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인디언의 옛 토담집에서

2007.01.31 14:24

박봉진 조회 수:639 추천: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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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조나주 하면 얼핏 유명한 그랜드캐년이나 서부 영화에서 보았던 황량한 땅에 느닷없이 솟아있는 붉은 사암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신비스런 자연경관 못지않게 주면적의 약 사분의 일이 인디언 보호구역이란 것과 그들의 옛 부족별로 색다른 인디언 유직지가 제일 많이 남아있는 곳이란 것도 기억해야 할게다. Danny Boy 민요의 본고장이 아일랜드의 어느 고장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곳 목동들이 부는 피리소리는 산골짝마다 울려 퍼져서 시공을 초월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모뉴멘트 벨리에서 들은 한 많은 인디언의 피리소리도 황량한 골짜기에 울려 퍼질 때 마다 우리네 선인들의 애절한 통수소리 같아서 따가워지는 가슴을 짓누를 수가 없었다.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붉은 암석의 탑, 깎아낸 듯이 수직으로 뻗은 절벽과 절벽, 그리고 붉은 사막의 평원이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모뉴멘트 벨리에 갔던 길에 푸에볼로 인디언들이 약 천년 가까이 살았다는 거대한 절벽 중간의 널찍한 틈새를 이용해 지은 아파트 양식의 옛집 ‘캐년디세리’는 맞은편 포인트에서 보았다. 그리고 호피 인디언 선조들이 약 백수십년 동안 살다가 12세기 중반의 가뭄으로 인해 떠나버렸다는 ‘우파키’ 내쇼날 모뉴멘트는 백여 개의 방이 있는 고층건물 형식의 가옥이라고 했는데 의식 때 사용했다는 원형 운동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또 다른 인디언 유적지 ‘몬테쥬마 캣설’ 내쇼날 모뉴멘트는 깎아내린 듯한 절벽에 이십 여개의 방을 넣은 오층 구조물로서 사다리를 이용해 출입하도록 돼있으며 보존상태가 가장 좋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투어는 옛날의 인디언 거소 안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는 것이 내 구미를 당겼다.

남 캘리포니아는 우기가 끝나가는 봄이어서 우리 집 뒤뜰 자두나무 가지에는 꽃망울이 도톰했는데 다음날 당도한 월넛캐년의 응달진 바위에는 고래살갗 반점처럼 군데군데 흰눈이 남아있었다. 유적지 안내소는 아스팔트 포장의 산등성이 길 한쪽에 있었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미주에는 말(馬)이 없었음으로 옛 원주민들이 도보로 다녔을 이곳은 외부인의 눈에는 잘 뜨여지지 않을 산등성이 너머에 숨겨져 있은 한 종족의 요새 주거지였으리라.

그러기에 거기 시노구아 인디언 유적지로 들어가려면 안내소 건물 안에서 시작되는 나선형 비탈길 하나뿐 다른 길은 없었다. 앞은 첩첩 산골짜기가 가파르게 흘러내려가고 오각형 별 모양의 주름잡힌 좌우 계곡 중턱에는 넙적한 바위 아래마다 삼백여개의 반 동굴 형 가옥들이 즐비하게 구축돼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연 바위를 지붕삼고 그 밑의 퍼석돌들을 파내서 안쪽을 넓힌 것과 옆 경계와 앞쪽에는 토담을 쳐서 각기 거소를 갈랐었다.

나는 일행들에서 뒤처져 여느 것들 보다 넓어 뵈는 한 주거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추장의 거소였을 것만 같다. 앉은 터가 좌청룡 우백호에다 봉황이 앉은 형상이면 그만이다는 풍수지리설을 그들도 믿었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그곳은 전망이 대단한 명당자리임에는 틀림없었다. 먼 옛날 이들 선조들은 몽고반점 유전자를 화인처럼 지니고 미주대륙이 아세아대륙과 떨어지지 않았을 때 알루산열도 지역을 거쳐 와서 알라스카에서는 에스키모로, 미국 본토에서는 인디언으로, 그리고 중남미대륙에 가서는 인디오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곳 추장도 우리 같이 크지 않은 키에 광대뼈 체형에다 동양인이라고 놀림을 당하는 펌핀 얼굴일 것만 같다. 긴박한 사태가 생기면 이 천연 지휘소에서 좌우 혈거(穴居) 민들에게 명령을 전하고 때로는 표정을 바꿔가면서 버펄로 뿔 나팔을 불고 북을 쳤는지 모르겠다.

거소 안은 꽤 넓어 중간에 칸막이 토담을 쌓았고 미닫이 절반만한 출입구를 뚫었으며 바위 천정에는 불을 지폈던 새까만 그을음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판판하게 고른 흙바닥에 퍼져 앉아보니 밑자리만 깔았다면 내 어릴 때 흔히 보았던 이웃들, 영구네와 점순네의 토방이었다. 손바닥만한 밭떼기와 품팔이로 연명하며 근근이 보릿고개를 넘기던 그 부모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후, 그들도 언제였는지 떠나버리고 그 오두막들도 이렇게 토방 벽만 남아있지 안았던가.

나무열매를 따먹고 뿌리를 캐먹으며 사냥과 약간의 옥수수 농사를 지었음직한 12세기 전후 석기문명 후기 인디언들의 생활 양상으로는 춥고 더운 기후와 밤낮의 일교차를 이겨내고 맹수로부터 보호받으려면 이런 주거지 외의 다른 선택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들은 왜 무덤이나 다른 문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곳을 떠나버렸을까? 기후 변화로 인한 장기간의 가뭄이나 무방비상태의 전염병에 휩쓸렸을까. 아니면 외적에 의한 살육? 하였든 이들도 문자를 갖지 못했던 아즈텍 문명이나 마야 문명처럼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가 된 것이 안타깝다.

손가락으로 천정의 그을음을 그어 내 얼굴에 문질러봤다. 천년 가까운 세월의 풍화에 그을음이 묻어날 것 같지는 안았지만 그래도 내가 이들 인디언과 다르지 않은 종족이란 것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게도 얼굴을 들여다 볼 손거울이 없다. 지난 세계대전 때는 이 주의 노천 광산에서 무진장의 구리를 파내어 전쟁을 치렀다고 했는데, 구리의 본산지에 살았던 인디언들이었건만 그 흔한 유적지 출토의 동경(銅鏡) 하나 갖지 못했으니 그들은 자기 얼굴을 아주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자기를 보지 못하면 바깥세상도 볼 수 없는데 말이다.

누가 말했던가. 역사는 강자가 연출하는 연극이고 강자의 논리로 쓴 기록이라고. 인디언들은 자기네 땅에 불청객으로 들어온 다른 종족에게 농사짓는 방법이며 어로와 사냥 그리고 겨울을 나는 생존 술까지 배워주고 공존하기를 바랐는데, 미주 대륙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유적지의 인디언들만 해도 황량한 오지에 불고 간 바람의 흔적만 남겨놓지 안았는가.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바위 뒤를 돌다보면 몸에 털가죽 옷을 걸친 채 잡은 사냥감을 목도리처럼 두른 인디언 한둘은 만날 것 같다. 그들이 옛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면, 남정네는 벼랑 바위 위에서 밧줄로 땔 나무를 묶어 내리고 아낙은 이마 끈으로 항아리를 걸머지고 물을 길러오고 있을게다. 외관이나 습속이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나를 그들은 큰집동네 아세아에서 왔다고 투박한 질그릇에다 산열매며 몽돌로 갈아 만든 음식과 사냥한 살코기를 돌칼로 썩둑 잘라주겠지. 같은 우랄알타이어계 어순으로 많이 들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을 거고. 그리고 좌우 손가락에 실을 걸고 주거니 받거니 실뜨기 놀이도 하자고 하겠지.

유럽 쪽에서 온 듯한 한 백인 여자가 나를 포함한 토담집 전경을 와이드앨글에 담는다. 봄볕에 탄 내 얼굴이 네이티브 인디언으로 보였으면 어떠리. 가슴에 표를 달고 단체로 몰려와서 왁자지껄 떠들다가 사진 한 장 찍고 가버리는 그런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녀는 나를 보고 인디언에 대한 연민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내게는 어느 카니발에서 북치고 춤추던 중년 남자 인디언의 모습이 퇴색되지 않는 영상으로 남아있다. 단순 율동을 반복하느라고 허리 비곗살이 덜렁거리던 것을 보면서 목안이 꽉 메었다. 광활한 대지의 주인들은 자급자족의 자원을 찾아 자유롭게 산천을 누비며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는데, 어쩌다가 조롱안의 새처럼 보호구역이란 불모의 자투리땅에 내몰려있을까. 원주민에게는 일하지 않아도 모이를 주는 것에 길들여져서 허구한 날 술에 취해있거나 도박 아니면 마약에 빠져있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참으로 안쓰럽다. 보호란 미명의 휴멘이즘이 적어도 인디언들에겐 종족 무력화와 자연도태 기간을 단축하는 데는 기여할지언정 복지혜택의 참뜻과는 너무 핀트가 맞지 않는 듯 하다.

아리조나주 황야의 석양에 영혼을 말리고 있는 인디언들에게 오수란 깊은 잠을 자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말해줄 사람은 없을까? 1868년 미국정부의 유화정책에 따라 셔만장군은 나바호 인디언측에 세 가지의 선택권을 제시했다. 첫째 동부의 기름진 땅, 둘째 섬너 주변의 땅, 셋째 여태 살아온 아리조나의 메마른 땅. 그들도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택했다가 나중에 천벌은 받은 땅 소돔 고모라가 되고만 경우를 미리 경계했으리라. 동부의 기름진 땅을 마다하고 쓸모없어 뵈던 땅, 붉은 황무지를 서슴지 않고 택했던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랬기 때문에 나바호 인디언의 영혼이 숨쉬는 숭고한 성지 ‘모뉴멘트 벨리’가 오늘날 남아있게 된 것이다. “I will be happy forever, Nothing will hinder me......" 표현은 단순하지만 향토에 대한 집착과 열정이 솟구치는 의식의 노래요, 초혼의 이 노래를 목청껏 불러서 인디언 보호구역의 경계를 넘어 그들 선조들의 활동무대였던 광활한 산야에 메아리로 울려 퍼지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시계를 들여다보니 일어날 시간이 됐다. 일행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간다는 말을 하면 금세 급해지는 인디언의 성정대로 싸우듯 언성을 높이면 어쩔까. 그러면 나는 주먹돌 하나를 주워들고 오래지 않아 또 오겠다는 말을 암각화로 쪼아 내보여야 한다. 그러나 레규레이션은 그것을 금하고 있다. 나는 유적지가 안보일 때 까지 몇 번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내 은근한 마음을 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성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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