났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이 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백화점에서 우연히 만난 일주일 후였다.
그 후, 그녀에게는 행운이 찾아들어 미국 유학의 길이 순조롭게 열렸고,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이 교수님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교수님은 혜리를 며느릿감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미국에 있던 아들이 마침 한국을 방문했고, 또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기뻐하셨다. 부모님이 강력하게 등을 떠민 것도 크게 작용을 했다.
  아내를 보석처럼 귀히 여기는 남편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생각만 해도 가슴 시렸던 성재와의 기억들은 하나 둘 지워져갔다. 더구나 두 동생에게 각별히 신경을 써주는 남편의 마음에 감동이 되어 성재의 존재는 점점 멀어져갔다. 그리고 혜리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던 성재의 방에 남편이 들어와 앉기까지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내가 슬쩍 물었지. 그 나이에 와이프도 스키 타는 거 좋아하냐고. 그랬더니 아니라면서 와이프는 운동하고는 거리가 멀단다. 친구들 스키 그룹이 있어 남자들끼리 간대. 일 스트레스를 스키로 푸는 모양이야.”
  그런데 혜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이 주미의 입에서 나왔다.
  “네 얘기를 많이 하더라. 네 생각 많이 하고 살아온 것 같아.”
  “나 듣기 좋으라고 괜히 그럴 필요 없어.”
  “아냐. 진짜야. 네 얘기를 궁금해 하길래 있는 그대로 다 말해 주었어. 결혼해서 바로 유학을 갔고, 지금은 엘에이 살고 있으며 남편은 리타이어한 후에 골프만 치고, 애는 아들 하나에 딸 하난데 둘 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고.”
  주미는 계속해서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좋은 얘기만 했지?”
  “물론이지 너야 뭐 좋은 얘기밖에 더 있냐?”
  “그래 잘 했어. 더 좀 불려서 얘기하지 그랬니?”
  “불려서? 그러고 보니 불린 거 하나 있다.”
  “뭔데?”
  “너 대학교 다닐 때 배우 이미애하고 똑같다고 다들 그랬잖아. 유명한 재벌 집에 시집간 애 있잖아.”
  이미애가 처음 영화에 나왔을 때였다. 어머니 친구들이 혜리가 영화배우가 됐냐면서 전화를 걸어왔었다. 친구들도 이구동성으로 야단이었다. 성재도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가 그랬다. 그 영화의 주연배우는 바로 유혜리였다고.
영화를 볼 때는 끝날 때까지 항상 혜리의 손을 꼭 붙들고 있던 성재다. 그녀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빼내면 어느새 그의 커다란 손이 혜리의 손을 덮치고 또 덮쳤다.
“성재가 이미애 얘길 꺼내면서, 사업상 그 남편하고 더러 만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네 생각을 한단다.”
  정말 뜻밖의 말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 지금은 옛날보다 더 예쁘다고.”
  “얘, 그건 정말 너무 불렸다! 어떻게 스무 살 적보다 지금이 더 예쁠 수 있냐?”
  “그러게 말이야. 지금도 ‘여전히 예쁘다.’ 그렇게 말했어야 했나?”
  “그것도 아냐. 60대는 이미 미의 평준화가 된 나이야. 앞으로 성재 만나기는 글렀다 글렀어. 옛날보다 더 예뻐졌다 그러더니 어디서 이런 할망구가 나타났어? 그럴 거 아냐?”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넌 지금도 아름다워.”
  주미는 좋은 얘기만 늘어놓다가 화제를 바꾸고는 노래를 부르듯 말끝을 확 올렸다.
  “참, 옛날에 네가 텔레비전에서 성재 봤다고 그랬잖아? 그 얘기도 했다.”

10여 년 일이다. 어느 날 저녁, 남편과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로 실화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는데, 남편이 열심히 보는 프로였다. 그날의 주제는 태극물산 중동지점장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능력으로 인해 대통령이 목표로 한 금액의 수출 계획이 이루어졌다는 줄거리였다.
태극물산이라는 두 글자에 매혹되어 혜리도 열심히 보았다. 연말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계획한 수출액이 그 반도 달성이 안 돼 관계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속을 태우던 차에, 태극물산 중동지점장이 군복 주문 계약을 성사시켜 기적을 일궈냈다는 것이었다. 일본과의 경쟁에서 거의 실패할 뻔 했는데 그로 인해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다. 남편은 계속 감탄을 하면서 “그 참, 똑똑한 청년이군.” 하고는 주인공을 칭찬했다. 중동지점장은 남편의 말대로 30 초반의 청년이었다.
  배우들이 연기를 한 드라마가 끝난 후, 실재 인물이 화면에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강성재였다. 텔레비전 화면에 태극물산의 부사장이라는 직책과 함께 그의 나이가 49로 적혀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저 사람 내가 대학 때 사귀던 남자예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건만 혜리는 남편을 슬쩍 건너다보며 싱긋이 웃고는 침묵을 지켰다. “실물도 잘 생겼네.” 하는 남편의 말이 귓전에서 들렸다.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키도 굉장히 크다고요.’ 하고.
  그 후, 혜리는 가끔 태극물산에 대한 얘기가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올 땐, 혹시 강성재라는 이름이 언급이 되나 하고 관심이 가기도 했다. 태극물산의 제 일인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였기에.
  그날 밤, 성재를 본 얘기를 누구한테든 하고 싶었다. 적격자는 주미였다. 서재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바이올린 선율을 흘러나오게 한 다음, 시애틀에 전화를 걸어 한참 수다를 떨었다. 담담했던 마음이 주미랑 통화를 하면서는 왜 그리도 흥분이 되는지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또 대학생인 딸 방에 살그머니 숨어들어 남편이 들을까 봐 소리를 죽여 가며 얘기를 했다.
  “근데. 엄마. 그 아저씨이랑 결혼 못한 거 후회 안 해요. 그 아저씨 지금 아주 성공했잖아요.”
  혜리는 “노우, 노우”를 연발하면서 그와 결혼하지 않고 아빠랑 결혼한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그렇죠? 아빠랑 결혼을 했으니까 나 같은 딸도 낳아 엄마가 더 행복하잖아요? 그 아저씨랑 결혼했더라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 아냐? 어휴 진짜 천만다행이네.”
  딸은 아주 흥미 있게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성재가 너한테 전해 달라면서 책을 한 권 줬어. 제목이 ‘흥망의 열쇠 찾기’라고 돼 있는데 자기네 회사 책이래. 저자는 강성재이고. 내일 바로 부칠게.”
  “급할 거 없으니 네가 읽고 부쳐도 돼.”
  “너한테 보낸 건데 네가 먼저 읽어야지. 책에 이메일 주소가 있으니 너보고 이메일 하란다.”
  ‘이메일 하라고?’
  옛날에도 그랬다. 그는 늘 혜리 앞에서 커다란 나무가 되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혜리는 그 나무의 꼭대기를 쳐다보려면 한참이나 고개 젖혀야만 했다.
  “얼굴도 예쁘지만 마음씨가 더 예뻐요.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고 푸근하게 감싸주는 애예요. 어카운턴트로 미국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그만둔 지 한 5년 되는데 지금은 취미생활하면서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있어요.”
  주미는 혜리를 한껏 추어올린 모양이다.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내 마음을 참 편하게 해주었어요. 나보다 생일이 두어 달 빨라 그랬는지 어떤 땐 누나같이 푸근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데,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는 그가 알고 보니 혜리보다 연하였다. 동급생이긴 했으나 혜리는 12월생이고 그는 그 다음 해 2월생이었다. 왜 그게 그렇게도 싫었던지…….
성재가 혜리의 생일을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더라는 주미의 말을 듣고 그녀는 좀 의아했다.
  “네 생일 12월 16일 맞지? 성재가 그랬어.”
  어느 해, 혜리 생일날이었다. 그가 아침 일찌감치 오늘 당신 생일 아니냐고 하면서 전화를 걸었었다. 당신이라는 호칭이 어쩐지 생소하고 이상하게 느껴져 지금까지도 그날, 전화 받은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성재는 혜리에게 당신이라는 호칭을 썼다. 술을 거나하게 먹고 기분이 좋을 때는 너라는 호칭을 썼다.
  “술을 먹으면 자꾸 니가 더 좋아진다, 어떡하지?”
  그 생일날 밤 경양식 집에 앉아 성재가 깊고 강열한 눈빛을 혜리를 향해 쏘면서 한 말이다. 그렇지만 생일이라고 그로부터 꽃 한 송이 받아본 적도 없고 선물을 받아본 적도 없는 혜리다. 서로의 생일을 어떻게 챙겨주었는지도 기억에 없고 그의 생일 날짜도 기억에 없다. 그런데 성재가 혜리의 생일을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는 말이 목에 탁 걸렸다. 혜리에게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안겨준 성재였기 때문이다.
  “네가 남자들한테는 얼마나 쌀쌀했니? 근데 성재는 그렇게 말하더라.”
  사실이 그랬다. 그 당시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남자들에겐 무서운 눈보라가 되어 그들을 쓸어버렸는데 그에게는 찬바람도 낼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좋아했기 때문 아니겠니? 그때는 뭐가 뭔지 확실히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정말 성재를 사랑했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어. 내가 걔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성을 사랑한다는 감정이 뭔지를 모르고 일생을 살았을 거야. 그래서 그런 감정을 알게 해준 성재한테 고맙기까지 하단다.”
  “얘 좀 봐, 그럼 네 남편은? 네가 그랬잖아. 결혼을 한 후에야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고.”
  “그렇지. 그렇지만 두 남자한테서 느낀 사랑이 동질감은 아니야. 남편한테서 느낀 건 푸근한 사랑이고, 성재한테서 느낀 건 애달픈 사랑이었다고 할까? 어쨌든, 젊은 시절에 한 남자를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고 또 내게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옛날엔 울기도 참 많이 울었지만. 성재랑 헤어진 후 내가 한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정말 걔가 날 좋아는 한 걸까?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어 더 괴로웠어.”
  “왜 너는 자신을 자꾸 비하시키니? 스키장에서 다 취소하고 그 다음날로 달려온 거 봐라. 예전에도 네가 그런 소리했으나 이번에 만나보니까 절대 그런 건 아니었어.”
  “그래? 언제 한 번 만나면 물어보고 싶어. 나를 사랑하기는 한 거냐고? 근데 말이야. 성재 생각을 하면 왜 헤어지고 난 후의 그 아팠던 기억들만 생생한지 모르겠어. 아름다운 추억도 많은데 말야.”
  말을 하다 보니 갑자기 슬픔이 솟구쳐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혜리는 깜짝 놀라 울음을 삼켰다. 주미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때 내가 한국에 있어서 성재를 찾아갔더라면 혹시 너희 둘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고통 속에서 몸까지 아파 맥을 못 추면서도 성재한테 알리지 않은 혜리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주미는, 그건 자존심이 아닌 바보짓이라고 했다.
  “아냐. 네가 멀리 있었던 게 차라리 나았어. 네가 성재한테 내 마음을 전했더라면 나만 더 비참해졌을 거야. 그리고 걔도 내가 더 지겨워졌을지도 모르고.”
  “왜 너는 자꾸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니?”
  “지나고 보니 나쁜 쪽이 아닌 좋은 쪽이 됐잖아. 살아가면서 내가 뭘 생각했는지 알아? 남편이 나한테 잘해주는 것보다도 내 동생들에게 잘해주는 것이 더 고마웠단다.”
“진짜 그러네. 남편이 동생들 뒷바라지 다 해줬다면서?”
두 동생이 미국 유학 와서 박사 학위를 받고, 또 한국의 대학 강단에 서게 되기까지는 시아버님과 남편의 도움이 컸다. 물론 동생들의 두뇌와 실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들을 이끌어준 건 남편이었다. 장학금을 받긴 했으나 경제적으로도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주미가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만일에 말이다, 네가 성재랑 결혼을 했다면 어땠을까? 걔도 너희 친정을 그렇게 도와주었을까?”
“글쎄다. 내 생각은… 아니야.”
‘아니야.’라는 단어에 힘이 주어졌다. 성재와 결혼을 했더라면 친정 때문에 바짝바짝 가슴을 조이며 살았을 것 같다. 대답을 하고 보니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소릴 하고 있는 자신이 가소로웠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친정이 성재가 돌아선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을 혜리는 잘 알고 있다.  
“얘, 주미야. 그런데 우리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니? 하여튼 이래저래 생각을 해봐도 성재랑 헤어진 건 너무 잘된 일이니 나를 버려준 것을 감사해야 되지 않겠니? 결혼을 했더라면 아마 내가 평생을 눈물로 지새웠을지도 몰라. 내가 너한테 말한 적 있지. 사귈 때 한눈 판 거 말야.”
    
  유혜리가 주인공인 60분짜리 단막극에 단 4분간 얼굴을 내민 등장인물에 불과한 성재였지만, 그의 비중은 막중했다. 한데, 그 4분 사이에 잠깐 무대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여자가 하나 있었다.
  S 대에 다니는 사촌 동생이 열을 잔뜩 내면서 자기 친구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고 또 대학도 같은 과에 들어오게 되어 사촌 동생하고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
  “언니, 너무 이상하지 않아? 한 남자한테 죽자 사자 한 지가 몇 달도 채 안 됐는데, 금세 또 다른 남자한테 홀딱 반해서 야단이니 말야.”
  친구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어느 남학생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영화배우같이 잘생긴 남자란다.
  “석양을 어깨너머로 받고 도서관 앞에 서 있었는데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대. 그래서 지가 먼저 꼬리를 쳐서 사귀었는데, 사귀어보니까 영 틀렸더래.”
  “뭐가 어떻게 틀렸는데?”
  “영화도 삼류 극장만 가고, 밥을 먹어도 너저분한 대중식당만 가고, 머리에 든 것도 없더래나? 대화가 계속 이어지지를 않아 만나도 재미가 없대. 그런데 이번에 만난 남자는 기가 막히게 아는 것도 많고, 다 멋있대.”
  사촌 동생은 친구가 그 남자 만난 얘기를 늘어놓았다.
  “A 대학에 다니는 천척 언니가 남자 하나 소개시켜 준다고 해서 덕수궁엘 갔었는데, 장본인보다는 같이 나온 남자한테 첫눈에 반했다잖아. 근데 그 친척 언니가 그 남자 되게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희야가 가로채버렸나 봐.”
  희야라…. 이름이 매력적이다.
  “얼마 전에 우리 학교에 온 걸 나도 봤어. 키가 굉장히 크고 잘생겼더라고.”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깜짝깜짝 놀랄 줄거리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 남자가 바로 성재였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이번 일요일은 못 만난다면서 친구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해 주려고 덕수궁엘 간다고 했다. 혜리도 잘 아는 성재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같은 과에 다니는 홍일점 여자애가 S 대에 다니는 친척 동생을 데리고 나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 홍일점이 성재를 좋아하고 있는 것은 혜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주 되게 좋아한다고? 거기다가 또 천척 동생이라는 S 대 여학생까지?’
  “넷이서 너무 재미있었다나 봐.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혜리는 사촌 동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뒷말을 미리 해버렸다.
  “그랬는데 사진기 뚜껑 잃어버렸다지?”
  사촌 동생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단박에 눈치를 챘다. 혜리가 A 대에 다니는 키 큰 남학생과 사귄다는 사실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럴 수가? 미안해 언니.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봐.”
  “괜찮아. 걔한테서 얘기 다 들었어. 근데 학교까지 찾아가고 둘이서 만나는 거는 몰랐어. 걔 머리 스포츠형으로 짧게 잘랐지?”
  행여나 하고 다시 한 번 더 확인을 하는 혜리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너, 희야한테 절대로 내 얘기하지 말고 모르는 척하고 하고 있어.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다가 내가 먼저 차버릴 거야.”
  희야란 이름도 그 뒷말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튀어나왔다.
  ‘이제는 다 끝났구나.’
  참으로 힘든 나날들이었다. 성재가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혜리는 그를 기다렸다. “내가 먼저 차버릴 거야.”라는 말을 해놓고도 그 말을 실현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어떤 여자애 하나가 내한테 목을 매고 달라드는데, 나 좀 붙잡아 줘라.”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그녀를 무시하는 태도이다. 그 뒷말은 더 심했다.
  “내 애를 갖고 싶댔는데, 내는 안 했다.”
  ‘뭘 안 했는데?’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으나 순간, 혜리는 극도의 수치심을 느꼈다. 그 말에 대한 언급조차 하기 싫었다. 차라리 듣지 않은 걸로 싹둑 잘라내 버리고 싶은 말이었다.
“여자들한테 그렇게 인기이니 얼마나 좋을까? 괜찮아요. 안 붙잡을 테니 얼마든지 가라고요. 나는 개의치 않으니까.”
  한데, 얼마나 지났을 까?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가 혜리에게 바짝 다가왔다. 거의 매일 전화를 걸었고 집 근처 다방에 와서 기다렸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은 게 분명했다.
  ‘양다리 걸치고 왔다 갔다 하다가 이제야 정신이 든 모양이지?’
  그 일이 있은 후 그들은 부쩍 가까워졌다. 그해에 있은 학교 카니발에는 혜리가 참여를 했고 성재가 파트너가 되어 아주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혜리가 초청한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성재는 미리부터 “그날 옷은 뭘 입지?” 하고 싱글싱글 웃으며 ‘네 파트너는 마땅히 나다.’ 라는 식으로 못을 박았다. 파트너를 어떻게 구하느냐고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는 친구들에게 혜리가 말했다.      
  “단체로 구하면 나도 좀 끼어줘라.”
  반동의 메아리에 불과한 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성재는 혜리의 마음에 더 크게 자리를 잡아갔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콧방귀를 뀌면서 그녀를 놀렸다.
  “유혜리 너, 맘 변했어? 너, 애인 버리면 내가 가진다.”
  그날, 교수님께서 성재를 보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잊히지 않고 기억에 남아 있다.
  “오늘의 킹은 혜리 파트너다.”
  
그해 여름방학 때, 성재는 부산에 있는 그의 집엘 혜리를 데리고 갔다. 혜리는 이모 집에 간다는 핑계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었다. 그의 집은 고풍이 배어 있는 커다란 한옥으로 넓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운치가 있는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정원은커녕 손바닥만 한 마당에 아주 오래되어 형편없이 낡아버린 혜리의 집이 그녀의 가슴에서 무너져내렸다.
  ‘성재가 집엘 두어 번쯤 왔었던가?’
  철저하게 봉건적인 가정에서 엄하게 자란 혜리는 꼬치꼬치 묻는 어머니에게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닌 친구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늦게 들어오는 날은 늘 도서관에서 공부했다는 핑계를 댔다. 사실 도서관에서 그와 같이 공부를 한 날도 없지는 않았다.
  그날 밤, 혜리는 이모 집 근처 찻집에 앉아 희야 사건을 알고 있었노라고 고백을 했다. 성재는 깜짝 놀랐다.
  “무섭다 무서워. 어떻게 그러고도 내색을 안 하고 시치미를 뚝 따고 있었지?”
  그는 미안하다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얘기를 시작했다.
  “하루는, 느닷없이 애인이 있냐고 묻더군. 그래서 있다고 대답을 했더니 막 울면서 애인이 있으면서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따지더니 뛰쳐나갔어. 그 후에 잘못했다고 다시 만나자고 계속 전화가 왔지만 안 만났어. 집에까지 찾아오고 지난번에 학교에서 여행 갈 때는 우찌 알았는지 서울역까지 나와서 자꾸 울잖아. 창피해서 혼났네.”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그의 말이 가슴에 걸렸다. 그러나 혜리는 한마디의 의문도 제시하지 않았다. 당신의 애를 갖고 싶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여자한테 무슨 짓을 못하랴.
  혜리는 또다시 무시를 당했다는 느낌이 전신을 엄습했다. 참으로 적극적이고 용감한 여자다. 찾아가기는커녕 전화를 건 적도 거의 없는 그녀다. 그가 하숙을 하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갑자기 하숙방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성재가 혜리를 하숙집에 서너 번 쯤 데리고 갔었다. 그리고 많이 아프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혜리가 찾아간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날,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는 방을 혜리가 치워주었다. 성재는 날계란을 먹고 껍질을 책상 밑에 수북이 쌓아놓았었다.
  그 후, 성재와 가까이 지내면서도 가끔은 희야라는 여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언니, 요새 우리 친구들의 화제가 온통 언니랑 희야 얘기야. 남자 하나에 여자 둘, 꼭 무슨 신파연극 같잖아? 그런데 애들이 희야는 불이고 언니는 얼음이래. 결국은 얼음이 불한테 이겼다고 야단들이야.”
  사촌 동생은 얼음이 이긴 것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지만 혜리의 기분은 씁쓸했다. 혜리는 희야 사진도 봤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서였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까만 테 안경을 낀 탓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강한 인상을 풍겼다. 표정도 심각했다.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혜리가 성재와 더불어 추억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버려진 그녀는 슬픈 가슴을 안고 어느 암자로 들어가 여름방학을 보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때, 왠지 모르게 그녀의 슬픈 가슴에 감전이 된 것 같아 혜리도 슬펐다.

  남편이 편지들과 함께 책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무슨 책이야?”
  “아, 왔구나. 주미가 보낸 거야. 서울 가서 산 소설책.”
  혜리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고는 책을 받았다. 그리고 서재로 들어왔다. 포장을 벗기니 봉하지 않은 누런 회사 봉투가 나왔고 책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예술적으로 들쑥날쑥 씌어진 ‘흥망의 열쇠 찾기’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로 된 표지도 산뜻했다. 그리고 강성재라는 저자 이름이 책 아래쪽에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겉장을 넘기니 먼저 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바로 아래에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었다. 혜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나보고 이메일 하라고?’
  그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40년이라는 세월이 쌓이고 쌓인 얼굴이지만 옛날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첫 장에 ‘유혜리 씨께’ 하고 그녀의 이름이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저자 드림’이라고 역시 한문으로 쓰고는 그 다음 줄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글씨체가 아주 달필이었다. ‘유혜리’라는 이름 석 자가 아주 드문 한자인데도 정확하게 표기가 되어 있었다. 좀 놀라웠다. 그리고 약력이 화려해 또 놀랐다. 최우수 CEO 상을 비롯해서 기업혁신대상에다 대통령이 주는 상을 포함해서 산업훈장까지 받았고, 그가 졸업한 K 고등학교와 A 대학에서 주는 모교를 빛낸 동창상도 받았었다.
  책을 들춰 몇 장을 읽어보니 그녀에게는 하나도 흥미가 없는 내용이었다. 경영에 관한 전문 서적이었다. 그를 만나지 못하고 바람을 맞은 그 마지막 날, 그에게 돌려주려고 갖고 나간 책도 경영에 관한 책이었다. 어느 날, 그가 읽어보라면서 책 한 권을 주었는데 그것이 시집이나 소설책이 아닌 경영에 관한 전문 서적이어서 좀 의아했었다. 선물이라고는 주고받은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 그 책 한 권만은 혜리의 머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책이 언제 어떻게 없어져 버렸는지는 기억에 없다.  
  성재는 대학 때부터 전문 서적을 읽어가며, 그의 꿈을 키웠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혜리는 꿈이 없었다. 그냥 세월이 흐르는 대로 살았다. 꿈은커녕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었다. 생활 태도도 고지식하고 여리기만 했다. 이러한 점이 성재가 그녀를 떠난 이유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는 야망의 그릇이 큰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그릇을 채우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재목이 못 되었다.
책장을 뭉텅이로 넘기면서 훌쩍 건너뛰었다. 중간쯤에 가서 몇 장을 넘기니 그의 명함이 책갈피에 끼어 있었다. 명함에는 홈페이지 주소가 있었다.
  책을 밀쳐놓고 얼른 컴퓨터를 켰다. 화면에 강성재 홈페이지가 단번에 나타났다. 그는 입을 꽉 다물고 싱긋이 웃으며 혜리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의 표정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피부가 많이 늘어진 인상이었다.
  그가 두 손가락으로 혜리 뺨을 살짝 꼬집듯이 쥐고는 “살이 왜 이렇게 딱딱해?” 하면서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을 우악스럽게 끌어다가 자기 뺨에다 갖다 댔다.
  “이거 봐. 내 살은 아주 말랑말랑 하잖아.”
  그때도 그의 피부는 늘어져 있었고 살갗은 겉돌았다.
  제일 먼저 ‘나의 가족’ 카테고리를 클릭했다. 처와 딸 하나에 아들이 둘, 딸과 큰아들은 결혼을 해 사위 며느리가 있었다. 맏이인 딸아이의 출생 연도를 보니, 결혼은 혜리보다 3년 정도 늦게 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야, 결혼 후, 아이를 바로 갖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글자 하나하나에 가족에 대한 애정과 정성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은근히 아이들 자랑이 내포되어 있어 낯이 좀 간지러웠다. 아내에 관해서는 나의 단짝이라는 명칭과 함께 그가 사랑을 담뿍 쏟아붓고 있는 사실이 단번에 느껴지게끔 쾅하고 못을 박아놓았었다.
‘나한테 와이프 자랑, 애들 자랑을 할 심보는 아니었을 텐데….’
‘추억의 앨범’을 클릭했다. 주로 회사 관계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혜리는 가족사진이 있나 하고 재빠르게 마우스를 놀렸다. 아이들 사진은 없고 아내랑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아내라고 설명은 하지 않았으나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라는 제목 아래 크리스마스 파티 때 같이 노래를 부르는 사진이니, 아내임에 틀림없었다.
  그랬다. 성재는 노래를 참 잘 불렀다.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나 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 그때 한참 유행하던 ‘바닷가에서’라는 제목이 붙은 그 노래를 가수보다도 훨씬 더 잘 불렀다. 성재는 혜리의 손을 꼭 붙들고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면서 ‘바닷가에서’를 불렀다.
  이제는 그 노랫말 그대로 ‘나 홀로 추억을 더듬고 있는’ 혜리, 그녀는 추억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대 내 곁을 떠나 멀리 있다 하여도….’
  대학 때, 부산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적의 일이다. 혜리는 광복동의 화려한 밤풍경에 매료되었고, 자갈치 시장에서 펄펄 뛰는 물고기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왁자지껄하게 들려오는 시장 바닥의 부산 사투리가 생동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태종대에서 보낸 하루가 가장 선명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으로 된 해식절벽, 거기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그 놀라운 조화에 혜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든 추억들이 지금은 다 아름다움으로 승화가 됐는데도, 목구멍으로부터 울컥 슬픔이 치솟았다.
  혜리는 마우스를 움직여 사진을 확대했다. 연도를 보니 그가 40대에 찍은 사진이었다. 그의 아내는 눈도, 코도, 입도 다 큼지막한 선이 굵은 여자였다. 예쁘다기보다는 개성이 뚜렷한 잘생긴 얼굴이었다. 혜리와는 완전히 다른 인상의 여자였다. 올린 머리에 옷은 드레스가 아닌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키가 굉장히 컸다. 성재의 큰 키 때문에 항상 최고로 높은 하이힐을 고르면서 발이 편한가를 시험하느라 구둣방 안을 한참이나 왔다 갔다 하던 옛날 생각이 났다. 그의 아내는 그런 신경은 안 쓰고 살았을 것 같다.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뜻밖의 현실이 혜리의 머리를 쳤다. ‘내가 키가 크지 않아 딱지를 맞았나?’ 하고.
  사진의 뒷배경은 색색의 풍선들이 아치형으로 조립이 되어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양 등, 온갖 색깔들이 어우러졌는데, 예쁘지가 않고 너무 혼잡스러웠다. 초록색 저고리와 짙은 남색 치마를 입은 그의 아내까지도 눈을 어지럽혔다. 차라리 풍선을 온통 하얀 색으로 통일시켰더라면 훨씬 더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져버렸던 풍선 하나가 날아왔다. 성재가 파트너가 되어 메이데이 축제에 참여했을 때였다. 혜리는 풍선 불기 게임에서 1등을 했다. 딱 한 번의 기회로 누가 가장 풍선을 크게 부풀리나 하는 시합이었다. 성재는 물론, 다들 너무 크게 불다가 팡팡 터뜨려버렸으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불고 또 불고했다. 그것은 혜리의 가슴속에서 터질 듯이 부푼 성재를 향한 사랑의 열매였다.
  가끔 혜리는 ‘그의 아내는 어떤 여자일까?’ 하고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아마 모든 것을 다 갖춘 좋은 집안의 딸이리라. 그래야 그와 어울릴 것이니까. 한데 이상하게도 혜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의 와이프 되는 여자는 뒤에서 홀로 눈물을 흘릴 일이 많을 것이라고.

  그를 텔레비전에서 본 후, 서울에 갔을 때였다. 동창들을 만난 자리에서 혜리는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그 당시 혜리와 성재와의 관계는 같은 과 친구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졸업하기 얼마 전에 수학과 연극 공연이 있었다. 그 연극에 혜리가 주인공으로 뽑혔었다. 주인공이라는 큰 배역에 도저히 자신이 없어 극구 사양을 했으나, 학생들과 교수진은 간호사인 주인공의 모든 이미지가 혜리와 딱 들어맞는다면서 만장일치로 그녀를 뽑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으나 시작하고 나니 해볼 만 했다. 연극은 대성공을 거두어 국립극장에서 일반인들에게도 공연을 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성재는 연습 때마다 거의 매일을 학교로 와서 그녀의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공연 때에는 더 열성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렇게 담담할 수가 없었어. 하여튼 능력 있는 애야. 마흔 아홉에 대기업의 부사장이라니.”  
한 친구가 뒷말을 이었다.
  “물론 능력도 능력이지만 줄을 잘 탔을 거야. 와이프가 아마 회사 높은 사람 딸일지도 몰라. 장인 되는 사람이 성재를 사윗감으로 찍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계나 재계의 유명 인사일 수도 있고. 강성재 능력이나 인물이 사윗감으로 어른들이 탐낼 만 하잖아? 내 생각엔 강성재가 여자가 생겨서 너를 떠난 것 같아. 저울질을 해보니까 그쪽이 훨씬 무게가 더 나갔었겠지. 내 짐작이 틀림없이 맞을 거야.”
  빈정대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친구들은 “그래그래 틀림없어.” 하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랬다. 군대 관계로 인해 그는 혜리보다 1년 늦게 대학을 졸업했었다. 멀쩡한 그가 병약한 환자로 둔갑을 하여 남들은 3년을 채워야 하는 군복무 기간을 1년 만에 끝내고 복학을 했고, 졸업 전에 이미 태극물산 등 여러 회사에 취직이 되었었다. 그러고 보니 회사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혜리에게서 등을 돌렸었다. 혜리는 그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것만 알았지 딴 여자가 생겨서이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 그 결정적인 말을 던질 때가 바로 그때였었나? 이제 당신도 결혼을 해야 할 텐데…. 하고.’
  “고지식하긴. 세상 일이 네 생각처럼 국정교과서같이 돌아가면 왜 법이 필요하겠니? 그리고 강성재가 그렇게 비겁하게 슬슬 도망을 치면, 헤어지더라도 네가 붙잡아서 결말을 지었어야 했다고. 4년 동안이나 공식적인 애인 사이였는데, 그게 뭐니? 흐지부지. 나는 너희들 꼭 결혼할 줄 알았어. 아무튼 간에 그 녀석은 비겁하고 나쁜 놈이야.”
  한 친구가 마치 자기가 실연을 당하기나 한 듯이 과격한 목소리로 성재를 비난했다. 순간, 혜리의 가슴에 충격이 일었다.
  “내가 싫어져 도망을 치는데 붙잡아서 무슨 결말을 짓니? 이미 결말은 다 났는데. 붙잡아서 성재 입으로 또다시 확인을 받을 필요가 뭐 있니? 나만 자꾸 비참해지는데.”
  “그건 혜리 말이 맞아.”
  다행히 한 친구가 반론을 펼쳤다.
  “어쨌든, 강성재가 배신을 한 덕택에 혜리가 이 교수님 아들하고 결혼을 했고, 또 미국 유학까지 가게 됐으니 도리어 그 녀석한테 감사해야 되지 않겠어? 싫다는데 내가 좋아서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이지 상대방을 위한 사랑은 아니잖니? 요즘 방송극들 말이야. 남자는 싫다는데 여자가 오빠, 오빠 하면서 따라다니는 거,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 남자한테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도 그냥 갈라놓으려고 별 수단을 다 쓰는 거, 그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괴롭히는 거라고. 혜리가 눈물을 머금고 성재가 원하는 대로 해준 거, 그게 바로 진짜 사랑이야.”
  “아이구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보낸다아····. 무슨 신파연극 같구나. 사랑하면 자기가 가져야지 왜 남을 주니?”
  과격파 친구가 농담 삼아 떠벌였다. 대화는 어느 새 친구들의 연애담으로 넘어갔다.
  “있잖아. 연애할 때 여자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한 가지 법칙이 있어. 뭔지 말아? 적당히 튕기는 거야. 줄을 잡아당겼다가 또 스르르 놓았다가 하면서 상대방의 애를 좀 태워야 한다고. 혜리가 그 법칙을 알았더라면 강성재가 안 떠났을지도 몰라. 보아하니 완전 거꾸로 됐네. 강성재가 줄을 쥐고 혜리 속을 태웠으니 말야.”
  “얘 좀 봐. 너랑 혜리랑 같니? 그딴 소리는 계산 따지는 너한테나 어울리지 순백한 혜리는 법칙을 알았대도 못하지 못 해.”
  “순백? 그런 단어가 사전에 있어?”
  친구들의 얘기 속에 혜리가 끼어들었다.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데 어떻게 튕기니?”
  “그래그래. 그 말이 맞아. 진짜 사랑해 봐. 몸도 못 튕긴다고.”
  “몸을 못 튕겨?”
  어느 새 화제는 육체적인 사랑으로 넘어갔다.
  “결혼 전에는 절대로 같이 자면 안 된다는 거, 우리 때는 다 그랬잖니?”
  “다 그랬긴 뭐 그랬니? 너나 그랬지.”
  “아냐 나도 그랬어.”
  “너희들은 좋겠다. 나는 연애도 한 번 못해봤으니 억울하다. 억울해.”
  친구들은 끝까지 몸을 도사렸던 옛날 일들이 도리어 바보스럽게 생각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치는가 하면, ‘아니다 그건 잘한 짓이다, 그게 뭐 잘한 짓이냐. 사랑하면 자연히 육체관계가 따라야 한다고. 정말 사랑하는데 어떻게 몸을 도사려?’ 등등 다들 의견을 달리 했다. 친구들 얘기에 장단을 맞추면서 혜리는 언젠가 성재가 한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늦은 밤, 그들은 생맥주집에 마주앉아 있었다. 그는 계속 술을 마셔댔다. 술은 입에도 못 대는 혜리였지만 그날은 주는 대로 받아마셨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혜리를 바라보며 그가 맥없이 말했다.
  “당신, 처녀야?”
  너무나 뜻밖의 질문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었다. 그의 입에서 바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엄밀히 따지면 아니다.”
  성재의 얼굴이 슬픔에 젖었다. 그의 팔에 매달려 거리로 나오니 가지각색의 네온사인 간판들이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갑자기, 네온의 불빛들이 울긋불긋한 풍선이 되어 하늘 높이 훨훨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것들은 혜리로부터 서서히 멀어졌다. 발자국을 뗄 때마다 땅이 고무로 된 것처럼 쑥쑥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성재의 팔에 매달렸던 그녀가 그에게로 완전히 몸을 실었다.
  ‘뭐, 내가 처녀냐고? 그건 나보다 자기가 더 잘 알면서 왜 그걸 나한테 물어요?’
  이렇게 쏘아붙일 걸, 왜 암말도 못하고 침묵을 지켰는지 자신이 너무나 바보스러웠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런 말도 했었다. 역시 생맥주집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한 후였다.
  “집에서 반대하면 나는 집을 나올 각오가 돼 있다. 당신도 그럴 수 있나?”

다시 강성재를 도마 위에 올렸다. 과격파 친구가 이번에 나온 김에 성재를 한 번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담담한 마음인데 못 만날 거 뭐 있니? 혼자 만나기 멋쩍으면 내가 같이 가 줄게.”
  그러나 한 친구가 극구 말렸다.
  “네 자존심에 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어. 절대로 만나지 마.”
  “그래 맞아. 절대로 만나지 마.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모른 체해버려.”
  “얘, 모른 체할 것까지 뭐 있니? 우연히 마주친 옛 연인 둘이서 찻집에 마주앉아 옛날이야기 하는 걸 한 번 상상해 봐. 얼마나 아름답니?”
  “그렇지만 지금은 아냐. 그건 더 늙은 다음에 둘 다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다음 얘기야.”
  “폭삭 늙어서 만남 뭐하니? 서로 얼굴도 몰라볼 텐데. 그래도 옛날 얼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만나야지. 어쨌든. 그렇게 흐지부지 헤어졌으니, 내 생각엔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만나야 될 것 같다.”
  “만나기는 뭐 하러? 다 필요 없어. 만날 필요 없다니까.”
  만나도 된다, 안 된다, 라는 친구들의 엇갈린 화제를 풀어가며 혜리는 재미있는 한나절을 보냈다.
  그녀 역시 그를 한 번쯤은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물론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이었다. 사실, 딱 한 번 그런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너무 일렀다.
  미국 온 지 1년 후에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었다. 시댁에 기거하면서 참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엘 나왔다가 친구들을 만나고 집엘 들어가는 길이었다. 광화문 근처였던 것 같다. 차를 타려고 주차장엘 막 들어서는데, 그가 입구에 서서 한 남자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눈이 딱 마주쳤다. 혜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까딱하면서 “안녕하세요?”라는 짧은 한마디를 빠르게 던지고는 그 앞을 홱 지났다. 그리고 그에게 등을 보이며 차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초겨울이었는데 혜리가 입은 까만 바바리코트 자락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한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그가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르마 하나가 사람의 인상을 그렇게도 다르게 바꾸어 놓을 수가 있었을까?’
  예전의 그가 아닌 낯선 남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의 아내 얼굴을 더 크게 확대해서 보고 또 보았다. 한참 보니 시들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니 그의 부모님 사진이 나왔다. 아버님은 20여 년 전에 돌아가신 걸로 되어 있었다. 어머님의 얼굴이 수심에 잠겨 있었다. 여동생의 결혼식 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도 어머니의 표정은 심각했다.
부산 그의 집에 갔을 적이었다. 나무가 잘 손질이 되어있는 초록의 정원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니 그의 어머니가 대청마루에 서서 혜리를 맞이했다. 혜리를 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혜리가 마음에 안 들었다 하더라도 바깥으로 티를 내는 그런 분은 아니었을 텐데, 항상 그늘이 서려 있는 표정이 굳어버렸을 수도 있다.
  언젠가 그가 혜리에게 말했다. 어머니에게 심장병이 있다는 것과 아버지한테 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주 젊은 여자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겨우 기어다니는 아이까지 있다면서 그 아이 치다꺼리는 앞으로 다 자기 책임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주거지는 물론 그 젊은 여자의 집이었다. 혜리는 그때, 그의 표정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는 애잔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긴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그가 지극히 효자라는 것을 단박에 느꼈고 그의 아픈 가슴이 혜리에게로 전해와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계속해서 많이 편찮으셨는가?’
  성재 어머니가 지금 거동을 못하고 누워 계신다는 주미의 말이 귓전에서 사라지지가 않는다. 이런저런 사진들을 계속 클릭하다가 미디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경영에 관해 강의를 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완전히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귀에 익은 그의 음성이 서재에 울려퍼졌다. 굵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여전했다. 사투리가 거의 완전히 가셔 있었다. 행여나 남편이 들을 새라 얼른 볼륨을 낮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빠끔히 거실을 내다보다가 서재 문을 살며시 닫았다. 그런데 갑자기 성재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져버렸다. 요리조리 마우스를 옮겨보아도 그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편이 어느새 바깥에 나와 차를 닦고 있었다. 서재 창 너머로 보이는 물줄기가 아주 시원했다.
  ‘미안해요.’
  혜리는 남편에게 고요히 한마디를 던지고는 컴퓨터를 껐다.

바로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주미였다. 집이라고 하니 그녀는 먼저 남편의 소재를 확인했다.
  “괜찮아. 지금 바깥에서 차 닦고 있어. 내가 창 너머로 보고 있으니까 마음 놔.”
  “그래? 타이밍이 잘 맞았네.”
  잠깐 말을 끊었다가 주미는 무슨 일이나 난 듯이 심각하게 물었다.
  “얘, 너 메시지 목소리가 평상시하고 다르더라. 책 잘 받았다는 짤막한 한 마디였는데도 뭔가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어. 혹시 너, 옛날 감정이 살아나서 갈등 겪고 있는 거 아니니?”
  “글쎄, 갈등을 겪는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옛날 생각이 자꾸 나는 건 사실이야.”
  “그렇구나. 추억을 더듬고 계시는구나.”
  주미는 농담을 하는 것처럼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혜리를 놀렸다.
  혜리는 주미에게 “그렇지만 별다른 감정이 있는 건 아냐.” 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짐하면서 창 너머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책은 하나도 재미가 없어 덮어버렸어. 책보다 홈페이지가 훨씬 더 재밌어. 지금 성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한참을 돌아다녔어.”
  “홈페이지도 있어?”
  “나 보라고 책갈피에 명함까지 넣었더라.”
  “아냐, 명함은 내가 넣었어. 나한테 줄 때는 네 손에 들어가리라고 예상은 했을 거야. 명함에 홈페이지 있는 거를 몰랐네.”
  “회사 홈페이지도 있고 개인 홈페이지도 있어. 하여튼 어마어마하게 성공은 했더라. 와이프 사진도 있으니 한 번 들어가 봐. 근데 말이야, 내가 찬 게 아니고 지가 차놓고선 자기가 성공한 거를 왜 나한테 까발리지?”
  “또, 또, 복잡하게 파고드네. 네가 숙제를 줬다고 하니까 그 답으로 책 한 권을 준 거라고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그래 맞다. 머리 굴리면 괜히 나만 골치 아파.”
  홈페이지 주소를 받아 적은 주미가 말했다.
  “너, 이메일 할 거지?”
  “싫어 안 해.”
  “정말 안 할 거야?”
  “그래 안 할 거야. 하고 싶지 않아.”
  ‘책갈피에 쪽지 한 장 안 넣어놓고 뭐? 나보고 먼저 이메일을 하라고?’
  책을 처음 받았을 때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책을 밀쳐놓고서야 그 생각이 들어 혜리는 책장을 주르르 넘겨봤었다. 그리고 책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면서 흔들어도 봤다. 그러나 쪽지는 없었다.
  “너 이상하다. 지금은 별 감정 없다며?”
  “그래 없어.”
  “정말 그래? 배는 안 아프고?”
  “진짜야, 배 하나도 안 아파.”
  “그런데 왜 못해? 네가 가만있으면 내가 소식을 떼먹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아냐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
주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혜리를 불렀다. 불러놓고는 뜸을 들였다.
“무슨 얘긴데 그래?”
주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만났을 때 말야. 헤어지고 난 다음의 괴로웠던 네 심정을 다 얘기해 줄 걸 그랬나?”
  “글쎄 그래도 괜찮을 뻔했다.”
  “그럼 내가 이메일 할까?”
  주미의 목소리가 톡 튀었다. 혜리는 깜짝 놀라 펄쩍 뛰면서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강력하게 못을 박았다. 갑자기 자신이 유치해졌다. 성재 때문에 왜 지금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가 한심했다.
  “책은 찬찬히 다시 읽을 거야.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쓴 책인데 읽다보면 흥미로울 수도 있어.”
  책을 다시 펴들고 맨 처음에 있는 추천사부터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어느 신문사 사장이 쓴 글이었다. 그는 강성재의 지도력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회사의 노조 문제를 해결하는 등, 직원들을 통솔하고 설득하는 능력이 탁월하며 무엇보다도 그가 경영의 귀재임을 강조했다. 영진그룹 회장의 “살려 주시오.”라는 한마디에 태극물산의 사장 자리를 내던지고 나온 용기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가 그렇게 유명했나?’
  남편이 불쑥 들어와 “무슨 책이야?” 하고 물을까 봐 그녀는 바깥에 있는 남편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그 후, 5년이 채 되기 전에 강성재는 영진건설을 완전히 흑자로 돌려놓았고 대통령이 수여하는 기업혁신 최우수 CEO 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은 것이었다.
  추천사를 읽을 때는 내용이 어떤가 하고 좀 끌리기도 했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도대체 모를 말만 쓰여 있어 읽혀지지가 않았다. 애정을 가지고 찬찬히 잘 읽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흥망의 열쇠 찾기’는 아주 지루했다. 도표까지 군데군데 그려져 있는 딱딱하고 건조한 설명문이라 도저히 읽혀지지가 않았다. 경영이나 사업에 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혜리인지라 읽어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미한테는 꼭 부쳐줘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주미 남편이 사업을 하고 있으니 경영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대충 줄거리는 그가 태극물산 재임 시, 위기에 처한 영진건설에 스카우트되어 적자로 허덕이던 회사를 어떻게 살려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과연 우리가 해낸 것은 무엇일까? 300억 원의 적자에서 100억 원의 흑자로 돌아선 것? 워크아웃에서 모범적으로 졸업을 한 것? 그것 모두가 중요한 성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과거와 전혀 다른 영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 영진은 언제나 변화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영진이 해낸 것이 아닐까?”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혜리에게는 영진건설이 살아난 이유를 길게 설명한 문구들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성재가 그 명석한 두뇌를 활용해 구조조정을 시도했기 때문이라는 것만이 쉽게 머리에 들어왔다.
  그리고 감원이라는 단어가 커다랗게 부각되었다. 지사들도 10%만 남겨놓고 무려 90%를 없애버렸었다. 잘려나간 직원들의 생계 대책을 위해 신경을 쓴 구석은 엿보였으나 그는 대를 위해서 소를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수법을 썼다. 한국의 사회구조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애써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추천사에도 “한때 구조조정이란 단어는 사람을 줄인다는 뜻으로 잘못 해석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라고 적혀 있었지만 경영에 무지한 혜리에게는 감원당한 직원들의 생활고가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러니 사귀던 여자 하나쯤 잘라버리는 건, 식은 죽 먹기 아니었을까?’
  
  며칠 후, 심심해서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려고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암만 찾아봐도 홈페이지 주소가 적힌 그의 명함이 온데간데없었다. 어디다가 잘 둔 것 같은데 영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남편 눈에 띄어 ‘이 남자가 누구야?’ 하고 물으면 큰일이라 잘 감춰놓았었는데, 그만 아주 영원히 꽁꽁 숨어버린 것이다. 앞의 글자도 생각이 안 나 인터넷 주소 창에 쳐볼 수도 없었다. 재미 삼아 강성재라는 이름을 쳐 보았으나, 그는 안 나타났다. 개그맨에, 가수에, 원장에, 회장에, 대표이사에 등등, 같은 이름이 생각보다 많았으나 영진건설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강성재는 없었다.
  책을 다 읽어봤다면서 성재 칭찬을 하는 주미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얘, 우리 남편 말이 강성재, 진짜 어마어마한 사업가란다. 존경스럽기까지 하대. 책을 너무 잘 썼단다.”
  “그걸 자기가 쓰지는 않았을 거야. 그 바쁜 애가 글 쓸 시간이 어디 있겠니? 작가가 대필을 해주었겠지.”
  “물론 문장이야 작가가 썼겠지만, 그 내용 말야. 사업하는 사람들에겐 두고두고 교과서로 삼아야 할 정도란다.”
  “그럼 그렇지. 그가 쓴 책이니 어련하려고. 또 글을 쓰려고 하면 문장도 작가 못지않게 아주 잘 쓸 거야. 그래. 잘 됐다. 그 책은 너 가져.”
  혜리는 화제를 바꾸었다.
  “너 성재 홈피 주소 적어놓은 거 있지? 명함을 어디다 잘 두었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통 생각이 안 나.”
  “너도 잃어버렸니? 나도 잃어버려 너한테 물어볼 참이었어. 그날, 너한테서 받아 적었는데 그 쪽지가 그만 없어졌어.”
  차라리 잘 된 일인 것 같다. 명함도 책도 이제 혜리의 손을 떠났다.
  “한데, 미련 없다면서 홈피에는 뭐 하러 또 들어가려고 그러니?
  “심심할 때 성재 사진 들여다보고 목소리도 듣고 또 새로 올리는 글도 읽고 하려고.”
  그 넉 달 후, 혜리는 남편과 함께 유럽을 들러 서울에서 일주일을 체류했다. 바쁜 일정이었지만 친구들은 만났다. 물론 성재 얘기를 풀어놓고 또 입방아를 찧었다. 주미가 만났다는 얘기를 하니, 주미가 전화를 걸어 만났다는 자체에 상당히 거부감을 나타내는 친구도 있었고, “어떠냐. 이번에는 네가 직접 한 번 만나봐.” 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친구도 있었다.
  갑자기 주미 말이 떠올랐다.
  “이왕 만나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만나봐. 이번에 가면 꼭 만나봐. 내가 길을 뚫어놓았으니 덜 서먹할 거야. 하지만 네 성질에 네가 먼저 전화 걸어서 만나기는 힘들겠지? 내가 내년에 한국 갈 일 있는데, 그때 너도 같이 나가자.”
  
  3주 만에 온다던 주미가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서울이 폭설로 인해 길가의 차들이 눈 속에 빠져 있었으나 비행기가 못 뜬다는 얘기는 없었다. 주미가 자꾸 기다려졌다. 왜 이렇게 늦는지 그녀 남편에게 전화라도 걸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니 궁금한 마음이 더해갔다. 주미한테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을 더 기다리다가 할 수 없어 전화를 걸었다. 늦은 저녁때인데도 주미는 부재중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주미 온 지가 벌써 일주일이 됐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막 뛰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혜리한테 연락을 안 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가기 얼마 전부터 거의 매일 통화를 하며 수다를 떨었었다. 주로 옛날 얘기였다. 철민이는 밀려나고 성재가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떠나기 바로 전날, 주미가 물었다.
  “혜리야, 옛날 너의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 말야. 성재한테 다 얘기한다.”
  말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지나가는 말로 슬쩍 비쳤었다. 혜리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래. 다 얘기해도 돼.”
  이제는 그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났기에 혜리는 낄낄 웃기까지 했다.
  분명하다. 성재한테 그 슬픈 얘기들을 다 한 모양이다. 그날, 지나가는 말로 물었으나 거기에는 확인을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사귀다가 헤어지는 건 허다한 일인데, 그까짓 거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하고는 성재가 우습다는 식으로 반응을 해 주미가 화가 나서 또 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 연락을 못하는 것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밤늦게까지도 주미로부터는 리턴 콜이 없었다. 주미는 아무 일 없이 건재하게 귀국했고, 또 건재하게 잘 있다고 남편이 안부를 전해 주었는데 웬일로 연락을 안 하는 것인지 몰라 무슨 오해라도 생겼나 하고 혜리는 자신을 뒤돌아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슬슬 화가 났다. 솟구치는 화를 누르며 전화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밤 열 시가 넘었는데 그녀는 다이얼을 돌리고 말았다. 주미의 첫마디는 “혜리야, 미안해.”였다.
  “뭐가 미안한데?”
  혜리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혜리도 가만히 있었다.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주미의 음성이 아주 느리게 귓전에 흘렀다.
  “혹시 신문에 성재 기사 난 거 못 봤니?”
  “아니, 뭐 또 기업대상이라도 받았니?”
  혜리의 음성은 톡톡 튀고 있었다.
  “나는 네가 알고 있는 줄 알고 연락을 못했어. 아니지. 모를 것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연락할 수가 없었어.”
  갈수록 모를 소리만 해, 혜리의 언성이 저절로 높아졌다.
  “뭔데? 무슨 일이 났어?”
  반면에 주미의 음성은 점점 더 가라앉고 있었다.
  “성재가 죽었어.”
  “뭐라고? 너, 지금 뭐라 그랬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울먹이는 주미의 말이 전화선을 탔다.
  “성재가 죽었다고.”
  ‘죽다니, 성재가 죽다니….’
  혜리는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죽었어? 정말?”
  “죽었어. 대관령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죽었어.”
주미의 음성은 명백한 현실이 되어 혜리의 가슴에 꽂혔다.
  “서울 나간 다음날 성재를 만났어. 네 얘기를 빨리 하고 싶어서. 내가 미쳤지 미쳤어. 뭐가 그리 급하다고. 성재가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자고 해 그러기로 했는데, 갑자기 철민이한테서 연락이….”
  
  마른하늘에서 번쩍이는 번개처럼, 뭔가가 혜리의 머리를 내리쳤다. 정신을 휘청거리게 할 만큼 강렬한 충격이 왔다. 자신이 한 말이 무거운 둔기가 되어 정수리를 친 것이다.
입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남의 말을 하듯 아주 태연하게 말이 나왔으나 왠지 가슴 한편이 싸한 느낌이 들었었다.
  “내 스물세 살 적, 아무것도 내색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못한 채 참아낸 그 처절했던 아픔을…. 다 말해도 돼.”
  뜨거운 기운이 눈가로 몰려왔다. 피가 온통 얼굴 앞쪽으로 몰려드는 듯한 무거운 기분이었다. 그리고 뭔가가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것 같은 답답한 기운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눈앞이 막막해졌다.
  아득히 먼 곳에서 울긋불긋한 풍선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툭툭 터지고 있었다. 그것은 땅이 고무처럼 쑥쑥 들어가 발걸음조차 뗄 수가 없어 성재에게 온몸을 실었던 그날 밤, 네온의 불빛이 원을 그리며 하늘로 날아오른 형상들이었다. 혜리의 가슴에서 부풀었던 풍선도 함께 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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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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